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4화 (114/220)

114.

“일단 누울 수 있는 데로 가자.”

“말레드레드, 말레드레드…….”

그의 목소리는 느리게 반복해서 빠져나왔다. 나라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린 것처럼 내 이름만을 반복해 중얼거리는 사내에게, 나는 그의 몸을 꽉 붙든 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를 부축해서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론은 더욱 휘청거렸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로 누워 버렸다. 문제는 그를 껴안고 있던 나도 그의 무게를 따라서 침대 위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윽…….”

나는 아론의 팔을 옆으로 치워 내며 간신히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갑옷의 무게가 안식을 방해한다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그의 갑옷을 풀어내었다. 바로 전투에서 돌아온 자답게 그의 갑옷은 매우 무거웠고, 팔과 다리에 차고 있는 방어구 역시 각각의 무게를 자랑했다. 끈으로 단단하게 여미어진 그것들은 특수한 방법으로 풀리지 않게 묶여 있었다. 따라서 그런 매듭이생소한 내가 쉽게 풀 수 없었다.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의 그림자가 졌다.

“……제가 할게요.”

아론은 고전하는 나 대신 요령 좋게 그것들을 풀어냈다. 쓱쓱 바닥으로 떨어지는 갑옷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어느새 갑옷을 다 풀어낸 아론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다쳤어?”

나는 그의 상의 위로 핏방울이 번진 걸 발견했다. 얼른 손을 뻗자 아론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어디 긁혔나 봐요.”

아론은 그제야 제 상처를 봤다는 눈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잘 짜인 가슴 근육 위로 가늘게 난 상처가 보인다. 가벼운 생채기였다. 혹시나 해서 근육 주변을 내리누르며 상처 부위를 매만지자 아론이 나른하게 신음해 왔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다, 다행히 뼈나 근육을 다친 건 아닌 거 같아.”

아론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나는 침착하려 애썼다.

“이, 이 정도는 치료 사제가 아니어도 고칠 수 있어.”

나는 피부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수포 없이 굳어져 있는 핏덩어리에 신성력을 뿜었다. 천천히 흰빛이 맺혀 있는 손으로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자 아론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른거리는 빛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수심이 깊었다.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짙은 빛이어서 나는 다시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아론이 먼저 시선을 돌렸고, 신성력 때문에 몸이 나른해졌는지 목을 뒤로 젖혀 누웠다.

“가 볼게.”

상처가 희미해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굳어진 그를 보며 나는 혹시 잠든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숨결이 뜨겁게 전달되었다. 혹시나 열이 오른 건가 싶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을 때 그의 눈이 떠졌다.

“제게 왜 이렇게 상냥해요?”

“뭐?”

“제게 훨씬 친절하잖아요.”

아론은 다른 이들보다, 라는 말을 덧붙여 중얼거렸다. 나는 얼른 답했다.

“그야 난 사제고…….”

내 손길을 느끼듯, 아찔하게 눈을 감은 사내를 보며 나는 놀란 것처럼 손을 떼었다.

“너, 넌 다른 이들보단 더 잘 아는 사이니까.”

“소꿉친구라서요?”

그렇지, 라는 의미로 나는 침묵했다. 긍정하는 내 눈을 보면서 아론은 우울한 듯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내 답답한 심정을 말하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감정을 털어놓았다.

“때때로 우리가 소꿉친구가 아니었다면 어떨까 생각해요. 물론 그래서 말레드레드를 알게 됐고, 그것으로 긴 시간을 견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그저 남자와 여자 사이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아론의 목소리는 애잔했다. 가슴이 쿵쿵 뛸 정도였다. 나는 동요를 들킬까 일부러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났다면 지금 관계도 다를까 싶어서…….”

더 멋진 모습이라니. 아론은 신이라도 되려는 걸까. 그는 이미 눈이 멀 만큼 멋졌고, 오히려 과거 모습과의 괴리감에서 오는 차이가 내 욕망과 쾌락을 부추길 정도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간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나는 일렁이는 마음을 내리누르듯 강하게 말했다.

“아론, 정말 가 볼게.”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런 나를 아론이 붙잡았다.

“……가지 마요.”

“아론.”

“여기 있어요.”

“소, 손을 놓아줘.”

나는 부탁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론은 그보다도 더한 간절함을 담아서 나를 끌어당겼다.

“제발 제 곁에.”

