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3화 (113/220)

113.

“……뭐?”

“그리고 신성력을 다루는 능력도 월등히 좋지.”

나는 그대로 신성력을 길게 끈처럼 뽑아서 그의 몸을 휘감았다. 느닷없이 제 몸을 휘감는 신성력 때문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신성력을 흡수하려고 했지만, 이건 흡수할 수 있는 신성력이 아니었다. 창조주인 내가 밧줄처럼 쓰기 위해 만든 신성력. 따라서 그는 내 신성력을 흡수하지 못한 채로, 그저 꽁꽁 감긴 신성력 밧줄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심기 불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눈에는 이글이글 타는 분노가 가득했다. 창피함과 수치스러움도 느껴졌다. 나는 조곤조곤 다독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만. 여기서 최악이 뭐라고 생각해요?”

“뭐, 뭐?”

“전 지금 당신의 모습을 다른 사제들이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력도 없는 소환사에게 붙잡혀 있는 성기사라니. 남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요?”

“윽…….”

“생각해 봐요. 실력이 좌지우지하는 세계잖아요. 제게 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다들 놀라서 수군거릴 거예요. 어떤 비참한 소문이 돌아다닐지. 노만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큼 똑똑하잖아요.”

나는 싱긋 웃었다. 감정 없는 그 매끈한 미소에 노만은 놀란 것처럼 흠칫거렸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상냥한 가면을 유지한 채 조용히 경고를 이어 갔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한 번 더 생각하세요. 절 괴롭히기 전에.”

나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전 잠자코 당해 줄 생각 따윈 없으니까.”

나는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는 달려들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달려들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완력이나 기술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노만이 힘으로 나를 제압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걸, 소리라도 질러 그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란 걸 노만은 분명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앞뒤를 분간하는 머리 정도는 있는지, 입안의 살을 씹듯이 우물거렸다가 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어조로 말했다.

“제가 술에 취해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그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으면서 그의 눈에 빛나는 서늘한 빛줄기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나중에 뵙도록 하죠.”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경고인가. 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정중한 동작을 하는 척 몸을 뒤로 뺐지만 가기 전 내 쪽을 향해서 침을 뱉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마치 천한 것을 대하듯 내 앞으로 침을 뱉다니. 무척이나 나를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귀족이란 어떤 자인가.’

제가 받은 상처와 모욕만이 소중하고, 제가 가진 정의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일까? 그래서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문제없다고 느끼는 부류라면 나는 절대로 귀족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것들은 우아함과 고귀함, 모순적인 냉철함과 이지적인 농담 실력 같은 것이지 노만이 보여 준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곧 자조했다. 그럼에도 귀족이란 계급을 선망하는 스스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백작가의 딸이고 싶었다. 비안나처럼 메리옹 백작의 정식 딸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후.”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언가 과거 속의 불필요한 기억까지 끄집어낸 기분. 나는 인상을 한 번 쓰고 걸음을 떼었다. 숙소로 가려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아론.”

돌아보자 낯선 자가 아닌 그가 서 있다. 나는 안도하고 말았다. 노만 같은 자가 또 온 것이라면 상대하기 싫었으니까. 아론은 다짜고짜 물었다.

“왜 봐주었어요?”

“뭐?”

그의 목소리는 짙은 어둠 속에 파묻힌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노만이요. 더 혼내 줄 수도 있었잖아요.”

나는 멈칫했다.

“……보고 있었어?”

“우연히요. 말레드레드가 나가는 걸 보고 뒤따라왔거든요.”

용케 붙어 있는 레베카를 따돌렸구나.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침묵하자 아론이 가깝게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묽은 어둠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살기를 숨긴 채 먹잇감을 주시하고 있던 맹수처럼.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서린 기운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는 갔어.”

“알아요.”

아론은 그가 뱉은 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힘을 주어서 그것들을 흔적도 없이 뭉개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봤거든요. 때를 기다리면서.”

