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다음날, 아론의 경고에도 우리의 일은 단연 대화의 주된 화제였다. 일어나 숙소를 나왔을 때부터 나를 힐끔거리는 수많은 눈들이 느껴졌다. 아론의 경고 때문에 노골적으로 질문해 오는 사람들은 없었으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잘 잤냐고,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것으로 자세한 경황을 알고 싶어 했다.
생각해 보면 아론나이드는 사제들의 우상이었으나, 워낙 견실하고 담백한 생활로 사적인 부분이 일체 알려지지 않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마음 한편에 여자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놀라운지, 사람들은 아론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그것을 상대인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관계나 과거를 조금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함구했고, 그 때문인지 더욱 호기심이 증폭된 상태였다. 카란조차 어제 일의 경과를 물으러 갔을 때, 놀랐다는 듯이 그 이야기부터 해 왔다.
“그 아론나이드가 자네에게 반했을 줄이야. 정말 의의군.”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 없자 카란이 얼른 사과했다.
“자네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자네가 굉장히 매력적이란 건 늘 자네를 선두에 서게 하는 내가 잘 아니까.”
카란은 객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매력 있는 여성임에도 상대가 워낙 출중한 사람이라서 그런 말이 나왔네.”
“괜찮습니다. 상처 받지 않았어요.”
아론이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입장이란 건 알고 있었다. 내 말에 카란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표정이 좋지 못하군. 남들이 모두 원하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쩐지 구차했다. 더군다나 나는 원래 그를 좋아하던 사제인 척하지 않았던가. 내가 아론을 좋아했다고 알고 있는 카란에게는 지금 내 우울한 반응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나는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제 생각과는 다른 분이라서요.”
“그런가?”
카란이 반응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던 대장과 달리 뜻밖에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실은 그가 완벽하다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조금 그랬어. 물론 그가 뛰어난 성기사임에는 이견이 없네. 하지만 그늘이 없을 순 없겠지. 젊은 나이에 그런 실력과 성품을 가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거야.”
카란은 경험에 의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환경과 상황이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전장에서 보아 왔다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가 싸움은 몰라도 실제로 남녀 관계에선 어떻게 행동할지 유심히 지켜봐야겠지. 친절해 보여도 의외로 난봉꾼일 수도 있으니까.”
“난봉꾼이요?”
정말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자 카란은 그제야 맘이 놓였는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표정이 풀어졌군. 근래 얼굴이 너무 안 좋았는데.”
“……신경 쓰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제 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자네가 무척 잘해 주어서 공작 각하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지. 이변이 없다면 폐하께 말씀을 드려 보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상부에 우리 소환사의 처우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아.”
카란은 드물게 입을 올려 웃었다.
“고맙네. 몸도 안 좋았는데 말이야.”
“별말씀을요.”
나는 이렇게 답변했지만, 솔직히 칭찬이 나쁘진 않았다.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을 때 카란이 말해 왔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은 현재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해. 현재에 쏟는 열정으로 무언가를 이뤄 가니까. 하지만 나 정도 나이를 먹으면 현재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잦아져. 이른바 걱정이 많아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소환사의 처우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보여 주는 지표니까.”
카란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전장에서 남은 상처가 아직 깊게 남아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신념이 살아 있었다.
“나는 우리 소환사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리라고 보네. 성기사가 마물을 파괴하는 것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나는 그를 바라봤다. 비장한 어조였다.
“우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야.”
왠지 그가 던지는 말이 가볍지 않았다. 마음속이 숙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그의 천막을 나왔다.
오후에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다행히 지휘관은 아론이 아니었다. 대장의 안배인지 그다음 날도 작전의 지휘관은 다른 사람이었다. 여태 아론과 겹쳤던 작전이 많았던 것과 달리 며칠 동안 나는 아론의 이름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아론은 늘 나와 다른 시간대, 다른 작전에 투입되었고, 나는 따라서 그를 마주칠 일도, 어색하게 인사할 일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대로 정말 헤어지게 될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없는 숙소는 왠지 더 넓고 차갑게 느껴졌지만, 곧 익숙해지리란 생각에 나는 천을 끌어당겨 잠에 빠졌다.
“말레드레드! 일찍 일어났네요?”