술이 이지를 흐렸다고 하고 싶지 않다. 술은 오히려 절제하던 감정을 없애 버리고 본심을 드러내게 했을 뿐이다. 나를 붙잡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를. 나는 내 안의 냉혹함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를 향해 쌓아 두었던 얼음의 벽이 무너지려고 함에, 얼른 사태를 수습했다.

“지금은 너무 술에 취해 있어. 나중에 이야기해.”

나는 그를 침대로 밀었다. 아론은 의외로 쉽게 침대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너무나 그윽해서 순간적으로 혹할 뻔했다.

“잠깐이라도 함께 있어 주세요. 혼자 있기 싫으니까.”

“아이도 아니고…….”

무슨 투정인 거야, 라고 난감하다는 듯이 말하려는 순간, 여관 밖에서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론나이드 경, 어디 있어요? 아론나이드 경?”

새초롬한 그 목소리는 님을 찾는 것처럼 애절했다. 아론은 나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다른 사람이라도…….”

내 본심과 다르게 말이 나가고 말았다. 레베카라도 불러 줄까. 차마 그 말은 못 하겠다. 나는 그녀가 몹시 싫었기 때문에. 그러나 아론은 내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말하면서.

“전 말레드레드만 있으면 돼요.”

그 한 문장. 별거 아닌 듯한 그 한 문장이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론은 가만히 웃었다. 미소는 안도한 듯 보였지만 지쳐 보이기도 했다.

“……너무 좋아요.”

내가 곁에 있어 기분 좋다는 얼굴로 중얼거린 그가 잠에 빠진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그가 자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가려고 했으나, 아론을 찾는 레베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조금 쉬다 가기로 마음을 편히 먹고 말았다.

아론의 옆에 누웠다. 다른 곳에 누울 수도 있었지만 나도 깨끗한 침대에서 쉬고 싶었던 차였다. 내가 옆에 눕자, 자고 있던 아론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사실 깨어 있었던 건가, 흠칫해서 쳐다보자 잠에 취한 금빛 눈이 보인다. 아론은 몽롱한 어조로 말했다.

“……쿠키, 또 줄 거죠?”

“……뭐?”

“제가 속상해하면 늘 쿠키를 주었잖아요. 울지 말라고.”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옛날 옛적 이야기를 꺼내는 아론에게 황당해지고 말았다. 정말 술에 취했구나. 술에 취하면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져 옛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아론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좋았어요. 얻어맞고 따돌림당해도 말레드레드의 쿠키를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아픔을 참아 내겠다고.”

“…….”

“근데…….”

아론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하나만은 절대 못 참겠더라고요. 바로 말레드레드가 저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은…….”

“너 때문에?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멈칫했다. 아론은 느릿하게 감기는 눈으로 천천히 말했다.

“저를 괴롭히는 애들에게 맞은 적이 있잖아요……. 절 찾는답시고 말레드레드까지 괴롭혀서…….”

아론은 분노가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화가 났어요. 녀석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근데 시간이 지나니 제 탓이란 생각이……. 제가 약하고 허술해서…… 말레드레드가 다쳤다는 생각밖에…….”

목소리는 한없이 바닥으로 꺼져 내려갔다. 분노와 죄책감에 오랜 시간 짓눌린 것처럼. 나는 그를 다독였다.

“네 탓이 아니야. 녀석들이 못됐던 거지.”

내 위로에도 아론의 눈빛은 어두웠다. 아론은 천천히 말했다.

“제가 강했다면 말레드레드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제가 조금 더 영리했다면.”

“……아론.”

그의 고개가 깊게 수그러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감쌌다. 술에 취해 지난날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그에게 훈계보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독이듯이 그의 뺨을 감싸자, 아론의 아름다운 눈이 다시 뜨였다.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뭐?”

“못된 녀석들에게 당하는 일이요.”

아론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건 모르는 거라고 멋쩍게 생각하고 말았다. 사실 미래의 일을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상한 사람들, 무례한 자들은 늘 있었다. 어찌 보면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무례한 만남으로부터 내 자신을 다독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론은 어쩜 이렇게 확정적으로 당할 일이 없다고 하는 걸까.

나는 그 자신감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날의 충격이 아론을 이렇게 혹독하게 강한 자로 만들어 왔던 거니까. 나는 그에게 자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말레드레드.”

아론은 나를 뜨겁게 쳐다보았다. 무수한 별빛을 담아 제 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운 눈길에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는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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