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당황했다. 우연히 엿들었고, 들킬까 중간에 빠져나갈 수 없었다고 할까? 내가 동요하고 있을 때 아론이 천천히 말해 왔다.
“왜 그럴까 했는데. 눈을 보니 알겠어요. 말레드레드 역시 저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는 것을.”
“그, 그만해. 난 그런 게 아니라, 나갈 기회를 놓쳐서 듣고 있었던 것뿐이야.”
“정말로 저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래.”
나는 애써 눈을 또렷하게 뜨며 말했다. 아론은 그런 내 눈을 고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선명하고 반듯한 금빛 눈을 마주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고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론이 천천히 말했다.
“아까. 대장님이 말씀하실 때 눈이 마주쳐서 좋았어요.”
“…….”
“이런 사소한 거에도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면 우스울까요.”
나는 순간 그를 쳐다보고 말았다. 나도 그랬었다. 그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언제라도 불타오를 준비가 된 사내에게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그가 불타오르면 오를수록 꺼트리기 힘든 불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말했다.
“나 이제 가도 될까? 작전에 투입되기 전에 훈련을 하고 싶어.”
“근데 왜 훈련소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왔어요?”
“그건…….”
펠을 피하려고 했다. 나는 대답을 입 안으로 삼켰다.
“네게 말할 의무는 없잖아?”
“……말레드레드.”
아론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살짝 고개를 수그리며 내게 눈을 맞춰 온 사내에게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수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 깊이의 무게를 느끼며 절망했고, 그것이 나라는 원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참담해졌다. 아론은 인상을 찡그린 나를 샅샅이 살피며 아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 요즘 숨기는 게 많아진 거 같지 않아요?”
“……내가 뭘. 그런 거 없어.”
나는 급하게 답했다가 아론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에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덧붙였다.
“설사 있더라도 그건 내가 필요해서겠지. 내가 거짓말을 하든 무엇을 숨기든, 아론이 뭐라고 할 바는 아니잖아? 이건 내 삶이고 내 선택이니까.”
나는 그대로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론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맞아요, 말레드레드의 삶이고 선택이죠.”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저는 쫓아갈 수밖에 없다고.”
아론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말레드레드가 어떤 길을 가든지 간에.”
“……갈게.”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태연하게 대화를 더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벽에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없이 크고 높은 벽에.
따라서 나는 도망치듯이 훈련소로 향해야 했다. 아론을 뒤로 한 채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훈련소 뒷문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자네 괜찮나?”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감독관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들이 잠깐이지만 내게 쏠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호기심과 질투, 의아함과 궁금증이 덕지덕지 묻은 눈빛들이다. 내가 모른 척하며 훈련 준비를 끝내자 시선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감독관이 말했다.
“오후 작전에 투입되지? 너무 무리하게 말게.”
기운을 아끼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아론을 잊으려면 몸이 부서질 것처럼 훈련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몇 번이나 감독관에게 신성력 소모가 지나치다는 꾸중에 가까운 충고를 듣고 말았다.
오후 작전에 향하기 앞서, 나는 사람들이 훈련소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팀 명단이 게시되어 있었다. 내 기대와는 달리, 나는 펠과 같은 팀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내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레너드가 신나서 외쳤다.
“말레드레드, 우리 같은 팀이에요!”
기뻐하는 그에게 나는 진심으로 웃어 주지 못했다. 펠과 같은 팀이라는 실망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아론은 내가 속한 팀의 지휘를 맡지 않는다는 것뿐이랄까. 나는 멍해져서 명단을 살피다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했다.
“레베카 공녀가 아론나이드 경의 부관으로 되어 있네요?”
레너드는 의외란 듯이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태도에서 레베카가 그럴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는 의구심이 읽혔다. 레너드는 왠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워낙 아론나이드 경을 따르기 때문일까요?”
“글쎄요.”
관심 없다. 나는 애써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거슬림을 내리누르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팀 명단을 보러 온 펠과 눈이 마주쳤고, 하필 그때 레베카의 무리도 나타나 내 마음은 더더욱 처참해지고 말았다.
펠은 소리 없이 나를 주시했다. 인사도 하지 않았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침묵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어떤 일인지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돌렸고, 다른 작전에 투입되는 레베카를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아주 교양 있고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싸우러 가죠? 마물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고 들었어요. 정화 작업에 익숙해지셨을 텐데 갑자기 험한 싸움이라니요. 제가 다 걱정이 되네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그 말이 왜 주제도 모르고 싸우려 드느냐는 말로 들릴까. 나는 상냥한 웃음 뒤에 숨겨진 감정을 간파했다. 상대를 몹시도 미워하는 차갑고 드센 감정. 나는 짧게 미소 지었다.