나는 새벽에 훈련소로 향하다 해맑은 얼굴로 인사해 오는 레너드를 마주쳤다. 반갑다고 인사하자 레너드가 씩 웃었다.
“왜요?”
“아뇨, 잠을 무척 잘 잔 얼굴이어서요. 저번 주는 안색이 영 안 좋았잖아요.”
“그래요? 확실히 푹 자긴 했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아론과 헤어지고 나서, 신기하게도 마왕이 나를 소환하는 일도 없었다. 우연일까? 나는 눈을 뜨면 내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몸에는 숙면이 준 활기가 넘쳐흘렀다. 마왕이 이대로 날 포기했을까? 어쩌면 나란 존재가 더는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다행이네요. 저도 며칠간 푹 잤어요. 신성력이 우리 숙소 주변에 뿌려져서 그런가 봐요.”
“신성력이 숙소 주변에 뿌려진다니요?”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레너드가 몰랐냐며 말했다.
“요새 마물과의 싸움이 잦았잖아요. 본대 근처에서도 전투가 일어나고. 그래서 본대의 사제들이 병드는 일이 없도록 정기적으로 숙소 근처에 신성력을 뿌리는 거로 알아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듣기론 지휘관 중 하나가 제안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내가 마왕에게 불려가지 않는 건 그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잠깐의 행운이지만 그것마저도 기뻤다. 마왕의 제안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벌게 된 셈이었으니까.
나는 신성력이 땅에 뿌려진 정도로 이렇게 잠을 잘 자는 거라면, 신성력으로 마사지를 받으면 얼마나 몸이 좋아질까 궁금해하는 레너드에게 물었다.
“오전에 소거 작전에 투입되죠?”
“네. 말레드레드는 오후죠?”
“네. 정화 작업이요.”
“정화 작업이라.”
레너드가 입이 간질거린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궁금해하자 그는 상관이 말하는 걸 몰래 들었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듣기론 이제 그 작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원래대로 돌아간대요.”
“원래요? 그럼 예전처럼 소탕하는 방식이요?”
“네! 다시 팀 체제로 돌아가 마물의 시체를 소환의 영역으로 보낸다고 해요. 정화 작업으로 청소하는 게 아니라요.”
“아.”
나는 카란의 노력이 정말 통한 것인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확실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점심을 먹고 나서 본대의 대장이 설명을 했을 때였다. 그의 옆에는 중앙의 기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이 쭉 서 있었다. 나는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아론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정작 심장은 아플 정도로 뛴다. 그가 무척 보고 싶었다는 듯이.
‘……아니야.’
나는 부정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일부러 눈을 아래로 깔며 아론 쪽은 보지도 않으려고 애쓰던 중,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팀 체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팀의 규모가 커집니다. 쳐들어오는 마물의 수가 많은 만큼, 성기사 열 명에 소환사 네 명이 한 팀으로 적을 처단하게 됩니다.”
소탕 작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환사는 환호했지만 정화 작업이라는 안락한 임무에 길들여진 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장은 작전의 세부적인 상황은 지휘관에게 듣게 될 거라고 했다.
“팀 배치 명단은 오후에 나올 겁니다. 훈련소 앞에 게재할 테니 확인하여 성스러운 임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세요.”
사제들은 흩어졌다. 그들은 삼삼오오 멀어지면서 누구와 팀이 될지 점찍고 있었다. 나는 아론과 같은 팀은 되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에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내 일만 잘하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소환의 영역을 그리는 연습을 하러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훈련소로 향하는 쪽에서 펠이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펠하고 같은 팀이 안 되면 좋겠다. 그 생각을 간절하게 하면서 나는 발길을 돌렸다.
뒷문을 통해 훈련소로 들어가자면 산길로 우회해서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성전을 돌아서 나가는 방향을 선택했다. 멀리서 성전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미 누군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갑옷을 차려입은 성기사. 바로 아론이었다.
내가 서둘러 몸을 나무 뒤로 숨겼을 때,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가벼웠다. 그녀는 아론과 달리 하늘하늘한 평복을 입은 상태였다. 마치 귀족의 여식처럼 우아하고 처연한 자태로 나타난 그녀는 말없이 성전 앞에 서 있는 아론을 상냥한 눈길로 훑고 있었다.
“아론나이드 경.”
곧 애절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