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6화 (116/220)

116.

“말레드레드가 뭘 신경 쓰는지 알아요.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 애써 볼게요.”

그 말인즉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론은 그게 쉽지 않겠지만, 이라고 작게 덧붙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를.

나는 정사 직후의 냄새와 후끈한 열기로 뜨거워진 여관방을 나오면서 머릿속이 왜 이리 멍한가 생각했다.

아마도 아론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에 뭘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곤란해.’

이제 어리숙한 울보 소년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 성숙한 몸으로 나를 압도하는 사내를 생각하면서 나는 달아오른 열기를 꺼트리려 애써야 했다.

나는 카란의 천막으로 갔다. 발라 잎사귀를 구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발라 잎사귀 공급이 계속 안 됐기 때문에 혹시라도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갔지만, 카란은 방법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찾는 사제들이 많은데 참 곤란해. 비슷한 효능을 가진 다른 거라도 나눠 주면 좋은데.”

카란은 많은 사제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사제들에게 발라 잎사귀가 필수 보급품인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새삼스러울 거 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만약 급하다면 다른 도시로 갈 때 비슷한 효능이 있는 약초를 특별히 구해 와 주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알아서 구해 보도록 할게요.”

임신이 되지 않는 약초를 그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조금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었고, 관계를 즐긴 이도 나였으니까. 하루 휴가를 내고 가까운 도시로 가 보자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숙소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여태 숙소 앞에 서 있는 사람 중에 좋은 인상을 남긴 자가 없었다. 아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긴장시켰던 터라, 나는 이번에도 서 있는 여인을 보며 경계했다.

레베카.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불쾌한 감정들이 일어나는 걸 꾸역꾸역 참는 눈이던 그녀는 느닷없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죠?”

그녀의 손엔 둘둘 말린 천 주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게 가져가라고 고갯짓을 했다.

“발라 잎사귀예요. 제가 공작가에서 따로 가져온 것이죠.”

멈칫했다. 이걸 왜 내게 주느냐는 듯이 쳐다보자 그녀가 짧게 웃었다. 몰라서 묻느냔 듯이 눈빛에 조소가 가득했다.

“아론나이드 경과 밤새 있었던 거 알아요.”

“……!”

“설마 주점에서 여관으로 바로 가 버릴 줄이야. 방심하고 있었는데 당했네요. 아는 기사가 당신과 아론나이드 경이 여관으로 들어가는 걸 본 것 같다고 말해 줄 때까지도 나는 아론나이드 경을 찾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론나이드 경을 빼돌린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아다녔다니. 정말 웃긴 일이죠.”

레베카는 자조했지만 눈빛엔 날 향한 반감과 질투, 억하심이 굉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해서 그것을 갈무리했다. 어느새 엄격한 얼굴이 된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찾는 이성적인 귀족의 태도로 내게 훈계했다.

“임신이 되지 않아야 해요. 마물과 싸우는 전사가 혼인도 올리지 못한 귀족의 씨를 배고 있다면 얼마나 비난을 사겠어요? 당장 퇴출감이죠.”

레베카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 이 잎사귀를 챙겨 먹어요. 확실하게 임신을 방지해 줄 거니까.”

그러나 나는 받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녀는 내가 망설이는 이유를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독성이 있거나 몸에 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레베카는 분하다는 듯이 고백했다.

“왜냐하면 정말 임신이 안 되길 바라니까요. 아론나이드 경이 당신 같은 여자와 몸을 굴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전이니까. 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지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 그건 나여야만 해요. 그의 정식 아내가 될 나만이 가능하죠.”

이쯤 되면 레베카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내가 너무 싫지만 내가 그의 아이를 갖는 건 더 싫었기 때문에 내게 협조해 준다는 그녀. 따라서 발라 잎사귀가 지급되지 않는 지금, 그녀는 내게 발라 잎사귀를 직접 전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제야 이런 행동의 이유를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도로 가져가요.”

그 순간 레베카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속에서 나를 향해 격노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 그게 무슨……! 서, 설마 사생아 따위가 또 사생아를 낳으려 하는 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감정에 벅차 말을 못 잇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내가 그녀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론의 아이를 가질 거라고 추측한 걸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한 말은 너무도 가혹하고 못된 것이었다.

사생아가 사생아를 낳다니. 마치 모든 이들이 비난하는 저주의 굴레에 갇힌 삶이 아닌가. 자신이 받았던 비난을 다시 자식에게 물려 주는…….

나는 씁쓸히 생각하고는 그녀를 다시 노려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아론의 아이를 가지려 해서가 아니에요. 내 힘으로 충분히 약초를 찾을 수 있어서죠.”

“…….”

“솔직히 도움을 받기 싫은 것도 있어요. 사생아 따위에게 도움을 주는 게 끔찍하게 싫은 당신처럼.”

“윽, 나, 난…….”

정곡을 찔렀나. 당황하는 그녀에게 나는 짤막하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들어갈게요.”

나는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밖에서 레베카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분노한 탓인지 그녀는 쿵쿵 시끄러운 여운을 남기며 멀어졌다.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정사로 지저분해진 몸을 씻고 깨끗하게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준비된 소환사였다. 은빛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맸다. 맑고 깨끗한 피부 위로 알 수 없는 그늘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들은 미소를 지으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은 훈련이 아니라 바로 소탕 작전 투입이야!”

