118.
“……인간의 땅은 오랜만에 밟는군.”
그의 목소리. 낮고 무거운 저음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온다. 나는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마왕은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발 주변으로 어둠의 기운이 위협적으로 똬리를 틀었다.
“투라는 완전히 파훼되었는가.”
그는 잠깐 저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무언가의 상태를 자연스레 알 수 있는 듯했다.
“제로스가 걱정했던 이유를 알겠군. 강한 마물을 이렇게 빨리 처리할 줄이야.”
돌 마물을 투라라고 부르나 보다. 확실히 창조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았을 때,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대는 웃고 있지 않지?”
마왕은 웃는 듯 마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승리가 그대의 발아래 놓였는데.”
“당신…….”
당신 때문이다, 라고 나는 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눈앞에 그가 나타났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왕인 그가 직접 인간계를 정복해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걸까. 마침내 그가 직접 뛰어들어, 인간과 신의 싸움이 되고 말 거라고?
차마 묻지 못하고 굳어져 있을 때 마왕이 팔을 내 쪽으로 뻗어 왔다.
움찔.
“어쩐지 마른 거 같은데.”
내가 흠칫한 것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제법 다정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하얗게 일어나는 신성력 때문에 더 이상 내게 닿을 수 없었다.
일반 마족이었으면 무섭게 일어나는 신성력에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마왕은 한층 어두워진 눈으로 오히려 강하게 신성력을 마기로 밀어붙였고, 마침내 신성력이 산산조각으로 빛의 파편을 뿌리며 흩어지자 그제야 제대로 되었다는 듯이 내 뺨을 끌어당겼다.
“그동안 잘 지낸 거 맞나?”
“……지금까지는요.”
내 얼굴을 살피는 눈길에 주눅 든 채로 답하자 마왕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 행동 여하에 따라서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내 뉘앙스를 읽은 것이다.
“성격은 여전하군.”
좋은 뜻일까, 나쁜 뜻일까. 나는 그를 은연히 노려보았다. 마왕은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무심한 듯 반응했다.
“다행이야. 나는 전혀 잘 지내지 못했던 것과 별개로.”
“…….”
나는 참담한 눈을 하고 말았다. 그는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제로스가 그대를 봤다고 했지.”
“제로스라고 하면…….”
“이곳을 공격했던 마족. 수다쟁이에 숫자 세기를 좋아하는 세아드라안의 후손이지. 마계 서쪽에 거주하는 나름 매력적인 가문이야.”
망토를 뒤집어쓴 채로 마물에게 마기를 공급하던 마족을 말하는가. 말수가 없을 거 같았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마왕의 말을 들었다.
“아주 화나 있었어. 강제로 소환되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자세하게 떠들더군. 인간 소환사들이 차원의 문을 겹쳐서 자신을 역소환시켰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방법이라고, 신의 저주라고 떠드는 걸 보면서 그대를 떠올렸지.”
“신의 저주……?”
나는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내 능력이 신의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단 말인가? 놀란 나를 보면서 마왕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큼 기발했다는 거야. 보통 마족이 나타나면 인간들은 마족을 잡거나, 공격하거나, 이용하려 하거나 하니까. 마물처럼 역소환하는 방식은 잘 쓰지 않는 편이지.”
“그는…….”
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혔어요. 마물에게 마기를 공급해서…….”
“그를 옹호하려는 게 아니야.”
마왕이 말했다. 나를 끌어당겼던 손에 힘을 주면서, 내 숨결을 모조리 앗아갈 것처럼 가까워진 채로.
“나는 그대가 마족에게도 눈에 띌 만한 실력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별로 기분 좋지 않다는 의미로.”
“무, 무슨 뜻이에요? 눈에 띌 만하다니.”
“강대한 신성력을 가졌거나, 특별한 능력을 지녔거나. 그런 인간은 늘 마계의 화젯거리가 되지. 우리도 인간계의 소식을 궁금해해. 어떤 나이트들이 강한지, 어떤 기사가 비상식적인 신성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떤 소환사가 우리를 역소환할 수 있는지 따위를 말이야.”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도움을 받아서야 간신히…….”
“알아. 그대의 신성력은 매우 약하니까.”
꼭 집어 말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마왕은 내 자신감에 찬물을 붓듯이 말했다.
