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영리한 마물은 누구를 죽여야 할지 쫓기는 중에도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소환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긴장한 채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나는 차분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한 마리라면 우리끼리 처리할 수 있어요. 소환 영역을 그리는 거예요.”
“하, 하지만 마물을 정확하게 유도해야 하잖아요?”
“그건 제가 할게요.”
소환사들은 내 말에도 주저하는 듯했다. 나는 시간이 없었기에 딱 한 마디만 했다.
“할 수 있어요. 늘 해 왔던 일이니까.”
“조, 좋아요.”
소환사들은 그제야 지팡이를 잡고 신성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가리키는 곳에 소환 영역을 그리는 것을 보고서 나는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일단 먼저 시선을 끌고.’
빛을 끌어냈다. 그것으로 작은 공을 만들어 마물을 강타하자 마물이 날개를 부르르 떨면서 멈춰 섰다. 섬뜩한 포식자의 눈.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나자 순간적으로 마왕이 떠올랐다. 강하고 두려운 그가.
“완성했나요?”
나는 마물이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하자 재빠르게 신성력을 바닥에 뿜어냈다. 신성력을 입힌 땅은 번쩍번쩍 빛났고, 마물은 그것을 뛰어넘어 내게 달려들려 했다. 나는 마물의 공격을 피하면서 소환사들에게 외쳤다. 그러자 불길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아, 아직 덜…….”
소환을 주도하는 소환사가 없기 때문에 소환의 영역은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듯했다. 한동안 정화 작업만 했기 때문에, 실전에서 소환 영역을 그려 본 적 없는 소환사들이 있는 것도 이유인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우선 쫓아오는 마물에게 신성력 공을 연달아 날렸다. 다리를 노려 날리자 마물은 괴로운지 꺽꺽 소리를 내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 주변으로 독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물을 묶어 두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다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묶어 둬?’
소환의 영역이 잘못 그려지면 다른 곳으로 마물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소환 영역이 마물을 붙잡은 채로 붙들고만 있을 수 있다면? 기사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얼른 소환사들이 집중하고 있는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를 꽉 쥔 채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수식을 살짝 비틀기 시작했다. 변형은 나의 장기였으므로 나는 집중하려 애썼고, 됐다고 느꼈을 때 흥분한 마기가 느껴졌다.
“조심해!”
카란의 목소리가 긴장한 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나는 마물이 달려오자 소환의 영역이 그려진 곳으로 빠르게 뛰었다.
내가 소환 영역의 코앞에 다다르는 순간 마물의 뾰족한 부리가 날아왔다. 나는 몸을 숙이며 신성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내 몸 위로 투명한 신성력의 막이 반짝였고 부리가 쿵 하며 튕겨 떨어져 나갔다. 강한 신성력이 아니었기에 큰 상처를 입힌 건 아니었지만, 마물이 튕겨 나가떨어진 곳은 소환의 영역이었다. 마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깨닫자마자 크게 괴성을 질렀다. 날개를 거세게 퍼덕였지만 소환의 영역은 더욱 마물을 옥죌 뿐이었다.
이윽고 마물이 제풀에 지쳐 반항을 않을 때, 성기사들이 도착했다.
“……굉장하군.”
공작은 소환사가 소환의 영역을 푸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의 시선은 무리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내게 집중되었다. 나를 훑는 눈은 예리했다. 얼마만큼 유용한 자원인가 가늠하는 눈 같았다. 이윽고 내게서 시선을 뗀 공작은 괜찮냐고 물어 오는 대장에게 괜찮다는 대꾸를 했다.
“기사들의 대처가 빠르군요. 소환사들도…….”
공작의 눈이 다시 나와 소환사 무리에게 향했다.
“상당한 실력이고요.”
다시 봤다는 듯이 말하는 그에게 이번엔 대장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 전투에서 성기사만큼 소환사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신성력에 다양한 변화를 주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니까요.”
대장은 놀란 얼굴의 카란을 보며 빙긋 웃었다. 대장은 더 강한 목소리로 의견을 냈다.
“카란의 말처럼 소환사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대규모의 싸움에서 마물이나 마족에게 신성력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소환 영역으로 그들을 붙들어 공격할 수도 있고요. 처리하기 곤란한 시체를 마계로 되돌려 버릴 수도 있지요. 그건 알다시피 성기사는 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공작은 날카로워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듯이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그는 마침내 카란을 바라봤다.
“자네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상부로 의견을 보내 보게. 괜찮다 느껴지면 자네의 의견을 힘을 실어 주지.”
“감사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리가 있다고 느껴질 때뿐이야.”
공작은 단호하게 덧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저는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군요.”
“……아버지!”
그때 한 무리의 기사가 말을 타고났다. 선두에서 밤색 말을 타고 있는 기사는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 레베카.”
순간 공작의 얼굴에 부드러움이 넘실거렸다. 선두의 기사는 말에서 훌쩍 내리고는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로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이쪽에 계신다고 들어서 얼른 전투를 끝내고 왔어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공작은 흐뭇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엄했다.
“신의 뜻을 수행하는 일인데 네 맘대로 전투를 일찍 끝낼 수 있단 말이냐?”
