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2화 (112/220)

112.

같은 지휘관이라도 그는 다르다는 듯이 수긍하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멈칫했다. 아론나이드 경이라는 말이 나오자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 것이다. 특히 펠은 어둡게 나를 쏘아보았고 노만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시선이든 반갑지 않았다. 지휘관이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해야 하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시간이 나니까 함께 식사라도 할까? 더 친해지려면 말이야.”

지휘관의 말에 사제들은 모두 반색하며 반겼다. 며칠 동안 고된 훈련과 작전만 반복했던 터였다. 잠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나는 혼자서 빠지는 게 괜한 관심을 사는 일이란 걸 느껴 역시 가겠다고 했다.

“맛있는 요리를 잔뜩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레너드가 천진하게 소망을 말했다. 그 단순함과 소박함이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여관이 딸린 주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팀 전체가 이동하면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우리는 훈련소에서 30분 거리의 주점을 걸어가면서, 다른 팀과도 마주쳤고 카란과도 마주쳤다. 카란은 우리가 친목 모임을 간다고 하자 지팡이를 꾹 쥔 채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 시기에 묘한 시도군.’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듬뿍 담아 중얼거리면서.

그리고 그것은 막 본대에 도착해서 무장을 풀던 아론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론은 걸어가던 무리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었다. 그의 곁에는 방금까지 작전을 함께 수행했던 기사와 소환사들이 있었고, 가장 옆자리에는 예쁜 얼굴을 드러낸 레베카가 있었다.

“아론나이드 경, 이제 숙소로 가실 거죠?”

레베카는 환하게 물었으나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론이 나를 보고 굳어져 있던 탓이다. 레베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표정이 사나워졌다.

“친목이에요! 팀원들과 함께 식사하려고요!”

아론과 눈이 부딪치자 먼저 해맑게 설명하는 레너드였다. 아론은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아론나이드 경도 오실래요?”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레너드가 그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담당 지휘관이 무척이나 당황해서 끼어들었다.

“방금 작전에서 돌아와 쉬어야 할 분에게 그런 말을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아론이 가겠다고 하자 다들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레너드만이 활짝 웃으면서 ‘잘됐네요! 이왕 먹는 거 함께 먹으면 좋죠!’라고 발랄하게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레베카가 뒤처질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어, 함께 가면 좋죠.”

레너드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론의 휘하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다른 사제들도 입을 열었다.

“저도 가도 됩니까?”

“함께 먹고 싶어요.”

“친해지는 일이라면 저도 빠질 수가 없죠.”

“같이 가도 되죠?”

가고 싶다는 의견들이 쏟아지자 레너드가 그제야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지휘관의 눈치를 살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 몰랐는지 지휘관은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가 말했다.

“일단 팀원들끼리 친해지는 게 목적이니까 테이블은 다르게 잡아서 먹는 게 어떨까요?”

“어머, 좋은 생각이에요.”

레베카가 냉큼 대답했다. 아론도 다른 이견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무리는 잔뜩 늘어나서 주점으로 향하게 되었다. 30명에 가까운 인원이 도착하자 한산했던 주점은 금세 붐볐다. 테이블은 두 개로 분리되었고 우리는 팀원끼리 앉았다. 분위기는 두 테이블 다 어쩐지 좋지 못했지만, 지휘관은 애써 좋은 기분을 내려는 듯이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술은 한 잔만 허용되었다. 다음날 훈련과 작전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한 잔 가득히 술을 받는 것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사람들 사이에 어색함도 누그러졌을 때, 레너드가 술기운이 올라온 얼굴로 고백했다.

“최근 마물들 숫자가 너무 많았잖아요. 그래서 싸우다가 죽는 건 아닐까 두려웠어요. 진짜 일상적인 생활도 못하고, 누구와도 제대로 된 대화도 해 보지 않은 채로……. 허망하게 마물에 당해 죽는 건 아닐까 하고요.”

레너드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술잔을 쥔 채로 심정을 고백하는 얼굴에는 어느덧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나 있었다.

“무섭더라고요. 전 성기사가 되면 사제들과 친구가 많이 될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실상은 아니에요. 싸우고 훈련하는 데 급급해서, 나를 챙기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렇게 말한 레너드가 술잔을 들어 꿀꺽 시원하게 내용물을 삼켰다. 그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의 알싸함이 기분 좋다는 듯이 눈을 지긋이 감은 채로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하고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는 이 순간이 너무 좋네요. 마치 살아 있는 거 같아요!”

레너드의 말에 좌중이 침묵했다. 아론의 테이블도 조용해졌다. 지휘관이 조금 멋쩍은 듯이 맥주잔을 들었다.

“간만에 아주 솔직한 고백을 들어 보는군. 자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늘 웃고 있어서 말이지.”