“그대는 힘이 없지. 약하고 연약해. 보통의 소환사지만 어딘가 독특해. 변형 능력으로 결국 나를 찾아왔으니까.”
마왕이 내 입술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비틀었다. 나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물론 가장 대단한 건 그대의 솔직한 욕망과 욕구라고 하겠지만. 순정이나 도덕성을 완전히 비웃는.”
나는 왠지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마음이 뿌옇게 흐려져 그 사이사이로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울적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걸 말해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니.”
마왕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대가 오지 않았으니까. 강력한 소환을 해도 힘이 튕겨 돌아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했다.”
“……숙소 주변으로 신성력이 뿌려졌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에요. 그저 전투에서 묻어나온 마기를 없애려고 대대적으로…….”
“자신하는가? 누군가 내 소환을 막으려고 신성력을 과도하게 뿌린 게 아니라고?”
나는 멈칫했다. 그의 말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의 소환을 방해했다는 의미였다.
‘혹시 펠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숙소 전반에 신성력을 뿌리는 결정은 본대의 대장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개 성기사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휘관이라든가.’
지휘관이라고 하자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주 당연하게.
“!”
내가 멈칫하자 마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누군가가 생각났나 보군.”
“아, 아니…….”
“어설픈 거짓말은 그만둬. 나는 그대의 변명에 쉬이 넘어갈 존재가 아니니까.”
마왕은 조용히 요구했다.
“그저 하나만 말해 줘.”
“……뭐, 뭘?”
“그대가 떠올린 자가 그대의 가슴 속에 신성력을 부어 넣은 인물과 동일 인물인지만.”
“……!”
“역시 그렇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알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코앞에 있는 내가 그에게 감정을 숨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나를 느꼈다. 그런 나를 껴안는 건 그의 마기였고 동시에 찔러 오는 것도 그의 마기였다.
분노한 심정을 드러내듯 마왕이 뿜는 마기는 근처의 땅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풀과 꽃을 썩게 했다. 심지어 공기마저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황폐해진 세상이 느껴지자 나는 절망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대를 추궁하려고 했지.”
마왕은 조용히 말했다. 눈빛에는 채워지지 못한 감정이 있었다.
“나를 찾지 않고, 나를 부르지 않는 그대를.”
“욱, 으읏…….”
“내 제안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 그대를.”
마왕은 마침내 숨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대를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는군.”
마왕의 시선이 나를 꿰뚫었다.
“그저 그대와 질펀하게 다시 관계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야. 그대는 어때?”
“…….”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예전과 같은 관계라면 문제 될 거 없지 않냐는 결론이었다. 나는 욕망에 약한 여자다. 그가 내 세상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내 깊은 마음 속에서는 부담감과 거부감이 차올라 그를 외면하게 된다. 이상하다. 왜 이전처럼 욕망이 시키는 대로 관계할 수 없을까.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걸까.
나는 나를 알 수 없어서 그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마왕은 그런 나를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응시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내 반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으로 고개를 돌린 마왕은 이 세계에 맞지 않는 존재였다. 바람에도 흩날리지 않는 그의 머리칼이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할 때, 그가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 관계는 내가 끝내야만 끝낼 수 있어.”
마왕은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이 경고했다.
“그러니, 더 끔찍한 일이 생기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신성력 영역 밖에서 소환을 기다려.”
나는 겁먹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내가 두려움에 뒤로 물러나자 마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 반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두려워하지 마. 그대를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저…….”
마왕의 발에서부터 마기가 올라온다. 그 까마득할 정도로 무겁고 어두운 기운은 이쪽 세계에서 그를 지워 갔다. 더 이상 그란 존재가 여기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그저…….”
마왕은 망설이듯이 말을 반복했다. 제 진심을 헤아리려는 듯이.
“그대를 온전하게 보고 싶을 뿐.”
그 말이 끝나자 그는 사라졌다. 그가 깨끗하게 없어지고 나서야 온몸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나는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고, 쓰러진 기사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기사는 기절만 한 상태였다. 그는 아무것도 못 봤으니 깨어나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누군가 절뚝거리며 치료소 뒤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여기 있었군요. 이제 떠날 마차가 왔다고…….”
펠이었다. 하필 그가 나를 데리러 오다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을 때 펠이 멈칫했다. 그는 내 발아래 쓰러져 있는 기사를 발견했고 누렇게 말라 버린 풀들도 발견했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