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리고 그 순간. 아론의 입술이 다가왔다. 무시할 수 없는 뜨거운 입김을 간직한 채.
“……!”
사람들이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당사자인 나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운데 하물며 우리 관계를 몰랐던 이들이야 얼마나 경악스러울까. 나는 아론이 입술을 뗐을 때에도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론은 잠깐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수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금색 눈동자에는 진한 빛이 흘러넘쳤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이.”
감정이란 게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고 어두워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고 나는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는 그를 잊었다. 그를 찾아 헤맨 순간도 있었지만 기어이 현실을 깨닫고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아론이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무정하게 감정을 끊어낸 나와 달리, 아론은 감정을 한 폭 한 폭 겹쳐가며 마음을 쌓아 왔던 것일까? 그가 말없이 사라졌을 땐 나를 잊고 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나는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깊은 바다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할 말을 잃는 것처럼 그의 마음속 깊이에 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이다. 레베카의 말이 맞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싣는 아론은 누구보다도 언어의 밀도가 높은 자였다. 그래서 듣는 이를 뒤흔들고 마는 사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론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대장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있었다.
“아론나이드 경.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난처해 보이는 그의 말에 아론은 잠깐 나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분께 무례하게 행동했습니다.”
“조, 좋아하는 분?”
대장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주변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나는 가슴이 심하게 뛰었으나 이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론은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고 파렴치한 행동에 대해서는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허허, 이것 참.”
대장은 난감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아론은 고개를 번쩍 들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든지 이 일에 대해 말할 거라면 제게 직접 말하세요!”
아론은 나를 잠깐 응시했다. 깊게 일렁이는 열정적인 눈이었다. 그리고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가 됐든 이 일로 그녀를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절대 용서치 않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외치고 나자 평원의 분위기는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나와 아론을 번갈아 힐끔거렸고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듯이 입가를 씰룩였다. 대장은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수습하려 했다.
“일단 자세한 건 본대로 돌아가서 말하도록 하지. 말레드레드, 자네도 따라오게.”
대장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아론과 같이 대장의 뒤를 따라가면서 경악한 얼굴의 사제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 놀라운 이야기에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정말이냐고,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혹은 그를 받아들일 거냐고. 질문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기분이었으나 아론의 경고에 실제 입을 연 자들은 없었다.
‘나를 배려해서인가.’
나는 씁쓰름하게 웃었다. 아론은 정말 제멋대로였다. 사람들에게 선언하듯이 입맞춤을 하더니, 이번엔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들을 협박하다니.
나는 말없이 그를 뒤따라가면서 레베카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 아론을 향해 슬프고 속상한 눈빛을 보냈던 것과는 달리, 나를 보며 질투하고 분노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대로 얌전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고 두 주먹을 쥐어 의사 표현을 하는 그녀는 제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만은 부러웠다. 나는 아론에 대한 내 마음을 쉽게 정의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온정과 현재의 상태가 뒤섞여서 이제 그라는 존재를 단순한 ‘친분 있는 관계’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탓이었다.
아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순히 어렸을 적 친구입니다, 라는 말로는 설명이 아쉬웠다. 이제 그하고는 몸과 마음이 엉망으로 뒤섞여 버렸다. 이미 몸은 그에게 매우 익숙해졌고 그의 마음은 내 마음을 덮으며 제 색으로 물들여 가려고 했다. 그를 떠올리면 나 역시 가슴이 아려 오듯, 이제 아론이란 존재가 특별해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검은 머리칼의 마왕을 떠올렸다.
‘어서 관계를 끊어야 해.’
마왕을 떠올리면 이 생각은 분명해진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사방이 꽉 막힌 본대의 천막으로 돌아오자마자 대장은 한숨 쉬듯 말을 반복했다.
“경답지 않군요. 정말 경답지 않아.”
대장의 눈길은 아론에게 닿아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선 존댓말을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말이 편하게 나오는 듯 대장은 아론에게 편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런 건가? 무슨 다른 의도라도 있었던 건가?”
