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11화 (111/220)

111.

“그쪽이라니. 펠. 제 이름은 노만이에요. 이 본대에 오기 전 함께 싸운 적이 있는데 기억나지 않습니까? 수도에서였죠. 전 그때 질라트 가문의 차남으로서 마물과의 싸움에 참전했고요.”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워낙 많은 기사들하고 협동했던 터라서요. 일일이 참전한 기사들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머리가 좋지 않은 탓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래요? 저희 질라트 가문이 그렇게 명성 낮은 가문은 아닌데, 조금 섭섭하군요. 전 용병 출신의 성기사라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저도 물론 머리가 좋은 건 아닙니다만.”

“으음.”

어딘가 빈정거리는 것 같은 말투에 펠이 불편하다는 신음을 냈다. 청년이 과장하는 것처럼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슬프군요. 펠. 이제라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아름다운 아가씨를 괴롭히는 건 그만두고요.”

펠은 말이 없었지만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참된 기사의 정신을 중시하는 그에겐 갑자기 난데없이 끼어들어 자신을 훼방 놓는 청년이 마음에 차지 않는 건 당연했다. 펠은 그를 두고서 뒤쪽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한결같았다.

“가 보겠습니다.”

네가 실수하는 것을 꼭 목격하고 말리라는 태도로 사라지는 그를 보면서 나는 눌러 두었던 울화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속상하고 불쾌하고, 그런 기분 나쁜 감정들에 잠식되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누가 나를 불렀다. 노만이라고 했던가. 그는 아직도 가지 않은 채로 은근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힘든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아요.”

설움을 삼킨 목소리로 대꾸했다.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하자 그가 앞을 막아섰다. 그는 내 행동에 조금 당황했다는 얼굴이었다.

“구해 줬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거예요?”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어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방금 펠의 기운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느꼈잖아요. 기사인 제가 느끼기도 막막했는데. 솔직히 인정해요. 뭐가 됐든 펠이 당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걸. 저 커다란 검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제가 구해 줬다는 걸 말이에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을까. 펠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 한들 갑자기 검을 휘두를 인간은 아니었다. 물론 마기를 뿜어낸다면 그러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내 신경을 긁는 수준이었고, 또한 눈앞의 청년이 훼방 놓았다고 해서 물러설 자도 아니었고 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이 일에 큰 성과를 올린 것처럼 쳐다보고 있는 사내가 무척이나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감정을 섞고 친분을 나눌 맘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충 ‘고마워요.’하고 툭 말하고 그와 멀어지려 했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도 내 앞을 막아섰다.

“인사라도 정식으로 하죠. 난 노만이라고 해요. 성기사고. 당신은 그 유명한 말레드레드죠?”

그 유명한 말레드레드. 아론과 다른 의미로서 이름이 알려졌다는 뜻이다. 왠지 모르게 비하하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차갑게 ‘네’ 하고 대꾸했다. 그가 얇은 입술을 올려 피식 하고 웃었다.

“진짜 무뚝뚝하네요. 고마운 남자에겐 좀 더 친절해야 하지 않나요? 제가 목숨을 구해 준 거잖아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나는 냉랭함을 버리고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내가 태도를 바꾸자 노만의 눈이 커졌다.

“진짜 제 목숨을 구해 준다면.”

나는 상냥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가짜라 해도 나는 이런 일을 퍽 잘하는 편이다. 타인에게 예의 바르고 우아한 여인이 되는 것. 사제로서 모범이 되는 이의 흉내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만 지금은 단순히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네 주제를 알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는 곱상한 어조 속에 가시를 박아 넣었다.

“그때 고마워할게요. 구하지도 않고 인사를 받으려는 사람한테는 못 하고요.”

“잠깐, 그게 무슨…….”

손을 뻗어 나를 저지하려는 그에게 나는 환하게 웃었다.

“한 번만 더 제 앞을 막아서면.”

내 눈이 예사롭지 않게 반짝이는 것을 노만은 놓치지 않았다.

“반드시 밀치겠어요.”

“……!”

내 말에 그는 크게 움찔했고 나는 그런 그를 지나쳐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쳐다보든 말든, 지금은 기분이 절벽으로 내밀리는 것만 같아서 여유롭게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진짜 순수한 호의로써 나를 도와준 것일 수도 있다. 침착함을 잃은 내가 제멋대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그에게는 뭔가 꺼려지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하면서 숙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숙소로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내 천막 주위에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검이 아닌 두꺼운 장갑을 낀 채로 손에서 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흰 빛을 흡수한 땅은 마치 번개의 한 조각을 이어받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 광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붙박힌 듯 보고 있자 신성력 뿌리기에 열중하던 기사들이 멈칫했다.

“숙소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기사 하나가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이 작업은 정화 작업의 일부라서 신체에는 전혀 해가 되지 않거든요.”