“아버지를 보러 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더 힘이 나더라고요.”
애교스럽게 웃는 그녀를 보며 공작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도 딸의 그런 애교가 나쁘지 않은지 어느새 눈빛이 온화해져 있었다.
“기사들의 활약을 다 보신 거예요?”
“그래. 다 보았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소환사들도 아주 훈련이 잘 되어 있더구나.”
“소환사들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한순간이지만 그녀의 눈빛이 불쾌하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그녀는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맞아요. 대부분 열심히 훈련하니까요. 아프다는 핑계로 빠지려는 소수를 빼고서는 말이죠.”
소수. 그건 나를 가리키는 말일까. 내가 멈칫했을 때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나 나태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 그런 자들하고는 멀리해라. 곁에 있으면 단기든 장기든 좋을 게 없으니까. 물론 너부터 그런 자가 아니어야 하겠지만.”
“아버지. 설마 절 못 믿으시는 거예요?”
공작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리가. 나는 네가 활약하는 것을 잘 전해 듣고 있다. 폐하께서도 내가 본대에 간다고 하니 잘 다녀오라고 하시면서 네 칭찬을 하시더구나.”
“폐하께서도 제 소식을 듣고 계신 거예요?”
“그래. 커다란 영광이지. 네가 좋은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신의 뜻을 수행하고자 전선에 나와서 싸우는 걸 칭찬하셨다. 사교계에 있는 여식들보다 기사로서의 네 아름다움이 더 빛날 거라고 말하면서.”
“어머나. 부끄럽네요. 폐하께서 그리 좋게 봐 주시니…….”
“겸손할 필요 없다. 넌 이미 우리 가문의 빛이니까 말이야.”
그러고는 웃음이 쏟아졌다. 사랑스러운 부녀의 대화에 대장의 표정도 흐뭇해졌고, 곁에 있는 수하들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카란의 표정을 제외하고는 동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나는 그것을 보던 것을 멈추고 소환사들과 함께 자리를 이동하려고 했다. 마물이 거의 다 잡혔는지 대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카란의 바람대로 내가 무언가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려는데 말발굽이 땅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 저기 봐요.”
유난히 들뜬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도착한 말발굽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성스러운 기사의 샛별, 눈이 부신 아론나이드 경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죽은 마물의 위치를 말했다. 소환사 일부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아론은 다시 시선을 옮겼고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눈빛은 짙었고 숨막힐 정도로 벅찬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 감정이란 게 화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뜨겁고 난폭했기 때문에 나는 어쩐지 가슴이 꽉 막히고 말았다.
‘더 화가 났잖아? 어째서?’
지난번 방문 때문인가? 펠이 나를 옮겼다고 오해해서? 관계를 정립해 달라는 기간에도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 내게 분노한 모양이었다. 나는 펠하고 나를 그런 관계로 오해한 것이 끔찍해서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그런 오해를 통해서 내가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말은 한 번 해야 할 텐데.’
나는 그를 무거운 눈으로 보았다. 내 눈빛에서 어두운 감정을 받았는지 이내 아론은 고개를 홱 돌렸고, 장갑을 마저 끼었다.
“저기, 아론나이드 경.”
어느새 그의 곁에 대장이 서 있었다. 그는 기쁜 표정으로 누가 와 있는지 보라고 옆을 가리켰고, 아론은 그제야 공작을 발견했다는 듯이 멈칫했다. 아론은 그에게 목인사를 했다. 달콤한 만남의 말도 칭찬의 인사도 없었다. 그저 덤덤하게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면서 오히려 당황한 건 레베카였다. 그녀는 중간 역할을 할 셈인지 더욱 발랄한 어조로 아론에 대해 칭찬했다.
“아버지. 아론나이드 경이 말수가 적어도 일은 확실하게 하셔요. 함께 전투하다 보면 얼마나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많은데요. 그런 때에도 침착하게 우리를 지휘하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답니다.”
“과찬입니다.”
아론의 말투는 건조했다. 그는 평소보다 더욱 가라앉아 있었지만 레베카는 그럼에도 그가 반응했다는 것이 기쁜지 입가에 밝은 미소가 맺혔다. 공작은 그런 딸과 아론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콧수염을 매만졌다. 레베카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전혀 과한 칭찬이 아니에요! 옆에서 보면 얼마나 배울 게 많은지 몰라요. 두려움 없이 수많은 마물을 향해 달려나가는 용기도, 마족에 맞서 그들을 압도하는 실력도,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집념도! 너무너무 굉장한걸요!”
“이런, 레베카.”
공작은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네가 5살 때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에게 반해 왕자랑 결혼해야 할 이유를 외친 이후로, 그런 굉장한 열정은 처음 보는구나!”
“아버지, 무슨 이야기를……!”
부끄럽다는 듯이 외쳤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듯이 레베카의 볼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공작은 그런 딸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아론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레베카가 타고난 성향으로 경을 귀찮게 한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말이오.”
“없습니다.”
아론의 대답은 깔끔했다. 흡사 정이 없을 만큼 단출했기 때문일까. 공작의 표정은 어쩐지 마땅치 않았다. 아론의 반응이 너무 심심하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