“아닙니다. 그저 충동이 앞서 그릇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짤막하게 자신의 실수임을 고백하는 아론에게 대장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떻지? 어떻게 하고 싶나.”
“……당분간 아론나이드 경의 밑에서 싸우는 건 제해 주십시오.”
내가 말하자 아론이 멈칫해서 나를 보았다.
“최대한 얼굴을 보지 않게요.”
그가 그러지 말라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표정을 유지했다. 대장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부에 이 일을 보고하고 싶나?”
“아뇨. 그런 맘은 없습니다.”
“어째서?”
나는 멈칫했다가 답했다. 입맞춤이 불쾌하진 않았다. 대중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한 것이 기분 나빴을 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마음이 있었거든요. 한데 입을 맞춰 보니 맘에 들지 않아서요.”
“저, 정말? 맘에 들지 않았어?”
이 눈앞의 근사한 아론나이드 경이 맘에 들지 않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나는 아론의 숨소리가 깊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네.”
“어허, 그렇군. 어느 정도 두 사람이 안면이 있는 모양인데…….”
무언가 할 말이 더 있으면 해 보란 듯이 대장은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아론이 내 대답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기분 나쁘라고 말이다.
어찌 됐든 나와 아론 둘 다 말이 없자 대장은 아쉽다는 듯이 정리했다.
“알겠네. 두 사람만의 사정이 있다면 이번 일은 보고하지 않겠어. 모쪼록 일이 복잡해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대장은 내심 안도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일로 상부에 본대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그 역시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네가 그리 말했으니 이 일은 여기서 해결하는 거로 하겠네.”
“감사합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 대장은 아론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자네.”
대장은 엄숙한 눈빛이었다. 아론의 표정이 내게 쏠려 있다가 이내 돌아가자 대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그를 타일렀다.
“자네에겐 많은 눈들이 쏠려 있어. 관심이 마냥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닐세. 공작도 자네에게 관심이 있는 걸 보면 자네에게 구설수나 추문은 좋은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빌미를 제공하는 행동은 삼가도록 하게.”
다정하고 배려 있는 말이었다. 눈빛은 엄했지만 온화한 성품을 알려 주듯 대장은 아론에게 충고했다.
“자네는 누구보다 모범이 되어야 해.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네를 따르고 좋아하니까. 누군가를 이끄는 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대가 모르진 않겠지.”
“…….”
“높은 도덕심과 정의감은 물론이고 절제력도 있어야 해. 자네가 누구보다도 잘해 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일은 정말 의외군.”
대장은 잠깐 속내를 털어내고는 다시 훈계하는 투로 말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거야.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한동안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하게.”
“…….”
“알겠나?”
따가운 목소리에도 아론은 대답이 없었다. 대장은 좀 불안한 얼굴을 했다. 나는 잠깐 아론을 훑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했고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표정이 냉랭해서 신경 쓰고 있던 것이다. 잠시 눈이 마주쳤음에도 마음이 놓였는지 아론이 곧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두 사람 모두 숙소로 돌아가게.”
천막을 나오자마자 아론은 나를 불렀다.
“말레드레드.”
“방금 명령 들으셨잖아요.”
나는 그를 냉혹하게 내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멀어지려 하자 그가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것을 더욱 매몰차게 뿌리쳤다. 아론은 이번엔 순순히 손을 놓아 주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기 전에 마음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와 헤어져야 한다. 지금이 기회다. 머릿속으로 반복하면서.
“그리고 제 말도 모두 들었잖아요.”
“…….”
“우린 그만하는 거라고.”
나는 아론을 보았다. 웃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무정한 듯 무심한 듯 무뚝뚝함을 겨우 흉내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는 척하지 말아요.”
내 말에 아론은 굳어졌다. 눈빛도, 몸도, 그리고 숨마저.
나는 아론을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론이 언제 그 자리를 떠났는지 모르겠다. 나조차도, 내가 숙소로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