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5화 (105/220)

105.

“사실 경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 중에 하나요. 마물과 마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파괴하는지. 보고 온 자들이 그대의 실력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일이 있었소.”

공작은 미소 지었다.

“물론 과하다는 건 알고 있소. 으레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들이 사건을 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황성 내부에서도 그대가 활약한 작전들에 대해 쭉 읽어 봤소. 아주 감동적이었지.”

공작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경이 고위 마족을 힘과 능력으로 누르고, 마계로 도망치게끔 만든 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소. 그대가 폐하의 나이트라고 해도 아무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작의 노골적인 칭찬에도 아론은 변화가 없었다. 공작은 작은 한숨을 짧게 쉬었다.

“경은 들은 것보다 더욱 겸허한 성품인 듯하군. 폐하께서도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하셨던 걸 농담이구나 웃으며 들었는데, 사실일 줄이야.”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공작에게 이번엔 아론이 침묵으로 응답했다. 오히려 반응한 건 레베카였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약간 사나워진 눈으로 레베카가 노려보자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도 농담을 할 때가 있단다.”

그렇게 변명한 공작은 아론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훌륭한 배경과 성품, 능력과 외모를 가진 경을 보니,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나서 말이야.”

“아버지도 참.”

레베카는 아버지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러나 아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농담하시면 안 돼요. 아론나이드 경은 말을 가볍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고요.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담아서 말씀하시죠.”

그러면서 아론을 향해 은은하게 눈웃음을 짓는다. 레베카의 태도는 매력적이었고 그 나이대 아가씨처럼 유혹적이었다.

“상대방을 뒤흔들 수밖에 없이.”

나는 멈칫했다. 레베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론을 빤히 쳐다보았을 때 아론과 또다시 눈이 부딪쳤고 그의 감정이 쏟아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고, 이어 공작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이런, 레베카. 내게 말하는 건지 경에게 고백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지금 네 얼굴을 보면 완전히 사랑에 폭 빠진 사람의 얼굴이니까 말이야.”

“아버지!”

제발 그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진 말란 듯이 레베카가 공작에게 항의했다. 빨개진 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란 상당히 귀여워 보였다. 주위 사람들은 공녀의 태도가 모두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었고 공작 또한 ‘주의해라. 네 마음을 전부 들키고 말 테니.’라면서 더욱 그녀의 감정을 부추기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공녀는 못 견디겠는지 얼굴이 완전히 붉게 익어서 어린애처럼 몸을 돌리고 말았다.

“경이 이해해 주시오. 기사보다 아가씨로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아직 반응이 수줍은 데가 있소.”

“괜찮습니다.”

아론이 답변했다. 공작은 은근히 아론의 반응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보통 이 정도 말하면 상대에게도 어느 정도 애정 섞인 답이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아론은 너무나도 담백하게 이리 대답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어허, 그렇소?”

“그럼 전 이만, 정화 작업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공작과 레베카, 대장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으나 아론은 그런 것 따윈 염두에 두지 않고 가 버렸다. 공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무례한 건지 무심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군.”

“아, 아닙니다. 아론나이드 경이 원래 저런 사람은 아닌데…….”

대장이 얼른 나서서 변명했다. 레베카도 자신의 아버지의 반응을 신경 썼는지 대장의 말에 호응했다.

“맞아요. 원래 훨씬 더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분인데…….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요. 유독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흐음. 기사가 일희일비하면 안 되지. 신께 영광을 입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라면 더더욱.”

그의 말은 날카로운 가시 같았다. 아론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했다. 레베카가 그것을 읽었는지 조금 침울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의 영향력이 크다고 보는 레베카는 공작의 반응이 나쁠 경우 아론과 잘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공작은 곧 그런 표정을 살피고 혀를 쯧쯧 찼다.

“그런 의기소침한 얼굴 하지 마라. 경이 나쁘다는 게 아니니까.”

공작은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아무리 좋은 남자라도 딸이 반한 상대라면 더 꼼꼼하게 봐야 하는 게 아버지야. 나는 더군다나 공작이니까. 수많은 귀족들을 상대하는 나로서는 새롭고 젊은 귀족을 더욱 엄격하게 볼 수밖에 없어.”

“그럼 아론나이드 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실 거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시간을 두어 지켜볼 자야, 그는. 아주 인상 깊은 사람이지. 뛰어난 배경과 실력을 지녔지만 성기사 지위에 머무르고 있으니 말이야.”

공작의 눈이 멀어지는 아론에게 향해 있었다. 레베카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고 말했고, 결국 공작의 핀잔을 듣고 말았다. 그러나 딸을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고 목소리에는 애정이 넘쳤다. 보고 있는 누구나가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딸을 아끼고 있었다.