“그리 걱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무사하다면 공녀 덕분일 겁니다.”
“제가요? 전 별로 한 게 없는데요.”
나는 몰랐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어머, 그랬나요? 전 또 저를 위해 그 아름다운 검을 휘둘러 주신다는 건 줄 알고요. 생각해보니 저를 지키는 건 다름 아닌 저 스스로니까요.”
“……읏.”
“어찌 됐든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
나는 묘하게 표정이 굳어진 레베카를 앞에 두고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레너드가 넋이 나갈 정도로 진한 미소였다. 우리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멍해질 정도의 화사함이었지만 공녀는 역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말을 비꼬고 있단 것을 눈치챘는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띌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더 싸울 수도 있었지만 작전을 앞두고 괜한 체력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정말 몸조심하세요, 당신.”
레베카의 눈에는 어두운 빛이 반짝였다. 왠지 불길한 그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나는 훈련소를 나와 작전 장소로 향했다. 몸조심은 내가 가장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좋아, 마지막 마물이야!”
소탕 작전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오랜만이었지만 한번 몸에 익은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소환사들과 소환의 영역을 훌륭하게 그렸고, 마물을 그곳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마물의 수는 많았지만 마기는 약했던 탓에 한결 수더분하게 소탕이 진행된 것도 있었다.
남은 마물 한 마리까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휘관은 기쁘다는 듯이 검을 번쩍 들어올렸고, 기사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나는 레너드의 만세,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쁘게 웃었다가 나를 쳐다보는 펠을 발견하고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코앞에서 올라오는 타 버린 마물의 냄새가 고약하게 주위를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처리할 게 얼마 없는 대지는 보기가 참 좋았다. 지휘관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문을 열어 시체를 보내 버리는 게 확실히 깔끔하긴 하군. 대지가 절로 정화되는 기분이야.”
그는 소환사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 명씩 눈을 맞춰 가면서 고생했다고 말하자 소환사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근래엔 정화 작업에만 투입되었던 터라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지휘관은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소환이란 참으로 강력한 힘이군.”
든든하다는 눈빛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소환사로서 인정받는 기분이랄까. 나만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닌지 소환사들은 모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직업에서 오는 기분 좋은 소명감에 행복해하고 있을 때, 지휘관이 말했다.
“그럼 얼른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지휘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기와 갑옷을 정화하는 손이 빨라졌다. 나는 손에서 흰 빛을 뿜었다. 낮에 훈련에서 무리하고 작전에서 애썼기 때문인지 빛줄기는 흐릿하게 뿜어져 나왔다. 느릿하게 갑옷에 묻은 마물의 조각을 정화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묵직한 발걸음을 가지고 있었고 회의적인 눈빛을 띠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빛이 어두워 보이는데.”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왜 와서 괜한 시비냐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펠은 무뚝뚝한 얼굴로 잠깐 내가 쥔 갑옷을 훑었다.
“빛이 나오는군요. 힘이 없지만 강력한 흰빛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저 당신이 특이한 사제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성력이 늘지는 않지만 변형을 무척이나 잘하는 사제란 사실이요.”
“제 뒷조사를 하고 있나 보네요, 변형을 잘한다는 말을 하는 거 보니.”
나는 역시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특이하다면 당신만 하겠어요? 동료를 의심하고 괴롭히는 성기사인데.”
“전 동료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오직, 신을 모독하는 자를 의심하고 배척할 뿐.”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무겁고 차가웠다. 음산한 눈빛으로 내 본질을 꿰뚫으려 했다. 그의 살기에 내가 흠칫하여 주먹을 설핏 쥐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분위기가 안 좋은데.”
처음 보는 남자. 같은 팀이었던 성기사였다. 이름도 모르는 그는, 나와 펠을 유심히 보더니 내 앞에 섰다.
“혹시 그녀를 괴롭힌 겁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펠은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같은 사제를 괴롭힐 이유가 없겠죠.”
“그러면……?”
“그저 같이 일했던 사이라 안부를 물었을 뿐입니다. 그쪽이 상관할 바가 전혀 아닌 일이죠.”
그러니 넌 뒤로 빠지라고 펠은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앞의 청년은 그런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