지휘관은 팀에게 외쳤다. 그는 나를 향해서 소환사들 선두에 서라고 했다.

“강력한 마물이 출현했으니까 소환 영역을 잘 그려야 해!”

지휘관은 그렇게 간결하게 지시하고는 모두 마차에 올라타라고 했다. 그는 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전투는 이미 진행됐어! 3개 팀이 동원되었지! 강한 마물이 분열해서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현재 인원만으론 부족한가 봐. 그러니 다들 정신을 똑바로 차려! 우리 몫의 마물을 없애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상황은 급박했다. 우리가 마차를 타고 도착했을 땐, 이미 부상자들이 상당히 속출한 상태였다. 먹구름이 낀 우울한 하늘 아래, 아침부터 출몰한 마물은 마치 거대한 돌문처럼 엄청났다. 마물이 두꺼운 회색 팔을 휘두를 때면 그의 몸에서 수십 개의 돌덩이가 쏟아져 기사들을 공격했다. 단순히 마기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공격이 엄청나서, 기사들은 선뜻 마물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신성력을 뿌리지도 못했다.

“보이지? 저런 녀석들이 세 마리나 있어. 그리고 저 녀석이 분열하면 네 마리가 되고 말겠지.”

지휘관은 시선 왼쪽 끝에 선 채로 몸을 부르르 떠는 마물을 가리켰다. 그 마물은 창이 날아오자 온몸을 굳혀서 창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곧바로 온몸을 회전했다. 몸 자체가 커다란 돌들로 구성된 형태라서 그런지 앞뒤가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기형적인 움직임을 자랑했다.

“으헉!”

날아온 돌덩어리에 얻어맞아 쓰러지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막 도착한 우리는 순식간에 늘어나는 부상자들을 보며 질겁했다. 이건 단순히 신성력을 잘 뿜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일단 저 강력한 마물 자체를 물리력으로 이길 수 있어야 했다.

“마물을 소환 영역으로 몰고 가는 건 둘째 치고, 저 공격부터 막아 약점이 어딘가 알아봐야겠군.”

지휘관은 기사들이 마물 주변에 둥그렇게 둘러서는 공격 전법을 선택했다. 마물의 몸이 자유자재로 돌아가기 때문에 공격을 특정화시킬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기사 중 누가 마물의 몸에 접근하는 역할을 맡지?”

지휘관은 고민스럽다는 듯이 기사들을 둘러봤다.

“제가 하겠습니다.”

펠이었다. 지휘관은 단번에 나선 그를 영웅처럼 우러르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우리는 모두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마물은 새로운 인간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흥분해서 그으으……! 거렸다. 그 소리는 싸우기 전 힘을 모으는 동물의 소리 같았다. 지휘관이 외쳤다.

“자, 모두, 일제히 신성력을 뿜어내!”

소환사들도 작은 볼 모양의 신성력을 만들어 던져 냈다. 그렇게 기사들과 소환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성력을 던지자 마물은 괴로운지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그 틈을 펠이 파고들었다. 몸을 낮춘 채 그는 노련하게 마물의 몸에 가까이 갔다. 그리고 일순간 대검에 신성력을 일으켜 마물의 몸을 쑤셔 보려는 순간, 마물의 머리 위로 커다란 원이 번쩍였다.

“마, 마족……?”

처음 보는 마족이 서 있었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그는 손을 벌려서 마물의 머리 위로 마기를 쏟아냈다. 마기가 들어가자마자 펠의 신성력은 먹히지 않았다. 검은 단단한 갑옷에 부딪친 것처럼 튕겨났고, 마물은 자신의 몸에 가까이 와 있는 성기사를 발견하고 사납게 양팔을 흔들었다.

“……컥!”

그 거대한 팔에 부딪친 펠은 멀찍이 날아가고 말았다. 마족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

팔을 흔들면서 쏟아진 돌덩이가 주변 기사들을 공격했다. 네 명이 뒤로 날아갔다.

“다섯 명.”

마족은 무얼 하는 걸까. 소환사 하나가 그에게 신성력 공격을 퍼부었다가, 도리어 마기에 당해 쓰러지자 마족은 수를 늘렸다.

“여섯 명.”

바로 쓰러뜨린 사제의 수를 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휘관이 정신을 차려 내게 명했다.

“뭐해? 어서 차원의 문으로 날려 보내!”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마물의 공격이 너무도 강력해서 돌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떨어진 지팡이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옆에 쓰러진 소환사 하나를 부축했다. 멀쩡한 소환사들은 세 명이었다. 나머지는 돌덩이를 맞고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영역을 그릴 테니까 신성력을 보태 주세요.”

내 말에 소환사들이 머뭇거렸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서, 마물의 공격이 언제 쏟아질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지금 상황에선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지원이 올 때까지 후퇴하자는 눈빛이었지만 문제는 마족이 나타나 마물에게 마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후퇴하더라도 마물의 공격권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의미.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마족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본대까지 위험해질 거예요.”

내 말에 소환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지팡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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