“……숙소 일대에 뿌리는 건가요?”

“네. 충분한 양으로 뿌리라고 전달 받았습니다. 사악한 기운이 일체 범접하지 못하도록요. 설사 마족이 쳐들어오더라도 이 기운에 놀라서 근처에는 오지도 못하고 돌아갈 겁니다.”

뿌듯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가벼운 양을 흘려 넣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기사가 직접 뿌려 넣는 신성력이란 얼마나 강하면서도 무거울 것인가. 나는 그들의 힘을 유심히 느껴 보고는 숙소의 입구로 들어서서, 문을 닫기 전 기사들의 손끝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 빛이 마왕의 소환을 막고 있는 원인이라고.

“……펠의 신성력만으로도 마왕이 힘들어했지.”

숙소로 들어와 무장을 풀고 씻은 나는,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텅 빈 하얀 침대와는 달리 머릿속에는 두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번잡스러웠다. 나는 두 남자 중 최근에 보지 못했던 존재를 떠올렸다.

마계의 지배자. 그는 지난번 펠이 숙소 주변에 신성력을 뿌려 두었던 것만으로도 괴로워했고 심지어 나를 마계의 엉뚱한 곳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물며, 지금과 같은 신성력의 방해에는 소환의 소 자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게 다행인 일인지 아니면 일을 더 키우게 되는 불행의 시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편지라도 써 볼까.’

마계로 보내는 편지. 그 서간에는 내가 당신에게 영혼을 바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적혀 있을 것이다. 종속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인간다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란 걸, 부드럽고 상냥한 단어와 문체로 나열한다. 그가 읽고서 흥분하거나 화내지 않도록, 약간의 우울함과 처량함도 문장 속에 내비쳐서 적어야 할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 어려운 상대라면 이 간접적인 방법은 늘 어느 정도는 설득력 있게 먹혔다. 문제는 편지를 받는 상대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점에서, 수틀리면 언제든지 인간계로 쳐들어와서 포악을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평소의 편지 수신자와는 다르다. 그가 편지로 답장을 주리란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기와 파괴욕으로써 몸소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일까.

‘……거절은 해야 하는데.’

나는 편지로 의사를 전달하겠다는 망상은 접었다. 이걸 누가 전달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어쩌면 이대로, 신성력을 몸 주변에 뿌리며 소환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긴긴 세월을 살아가는 마왕에게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스치는 바람처럼 한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조금 고생스럽지만 소환을 방해하며 인간계에 머문다면 그는 나를 괘씸해 하다가 어느 순간 잊을 것이고, 다시 생각날 즈음엔 나는 생을 다하여 죽고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적으로 짧은 내 생애를 무기 삼아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분노하고 화를 내더라도 나는 이미 인간계에 없을 테니, 무슨 문제가 생길까.

‘화가 나서 내 후대의 인간계를 때려 부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 역시 그럴 정도까지 힘을 쏟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저물고 있는 태양과 같은 마왕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의 입장에선 죽음을 앞당기지 않으려면 몸조심을 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겠지.

나는 곰곰이 대안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역시 마계로 소환되지 않은 채 내 침대에서 눈을 떴다.

훈련소는 아침부터 북적였다. 새롭게 팀이 구성된 탓인지 다들 어색하게 얼굴을 맞댄 채로 앞으로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쭈뼛거리고 있었다. 대체로 경력자들이 앞서서 신참들을 이끌었고, 감독관들은 소환사와 성기사의 협공에 대해서 교과서적인 전술을 늘어놓았다. 이론과 실전이 부딪치는 가운데, 우리 팀의 지휘관은 팀원이 서로 잘 알아 가는 게 작전을 수행하는데 가장 좋을 거란 의견이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친해져 보게. 상대의 작은 버릇 하나, 사소한 취미까지 알고 나면 위기에서 그를 외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니까.”

지휘관의 의견은 새로웠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사람들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상대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게 되어서, 나중에는 부탁에도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한다.

‘……아론.’

나는 자신을 다시 생각해 달라던 금발 청년을 떠올렸다. 그런 그를 떨치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휙 젓자 레너드가 흠칫해서 벌이 붙었냐고 손을 뻗어 왔다. 그가 보이지 않는 벌을 쫓으려 팔을 퍼덕거리는 것을 허망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 지휘관이 새롭게 전달받은 상황을 말했다.

“오늘 투입되기로 했던 작전은 취소됐군. 우리 팀을 포함해 몇 팀이 지원 나가는 임무인데, 원래 팀만으로도 충분했다나 봐.”

지휘관은 그게 누가 지휘하던 팀인지를 굳이 덧붙였다.

“아론나이드 경이 지휘했다면 지원이 필요하지 않았겠지. 그 자신이 나이트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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