그 말에 레너드가 실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처량했고 한편으론 어른스러웠다. 레너드는 천천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른 분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저만 너무 아이 같은 주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요.”

“말은 안 했어도 다들 비슷할 거야.”

지휘관이 말하자 다른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잔을 들어 동의했다.

“맞아. 나도 그래.”

“어떨 땐 너무 외로워서 베개를 끌어안으며 잠이 들곤 하지.”

“왜 싸우나, 고향엔 언제 돌아가나. 그런 생각에 허무해질 때도 있어.”

“늘 두고 온 것들, 가족이나 친구를 떠올리게 되지. 그들은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나는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는 건 아닌가 두려워져.”

다들 한마디씩 심정을 토해냈다. 누군가 말없이 술잔을 머금고 있는 펠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지?”

“전.”

펠이 시선이 내게 꽂혔다. 펠은 또박또박 말했다.

“신의 가호 아래, 사악한 것들을 쳐부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대단하군.”

지휘관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팀원들은 그가 재미없는 기사의 정석이라며 웃고 말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사악한 것이란 범주에 내가 들어 있었다. 나는 방금까지 먹은 음식이 얹히는 기분에 살짝 고개를 돌렸고, 그러다가 아론이 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를 보며 말하는 펠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전요.”

레베카가 아론을 힐끔 보고 새초롬한 입술을 떼었다.

“두려워도 든든한 동료가 언제든 절 구해 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저도 그 동료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고요.”

아론을 향한 잔잔한 눈빛. 그 눈빛에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담겨 있다. 바로 당신을 원한다는 욕망. 아론은 그걸 읽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아주 감동적인 말씀인데요?”

“공녀께서 그리 마음먹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군요.”

오히려 다른 기사들이 앞다투어 반응했다. 레베카의 인기가 확실히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적당히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노만이 입술을 열었다.

“확실히 도움 되는 동료란 중요하죠. 자신이 도움을 받는다면 그걸 고맙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고요.”

내게 들으란 듯이 말하는 그였다. 노만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떨어지는 동안, 레베카가 뜻밖에 그를 칭찬하며 나섰다.

“그러고 보니 질라트 가문은 의리를 무척 중요시한다죠? 싸울 때도 동료를 늘 먼저 생각한다고.”

“공녀께서 가문의 신념을 알아 주시니 무척 영광입니다.”

“뭘요, 수도의 모든 가문이 알 만큼 유명한 이야기인데. 아버지께서도 질라트 가문 하면 늘 좋은 얼굴로 칭찬하시곤 한답니다.”

“공작 각하께서요? 이것 참.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욱 감사합니다.”

노만은 그녀를 향해 굳이 몸을 비틀어 요란하게 인사했다. 그렇게 그들이 귀족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대화를 끼리끼리 나누고 있는 걸 발견했다. 조용히 빠져나가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휘관도 기사 하나와 대화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쉬운 일로 보였다.

나는 레너드에게 몸이 좋지 않아 가 보겠다고 작게 속삭였다. 흠칫 놀란 레너드는 곧 어디가 아프냐고 안쓰럽게 물어왔다. 나는 그냥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고, 레너드는 그에 맞춰서 눈짓으로 작별을 고했다.

조용히 주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어딜 가는 겁니까?”

나는 나를 불러세운 남자를 돌아보았다. 노만이었다. 레베카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 따라 나온 걸까. 나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숙소에 돌아가려고요.”

“왜요? 친목을 하러 온 건데 먼저 가면 안 되잖아요.”

노만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확실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 의도가 읽혔기 때문에 나는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나눌 친목은 다 나눈 거 같아서요. 몇 분 빼고는 다 모두 좋은 분들인 거 같으니까요.”

“몇 분? 설마 거기에 제가 들어가는 건 아니겠죠?”

노만이 다가왔다.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내 침묵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노만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릿한 눈동자가 곧바로 내게 꽂혔다.

“정말 너무하네. 모처럼 신분이 천한 소환사라고 해서 잘해 주려고 했더니만.”

“…….”

“네가 반반한 얼굴 말고 잘난 게 뭐가 있지? 지켜보니 신성력도 별 볼 일 없고 성격도 모나 있는데. 반신반의했어, 윗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야.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알겠군. 잘난 자존심밖에는 내세울 게 없다는 걸 말이야.”

노만이 다가왔다. 그는 금세 나를 힘으로 벽에 밀쳐 버렸다. 그의 손길, 체온, 존재감. 느껴지는 모든 게 끔찍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고, 노만은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비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말해 봐. 변명할 게 있다면 말이야.”

“……우선.”

나는 신성력을 빠르게 모았다. 성기사에게 성스러움 자체는 의미가 없지만 힘 자체는 의미가 있다. 나는 공처럼 만든 신성력을 그의 복부에 쏘았고, 내가 공격할 줄 몰랐는지 그는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떨어져 나갔다.

“난 너보다 성격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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