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9화 (109/220)

109.

“레베카.”

아론의 목소리는 낮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레베카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런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론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서운하다는 듯이 레베카가 말했다.

“절 보지도 않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제야 아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론의 표정은 쌀쌀했고, 온기란 게 없을 것처럼 차가웠다. 레베카는 그런 아론을 보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경의 기도를 방해해서 화가 나신 거예요?”

“어쩐 일이신지 물었습니다.”

“……정말 너무하세요, 경. 제가 어떤 마음이신지 알면서도, 이리 냉랭하게 하신다니요.”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몰래 듣던 내가 놀랐을 뿐이다. 레베카가 이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가? 쿵쿵 놀란 심장 소리가 그들에게 들릴 것만 같다. 나는 더욱 나무에 붙으려고 노력했다. 레베카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로 애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요, 경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잊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안 되더라고요. 훈련할 때도, 전투를 할 때도, 꿈을 꿀 때도 경만 생각나요.”

“…….”

“경만 제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게 되어요.”

레베카는 한 발짝 그에게 다가갔다. 아론은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레베카는 그런 그의 차가움도 좋다는 듯이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만 가깝게 있어도 너무 좋은걸요. 그러니까…….”

레베카는 한껏 애절함을 품은 목소리로 애교 있게 말했다.

“제가 곁에 있는 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당장은 제 마음을 받아 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지금은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테니까…….”

누가 들어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처연한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나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을 때 아론이 그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레베카는 아론에게 더욱 바짝 다가간 상태였다. 마치 그의 갑옷을 잡을 것처럼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그녀를 아론은 곤란하다는 듯이 보며 말했다.

“레베카.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습니다.”

“그녀요? 알아요. 공개적으로 고백하셨잖아요.”

레베카는 분하다는 듯이, 그리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 들으라고요.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일부러 그러셨다는 거 알고 있어요.”

“…….”

“우연이 아니잖아요. 마침 저희 아버지가 계실 때 그런 고백을 한 거요. 분명 사교계에도 말이 번지도록 말을 한 거예요. 그래서 경을 맘에 들어하는 가문들이 경에게 혼약의 의사를 전하는 일이 없도록요. 평민 소환사를 좋아하는 귀족 성기사라니. 어느 가문이 그런 사람을 선뜻 사위 삼으려고 하겠어요? 저희 아버지부터도 벌써 경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데.”

나는 레베카의 말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레베카는 이성적으로 꽤 냉철한 분석을 쏟아내고 있었다. 단순히 사랑에 빠진 귀족 여식만은 아니란 듯이 그녀는 아론에게 말했다.

“경께서 지위나 명예에 큰 욕심이 없다는 걸 알아요. 전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버지와는 달리 저는 사랑하냐 아니냐가 상대를 보는 첫 번째 기준이거든요.”

레베카는 어느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있는 아론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우아하게 겹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저를 내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사랑에 빠져 울고 마는 여자가 아니에요. 경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고민하는 여자라고요. 지금은 경의 마음에 닿을 순 없지만.”

레베카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아론을 향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예상이 간다. 아마도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언젠가 닿을 거라고 확신해요. 경께는 저 같은 여자가 필요하니까요.”

레베카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배경도 외모도 빠지지 않으면서 경의 머릿속까지 꿰뚫어 보는 여자. 저는 경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야망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말은 나를 감탄하게 할 정도였다. 아론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졌을 때, 마침내 굳어 있던 입술이 열렸다.

“……손을 놔 주겠습니까?”

레베카는 움찔했지만 고분고분 손을 떼었다. 아론은 장갑을 쓱 쓸어내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각오는 잘 알겠습니다. 고백도 잘 들었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알려 드렸으니 더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곁에 있어도 피하지 않으실 거죠?”

희망에 차서 말하는 그녀에게 아론은 건조하게 답했다.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어찌 함부로 막겠습니까.”

“딱딱한 말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좋네요. 저 결코 경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발랄해져서 다시 비장하게 각오를 말하는 레베카였다. 아론은 그런 그녀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곧 있을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제 작전 일정도 아시는 거예요?”

기쁘다는 듯이 묻는 그녀에게 아론이 당연하지 않냐며 대답했다.