레베카가 그런 공작에게 더욱 의지해 엉겨들었고 공작은 그런 딸을 끌어안아 주었다. 왠지 가슴이 쓸쓸해졌다. 나는 서둘러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정화 작업을 하러 걸어갔다.

‘이런.’

그러나 평원을 걷다가 오래지 않아 진흙 웅덩이에 발이 빠지고 말았다. 장화는 지저분했고 닦을 수도 없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마물의 시체에선 독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서둘러 끈끈해진 발을 옮겨 정화 작업을 하기 바쁠 뿐이었다.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미 등은 땀으로 축축했다.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마물이 죽으면서 흩어진 정도도 심했다. 땅을 정화하고 돌아서면 또 정화할 곳이 보였고, 깨끗해졌다 싶으면 처리하지 못한 곳이 나타났다.

나는 두어 번 현기증이 올라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정신을 가다듬으려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를 때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소환사 하나가 다가왔다.

“아까.”

“네?”

“지휘한 거요. 마물을 잡으려고 같은 소환사들에게 영역을 그리라고 했잖아요.”

“아, 네.”

혹시 너무했다는 항의라도 듣는 걸까. 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고마웠어요. 다들 전투가 오랜만이라 당황했거든요. 정화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까 마물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도 안 나고 겁이 났는데…….”

그는 멋쩍은 듯이 말을 이었다.

“앞에서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 주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우린 소환사고, 늘 이렇게 싸워 왔다는 걸요.”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요.”

“그런데도 듣지 않으니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처리에만 익숙해져서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

“그래서 아까 더 멋있고 근사했어요. 신성력이 빛나는데 정말 신이 내려왔다 싶더라고요. 마물을 그런 식으로 공격해 유도하는 것도 대단했고, 소환 영역을 비틀어 마물을 붙잡는 것도 굉장했어요. 안 그래도 말레드레드가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신의 사도처럼 성스럽더라고요.”

그는 수줍게 말하고는 미소 지었다.

“다음에도 또 함께 싸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소환사로서.”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소환사로서의 내 능력은 미약했다. 남들보다 특출나지 않았고, 재능이 있다면 변형에 어려움이 없다는 정도 뿐이다. 그런데도 외양의 덕으로 남들 앞에 섰고 남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게 남들을 지휘하기 충분치 않은 조건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이렇게 좋게 봐 주었다니.

기뻤다. 피로하고 메마른 육신에 봄비를 주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사제로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 건 나의 이중생활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면 속의 내 진짜 얼굴을 가려 주는 존재로서 사제라는 신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만족감, 이 행복함이 사실 사제가 된 자가 진정 느낄 수 있는 보상의 한 모습이라면? 그리고 그게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사제라는 직업은 내게 너무나 특별한 게 아닐까.

“…….”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이.

나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나는 마왕에게 내 영혼을 바칠 수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사제로서의 내 직업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마왕에게 종속된다면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무아지경으로 신성력을 뿜어냈다. 가슴에서 끌려 나온 온기가 손끝에서 흰 빛으로 변해 공중으로 흩어져 갔다. 그때마다 희열감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마기, 사악한 육체, 깨끗해지는 대지가 그 희열감 뒤에 따라오는 것들이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구나, 느낀 것은 내 옷이 더러운 진흙과 마물의 흔적에 물들어 있어도 기분 나쁘지 않게 느껴졌을 때였다. 이 정도는 정화할 수 있지. 내가 생각하는 정도는 그 정도였다.

“……하아.”

얼마나 가쁘게 정화 작업에 힘썼을까. 어느새 숨이 목까지 차 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해는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낙조에 평원은 주홍빛으로 가득했고 광경은 장엄하게까지 느껴졌다. 소환사들은 그 장엄한 풍경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흰 빛은 주홍빛 사이사이로 빛나면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마치 어릴 적에 보았던 축제처럼 아득하고 아련한 풍경. 나는 그 모습에 넋을 잃었고 잠시 숨을 멈췄다. 차별과 혐오, 배척과 무관심 속에 온기를 품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나를 따라다니던, 햇살을 닮은 소년 하나가 있었고 소년이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아왔던 것이 기억났다.

왜인지 물씬 올라오는 이 아련한 감정. 묻어 두고 잊으려 해도 그 기억은 도무지 가라앉을 수 없다는 듯이 종종 떠오르고 만다. 추억, 그게 뭐라고.

휘청.

어느 순간, 나는 비틀거리고 말았다. 아마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무리하게 힘을 발휘한 탓인 듯했다. 균형을 잡지 못한 내가 비틀거리던 순간, 누군가 내 손을 확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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