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7화 (117/220)

117.

신성력을 끌어냈다. 위치는 마족이 만든 차원의 문이었다. 그 문에 우리가 만든 차원의 문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마족을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 경우를 떠올리며 나는 소환 영역을 겹쳐 그리는 데 집중했다. 어느새 마족이 낌새를 눈치채고 우리를 보았다.

“소환사들을 깜빡했군.”

마족은 마물에게 손을 뻗었다. 의지를 불어넣었는지 마물이 기괴한 형상의 몸뚱이를 우리 쪽으로 돌렸다.

“열 명을 채울 수 있게, 모두 죽여.”

그의 삭막한 목소리가 울린다. 마물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피, 피해요, 말레드레드!”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돌 마물을 보며 레너드가 외쳤다. 그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두 다리로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와 마물 사이에 있던 기사들이 신성력을 뿌리고 있었지만 마물은 우리만을 보며 달려왔다. 결국 레너드는 이를 악물며 대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제발!”

그의 간곡한 외침과 함께 검이 휘둘러졌다. 돌과 돌로 이어진 부분이 순간적으로 그 공격에 부서졌다. 하지만 마기를 공급받고 있는 덕에 피어오르는 마기에 깨진 부분이 다시 붙었고, 멀쩡해진 돌 마물은 짜증 난다는 듯이 레너드에게 팔을 휘둘렀다.

“커헉!”

커다란 돌덩이에 부딪쳐서 레너드는 저만치 날아갔다. 갑옷이 떨어져 나갔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나는 가슴이 떨려 왔다. 다급하게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던 소환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마기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신성력 공격에 회복하지 못할 테니까.

‘됐다!’

소환 영역이 완성되자 나는 기뻐하며 마족의 차원의 문을 봤다. 검은 원 위로 완벽하게 겹쳐진 흰 빛의 원. 그 원이 생겨나자 기존의 원이 크게 흔들리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짧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마족은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소환의 문이 강제로 마족을 빨아들이고 나자 마물들이 분노한 것처럼 그으으 울어댔다. 그리고 우리에게 달려온 마물은 두 손을 위로 들어 아래로 내려쳤다. 나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소환사를 부추기고 있었던 터라 동작은 완전치 않았다.

“……아!”

문맥상 뒤로 이동 마물이 내려친 팔에서 쏟아진 돌 폭풍에 왼쪽 다리가 맞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다리의 뼈가 부서진 것일까. 당장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릿속이 까매지고, 그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그리고 그때 다음 공격을 알리는 그으으- 울음소리가 났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로 돌아보자 마물이 보인다. 거대한 손이 하늘 높이 치켜세워져 있었다. 마물이 손을 내려치면 그다음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나란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죽는구나 싶어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죽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전사인 내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눈만큼은, 평온한 죽음을 상징하는 굳게 닫힌 눈만큼은 죽는 순간 이뤄 내고 싶었다.

‘누가 봐도 놀라지 않게.’

아론을 불현듯 떠올리고 만다. 날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더 이상의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마물이 주먹을 쥔 채로 굳어져 있는 게 보였다. 마물의 주먹에서는 여전히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제를 한 번에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기였지만 어쩐지 내 몸에 닿아서는 그 힘을 일체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몸으로부터 마기를 밀어내고 있는 빛을 보았다. 내 가슴에서 시작되어 내 몸을 방어하고 있는 빛은 완전했다.

아론의 신성력.

“……!”

언제 내 가슴에 이리 많은 것을 밀어 넣었을까. 내 가슴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의 기세가 엄청나다. 마침내 마물은 그악하게 울며 뒤로 물러났다. 마물의 주먹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가루로 변해 뚝뚝 작은 알갱이가 흩날리는 마물은 자리에서 쿵쿵 뛰었다. 화가 나고 기분 나쁘고, 아프다는 듯이.

나는 살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기었다. 마물은 나를 죽이려는 듯이 따라왔다. 하지만 아론의 신성력이 강력하긴 한 것인지, 마물은 자꾸 부서지는 몸 때문에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자네, 괜찮나?”

지휘관이 어느새 기어가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죽음에서 간신히 벗어난 터라 정신이 없었다. 왜 그가 내 눈앞에 있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지휘관이 안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뒤를 가리켰다.

“다행히 지원군이 왔어.”

돌아보자 성기사들이 보인다. 소환사들도 대열을 갖춰 마물을 마계로 돌려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선두에 서서 마물을 소환 영역으로 몰고 가는 기사를 보았다. 아론이었다. 대검으로 돌 마물을 내려치는 그는 무자비한 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휘관은 그를 보고는 정말 안도했다는 듯이 말했다.

“가지. 여긴 그에게 맡기면 충분할 테니까.”

지휘관은 나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와주었다.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왼쪽 다리가 바닥에 닿자 잇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역한 아픔이 밀려온다. 내가 고통스러워하자 지휘관이 혀를 찼다.

“다리가 완전히 부서진 모양인데, 어쩌나. 부상자들이 많아서 치료가 바로 될지 모르겠어.”

그의 말은 정확했다. 싸우는 장소 뒤편으로 평원을 조금 걸으면 살짝 둔덕이 있는 곳이 나왔다. 임시 치료소가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료소 안에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을 만큼 많은 부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치료 사제가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워낙 중상을 입은 부상자가 많다 보니 내 차례는 얼른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지휘관은 저쪽에 우리 팀 부상자가 있다고 말하면서 나를 그쪽으로 옮기려고 했다.