아론의 목소리는 아주 신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노만이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노만이 무기를 들거나 주먹을 쥐어 내게 무력 행사를 했다면 아론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몸에 흐르는 살기를 보건대 최소 어디 한 군데는 찌르거나 잘라 버렸겠지.

“난 신경 안 써.”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애써 침착하게 답하려 애썼다.

“그래서 적당히 반응한 거야.”

일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었다. 아까 노만이 못된 짓을 하려고 할 때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정식 조사가 시작될 것이다. 사람들은 내 편이냐 노만의 편이냐 나눠 싸우게 될 것이고…… 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이 귀찮았고 불편했다. 따라서 적당히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나는 아론에게 그 점을 강조했다.

“어차피 늘 저런 사람들은 있었으니까. 함께 싸울 건데 사이를 악화시키는 건 좋지 않잖아.”

“……하지만 저하고는 사이가 악화되어도 아무렇지 않잖아요?”

“너, 너는 달라.”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론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어떻게요?”

“어, 어떻게라니. 너, 넌, 그냥 동료가 아니고, 우리 사인 그런 문제 때문에 어긋난 게 아니잖아.”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요?”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짙다. 가까워진 몸에서는 뜨거워질 만큼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켠 채로 아론이 또박또박 묻는 목소리에 집중하고 말았다.

“동료가 아니라면, 어떤 사이죠? 전 매일 밤 말레드레드를 생각하며 잠들고, 말레드레드를 떠올리며 꿈에서 헤매요. 그러다 아침이 오면 제 곁에 없다는 실망감을 느끼며 다시 당신을 생각하죠. 이렇게 하루가 흘러가는 거예요.”

“아, 아론…….”

“말해 줘요. 이런 제가 당신과 어떤 사이인지.”

아론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흐느끼는 것처럼 젖어 있었다.

“동료인지, 친구인지. 부디 알려 주세요.”

“…….”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난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더욱 바짝 다가왔을 때, 그의 입에서 강한 알코올 향이 나는 걸 느꼈다. 아론이 잠깐 비틀거렸고 나는 그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 아론?”

“괜찮습니다.”

아론은 바로 대답했다. 훈련된 것처럼 딱딱하게 나온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게 진실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진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네 잔 정도.”

아론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멈칫해서 물었다.

“한 잔만 먹는 거 아니었어?”

“지휘관 지위가 좋더라고요. 잔이 비면 무조건 채워 주는 걸 보니.”

우스갯소리처럼 답한 아론은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오랜만에,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이 떨려 온다. 감춰 둔 감정을 뒤흔들면서 내 안의 깊은 일렁임을 만들어 냈다.

꾹꾹 눌러 놓고 억제하려 해도 그만 보면 끌려갈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기어이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론은 어느새 안도했다는 듯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진짜 제 앞에 있네요. 다행이에요. 며칠 동안 꿈에서만 봤거든요.”

“…….”

“말레드레드를 며칠 안 봐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아론은 씁쓸하게 웃듯이 말했다.

“오히려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무얼 하든 말레드레드만 떠올리는 제가 있었어요. 훈련을 하다가도, 전투를 하다가도 늘 말레드레드가 어디 있나 시선으로 쫓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론은 고해하듯이 말했다.

“오늘도 그래서 따라온 거예요. 말레드레드를 가까이서라도 보고 싶어서.”

“……아론.”

“어떻게든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서…….”

아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몸을 수그린 그는 연약해 보였다. 당장 안아 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나는 어느새 그의 어깨를 감싼 채로 그를 달래고 있었다.

“아론, 진정해. 지금 같이 있잖아. 괜찮다면 숙소로 내가 데려다줄게.”

“말레드레드, 너무 좋아요…….”

아론은 더욱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완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 내 몸에 기댄 형상이라서 나는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봐라. 상대는 갑옷을 차려입은 성인 남성이다. 체격도 나보다 월등히 컸고, 근육도 완전히 영근 단단한 몸의 사내. 나는 그를 끌고 숙소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주점 위의 여관을 힐끗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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