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6화 (106/220)

106.

“……아론.”

나는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랐다는 듯이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 다시 눈빛에 격정이 차올랐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시간을 주기로 해 놓고 그런 눈일까.

“잡아 줘서 고마워.”

나는 짤막하게 사과만 하고 멀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나를 그가 붙잡았다.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뭐? 무슨 말이야.”

아론은 입술을 다물었다.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그를 잠식한 듯했다. 끓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정확히 말해야 알아.”

“몸이 안 좋잖아요. 근데 왜 이런 곳에 있어요?”

“카란이 부탁한 게 있어서. 소환사들을 위해서 작전 선두에…….”

순진하게 대꾸하려던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왜 이런 일을 일일이 변명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아프더라도 내가 아픈 것이고, 억지로 일하더라도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

“너와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요? 제 앞에서 보란 듯이 쓰러지려 했잖아요! 제가 말레드레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지금 네 도움을 받으려고 내가 일부러 쓰러졌다는 거야?”

기막히다는 듯이 반문하자 아론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뇨. 절 속상하게 하려고 몸이 아픈데도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론…….”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고 만 걸까. 사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연한 행동 하나까지도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 드는 그가 낯설었다.

“그런 게 아니야. 절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현기증이 일어나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정말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뿐이야.”

“왜 안 좋은데요?”

“그건…….”

마계에서 끔찍한 것들에게 붙잡혀 있던 후유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론의 분위기는 한층 더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겠죠.”

차갑게 쏘아보는 눈. 아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무엇이 됐든 몸이 안 좋다면 쉬어야 해요.”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팔을 뻗었다. 내 이마에 그의 손길이 닿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론은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오히려 내 이마에 닿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론. 다른 사람들이 봐. 여긴 전장이잖아!”

이마에 닿았다가 볼로 떨어지는 손에 흠칫하며 말했으나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목까지, 붉은 잇자국이 남아 있는 목까지 당당하게 쓸고서 말했다.

“사람들, 사람들…….”

비틀린 눈빛은 과격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 따윈 개의치 않고 맘대로 하고 싶어요. 말레드레드랑 마음껏 사랑하고.”

아론의 손길은 뜨거웠다. 피부에 잔열이 남을 정도로.

“질펀하게 관계하고 싶다고요.”

“이, 이러지 마.”

나는 질겁하고 말았다. 아론에게 이런 면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금욕적이고 정중한 그에게도 욕망과 배덕감이 뭉쳐져 표출되려는 욕구가 있었을까. 처음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가 재회한 뒤 함께했던 그날,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더욱 흥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늘 같은 모습만을 보여 왔던 그가, 갑작스럽게 이렇게 나오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구도 말레드레드를 탐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말이죠.”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아론의 본심이 흘러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 정말 그만해.”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간청에 가까운 내 어조에 아론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떼었다. 그리고 다시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거요. 처음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의 입에 우리 이야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싫으니까요.”

“…….”

“하지만 이제는 그것보다 말레드레드가 절 신경 쓰지 않는 게 더욱 싫어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제 마음을 신경 쓰지 않는 게 더욱 화가 난다고요!”

그렇게 외친 아론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아론의 눈은 분노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빛에 잠겨 있었다. 내가 그 말고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했다는 것 때문일까? 그의 순정을 알면서도 자유롭게 타인과 자고, 즐거워해서?

나는 가슴이 아려 왔다. 한순간 그를 위로하고픈 마음이 치솟았지만 동시에 내가 누구인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 거 알았잖아.”

“맞아요. 알고 있었죠. 이게 치졸한 제 질투심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알아요. 이제 저 자신을 완전히 인정하려고요. 말레드레드를 가질 때까진 어떤 여유도 없는 상태라는 걸.”

“…….”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일주일 시간을 주는 거요.”

“뭐?”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못 참겠어요. 말레드레드를 볼 때마다 미칠 거 같거든요. 끌어안고 뜨거운 속살을 비비고, 촉촉이 젖은 그 안에 제 것을 넣고 싶어 머릿속이 흐려져요.”

누가 들을까 봐 조마조마하다. 나는 창백해져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런……. 시, 시간을 줄 때까지 하지 않기로 했잖아.”

“참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헌데 아니네요.”

아론은 음험하고 뜨겁게, 나를 관통할 듯 바라보았다. 나는 숨통이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다시 어지럽다고 느꼈을 때 아론이 말했다.

“단 하루라도, 이젠 참을 수 없어요.”

“그럼, 대답 지금 할게.”

나는 이 현기증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아론을 향해 일어나는 모순적인 감정들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그를 생각하면 애틋하다가도 슬퍼지고 화가 나다가도 낙담하게 된다. 이런 감정들이 끝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궁지에 몰려 있던 나는 이 이상 고민하는 사치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왕도 곤란하기 짝이 없는데 아론까지 이렇게 나와버리다니. 내 작은 몸이 부담감으로 부서져 버릴 지경이었다. 무겁고 암담한 생각들로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버리자 나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우리 전부 그만하자.”

“…….”

아론의 입술이 다물렸다. 눈빛은 참담하게 가라앉았고,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표정이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움츠러들려던 마음을 억지로 붙들어야 했다.

“처음과는 너무 달라졌어. 가벼운 관계를 원했지만 아론은 달라졌지. 변화한 너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나는 여전히 나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꽉 쥐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여전히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는 그가 보였다.

“나는 언제든지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좋아. 그래서 물어보고 시작한 거야. 서로 다른 의견이라면 시작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 달라졌으니 관계는 끝내야 해.”

나는 조용히 듣고 있는 아론의 반응이 왠지 더 무섭게 다가왔으나 이왕 말을 시작한 건 끝을 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젠 내 숙소로 찾아오지 마.”

내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답변과 관계없이 내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고.

“……제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를 지나치려는데 아론이 말해 왔다.

“전 변하지 않았어요.”

나는 결국 그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대꾸하려는데 누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멈칫했다. 그는 아론의 주변에서 주로 일하는 성기사였다. 그는 우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눈치를 살피면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아론에게 말했다.

“공작께서 여기로 오신답니다.”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꽂혀 있었고, 그걸 부담스럽게 느낀 건 나만이 아닌지 성기사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정화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싶다고 하셔서.”

“알겠습니다.”

아론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가 말한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였으나 어찌 됐든 성기사는 답변을 들어 만족했는지 다시 물러났다. 나는 아론에게 말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나중에 말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뭐?”

“제가 어떤 사람인지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뒤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공작이 가신들을 데리고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 성기사와 소환사가 일부러 요란하게 흰빛을 뿜어내는 것이 얼핏 보였을 때, 어느새 아론이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 처음부터 말레드레드를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아론의 입술이 다가왔다. 무시할 수 없는 뜨거운 숨결을 간직한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