“다리를 다쳤나요? 생명에 위험이 없다면 뒤쪽에서 순서를 기다리셔야 해요.”

치료 사제 하나가 지휘관을 보며 다른 곳으로 가라고 인도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천막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확실히 경상자들이 많이 있었다. 아프지만 고통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사람들, 혼자 힘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그들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힘들었기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휘관이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이대로 두고 가야 하는데 괜찮겠나?”

“그럼요. 근데 레너드는…….”

차마 살아 있냐고 질문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휘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아, 의식을 잃었지만 살아 있어. 물론 가슴 부상이 심해서 한동안 누워 있어야 할 거야.”

갑옷이 떨어져 나가며 하늘로 솟구쳤으니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는 안도했으며 한편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때 모른 척했다면 그렇게 크게 다치지 않았을 테니까. 지휘관은 작게 한숨 쉬는 나를 보면서 치료한 뒤 보자고 인사한 뒤 떠나갔다.

나는 그가 가는 방향을 무심코 보다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불길을 발견했다. 기사들이 불길 속에 무언가를 연신 던져 넣고 있었다. 동료들의 시체였다. 가슴이 무거워진다. 마기에 침식된 채로 죽으면 저렇게 뜨거운 불꽃 속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저 활활 타올라 재가 되도록.

저렇게 죽는 것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일이라고 나는 씁쓸하게 눈을 감았다.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전투는 아론을 비롯해 세 개의 팀이 지원을 온 뒤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돌 마물과 분열된 마물의 시체를 모두 처리하는 데는 반나절이 더 걸렸다.

어둑해졌을 때에야, 싸움이 모두 종료되어 본대로 부상자를 태워 갈 마차가 도착했다. 먼저 중상자들부터 이동되었다. 나는 평원에 앉아서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주위는 더욱 깜깜해졌고 횃불이 치료소 주변으로 피어올랐을 때, 아론이 나를 찾아왔다.

“다리 상처가…….”

아론은 흠칫해서 남아 있던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조금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니었군요.”

나는 그의 몸에서 번쩍거리며 빛이 빠져나오자 기겁하고 말았다. 이미 전투로 많은 신성력을 쓴 상태였다. 갑옷에 잔뜩 그어진 마물의 공격이며, 생채기 난 이마며, 전투의 고역스러움이 그대로 묻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경상 맞아. 정말 아픈 자들을 못 봐서 그래. 그들은 기절한 채로 본대로 이제 막 돌아갔으니까…….”

나는 그의 힘을 거절했다.

“그러니까 힘을 아껴. 나한테 다 써 버리면 안 되잖아. 너는 우리 본대의 희망인데……. 내 가슴에까지 힘을 부어 넣었으면 남은 힘도 얼마 없을 거 아니야.”

내 말에 아론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알았군요. 힘을 불어넣은 걸.”

그 담담한 대꾸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언제 그런 거야?”

“어제요. 말레드레드가 잠들었을 때, 넣을 수 있을 만큼 신성력을 넣었습니다.”

“…….”

왜, 라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은 뻔했다. 날 지키려고 넣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날 지켜냈다. 그는 늘 전후 관계가 명확하게 움직였다. 그의 성격상 날 방치해 놓고 위기가 발생하면 구해 준다는 건 맞지 않았다.

“마기를 방어하는 힘일 뿐입니다. 보다시피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말레드레드가 이렇게 다친 걸 보면…….”

괴로운 듯 부어오른 다리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네 신성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마물이 워낙 특이해서지.”

“확실히 독특한 마물이었습니다. 물리력이 강화된 마물은 처음이라, 피해가 더욱 큰 것 같아요.”

아론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지휘관으로서 그도 이번 큰 피해를 절감하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던 사제들을 떠올렸다. 불길에 허망하게 스러져 가던 시체들도 기억해 냈다.

“……더 잘 싸웠다면 좋았을 텐데.”

동료로서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져 나오는 통증에 절로 눈가가 찡그려지고 만다. 내가 괴로워하며 고개를 수그리자 손이 와 닿았다.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은 상처로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는 내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맞추더니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소환 영역을 그려 내서 쉽게 이긴 겁니다. 오늘 등장한 마족은 마기를 공급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어요. 자신이 직접 전투를 하지 않은 걸 보면요. 아마 녀석이 오래 머물렀다면 마기로 강화된 마물이 더 여럿으로 분열하여 더 심각한 피해를, 더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자아냈을 겁니다.”

“……위로해 주는 거야?”

아론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에요. 전 말레드레드를 연모하는 남자 이전에 동료이자 기사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웃었다. 나는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아론은 더 말하고 싶어 했으나 멀리서 기사단장이 그를 찾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본대에서 뵙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수그려 입술을 맞췄다. 너무도 당연하게 입술 도장을 찍고 가 버린 터라 거절도 할 수 없었다. 두 눈만 크게 끔벅거리고 있을 때 그는 사라졌고,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뽀뽀를 해 버리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 뜨거워진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살짝 잠이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반쯤 감았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나만이 아닌지, 내 옆에 있던, 팔을 다친 기사가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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