“수하가 작전을 앞두고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지휘관으로서 마땅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대는 지금 불성실해요. 매우 불필요한 옷도 입고 있고요.”

“아, 이건, 경께 잘 보이려고…….”

“이곳은 전장입니다. 마물의 격전지입니다. 외양이나 치장에 신경 쓸 곳이 아니에요. 기사라면 그에 걸맞는 무장을 갖추세요. 한순간의 방심이 본대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네가 지금 예쁜 옷을 입고 있을 때냐, 충고하는 말이었다. 레베카는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당황해서 몸을 돌렸다.

“어, 얼른 갈아입고 다시 올게요.”

레베카가 돌아서자 아론이 그녀를 불렀다.

“레베카?”

“네?”

“여기로 오지 마세요. 그대가 돌아올 곳은 이곳이 아니라 작전 장소입니다.”

아론의 냉엄한 충고에 레베카는 살짝 울상을 지었다. 아론이 너무하다고 생각한 걸까. 한순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는 아론의 성품을 아는 탓인지 곧 알겠다면서 감정을 삼킨 채로 산으로 내려갔다.

‘왜 안 가지?’

나는 아론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멀지 않은 나무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움직인다면 들킬 확률이 있었다. 그가 얼른 떠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아론이 곧 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론이 내 근처를 지나쳐 가자 나무 그늘에 더 몸을 움츠리려고 했다. 아론이 나를 못 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섣부른 것이었다.

휙.

아론이 나를 잡아당기자 방심했던 나는 그대로 나무 기둥 뒤에서 끌려 나와 쓰러지고 말았다. 물론 쓰러지기 전에 아론이 내 허리를 한 손으로 잡아챘다.

탁.

“읏.”

나는 딱딱한 철갑옷에 턱을 부딪치자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금세 아론이 장갑을 벗고 손을 뻗어 왔다.

“빨개졌네요.”

“…….”

그의 손에서 신성력이 빛났다. 이런 일에 성스러운 힘을 뿜다니. 신성력의 낭비란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를 조금 노려보았다. 아론은 내가 노려보는 것을 보면서 살짝 쓰린 눈빛을 지었다.

그의 표정은 아까 레베카를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훨씬 표정이 잘 드러났고 감정이 묻어 나왔다. 나를 향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파도가 얼마나 격렬한지 보여 주듯 눈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작게 말했다.

“놓아줘.”

“왜요.”

“…….”

“당신은 몰래 듣고 있었는데 저는 안는 것조차 안 됩니까?”

얘가 왜 이렇게 비뚤어졌을까. 잘못 키운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어쩔 줄 모르고 있자 아론이 입술을 다물었다. 감정이 격해진 듯 인상을 찌푸린 그는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건방지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

“말레드레드가 절 내쳤다는 생각만 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심성이 어그러져서요.”

아론은 그렇게 말한 뒤 내 허리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전히 다 자란 성인 남성이었다. 무장을 한 채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나를 끌어안자 나는 덫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아론은 그렇게 나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로 내 어깨에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요. 무척이나.”

“……아론, 놓아줘.”

제발, 이란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숨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괴로워하는 기색을 내자 아론이 나를 쳐다보았고 내 얼굴을 살폈다. 그는 곧바로 팔을 벌렸다. 내가 살았다는 듯이 호흡을 고르자 아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말레드레드를 안자 너무 좋아서.”

두 번만 좋으면 포옹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 나는 우스갯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를 곤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와 헤어지겠다는 의사는 유효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보면 피어나는 감정들이 칼로 잘라내듯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지 못했고,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들은 더욱 혼란스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는 걸 억지로 누르면서 그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이런 거 안 돼. 우린 이제 아무 사이…….”

“근데 왜 숨어서 듣고 있었어요?”

“그건…….”

나는 멈칫했다. 아론은 재빨리 말했다.

“저 말레드레드가 왔다는 거 알았어요. 기척이 가까웠고 익숙했으니까. 말레드레드란 건 금세 알아차렸죠. 솔직히 저를 보자마자 말레드레드가 화가 나서 돌아나갈 줄 알았어요. 하지만 레베카가 떠날 때까지도 당신은 움직이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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