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공작인가?’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선두에 선 자가 가장 옷차림이 화려하다는 것과 그의 옆에 카란이 있다는 것을 보건대 확실했다.
이윽고 성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이번 작전을 주도하는 주요 지휘관이 된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수색을 끝나고 마물을 처단하면, 그 뒤 수거는 소환사들이 맡게 될 겁니다.”
기사단장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당연하게 지시했다. 소환사들의 얼굴은 대부분 좋지 못했다. 결국 정화 작업을 하러 온 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은 안전한 정화 작업을 선호해서 나쁠 거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카란의 바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약간 굳어진 눈으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곧 시작을 알리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전원, 횡으로 정렬!”
그러자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섰다. 그들은 대검을 움켜쥐었고 곧 기사단장의 구호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론은 기사단장처럼 하지 않았다. 좀 더 개별적인 수색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아론은 수십 명의 기사들을 다섯 팀으로 나눠서 각 방향으로 흩어지도록 했다. 그들은 검을 쥐지 않은 채 바닥에 마물이 남긴 흔적을 쫓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론과 한 팀을 이룬 기사들이 금세 가장 멀리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마물을 금방 찾아낼 거란 예감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는 뭘 하지?”
“그러게. 소환 영역을 그릴 이유도 없으니까.”
“기사들이 마물을 다 잡을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나?”
소환사들이 어색하게 소곤거리는 동안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공작의 일행이었다. 척 보기에도 높은 귀족인 자가 다가오자 소환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대장은 공작이 가까이 온 걸 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셨습니까, 공작 각하.”
“아, 보라 경.”
공작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가웠고 표정도 어딘가 꾸민 듯한 계산적인 느낌이 들었다. 공작은 날렵한 코 아래 멋들어지게 올라간 자신의 콧수염을 슥 매만지며 지휘관에게 말했다.
“늦은 시간에 작전을 수행하느라 고생이 많군요.”
“별말을 다 하십니다. 엘크리찬의 축복 아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겸손한 대답이 돌아오자 공작은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걸린 듯한 그 미소는 공작을 상징하는 미소처럼 보였다. 실제 웃지 않지만 남을 상대하려면 늘 그래야 한다는 듯이 띤 미소를 보며 나는 그가 뼛속 깊이 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 수도에 머물기 때문에 전장의 고됨을 잊기가 쉬운데, 오늘 이처럼 나와서 보니, 그 고됨도 느끼면서 덩달아 안도감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제국을 수호하는 성기사들의 자태가 저토록 훌륭한 걸 보니까요. 어떤 마물이나 마족이 와도 크게 걱정이 안 되는군요!”
“하하하. 그렇게 느끼신다니 본대의 지휘관으로 한없이 영광입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다. 대장은 말솜씨 좋은 공작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느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전투를 총괄하는 자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다는 건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았으나 이것은 격한 싸움이 아니었다. 수색 작업이고 정화 작업이었다. 따라서 대장은 더욱 자신감 있게 공작에게 말할 수 있었다.
“저희 본대는 기본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작아도 꾸준한 훈련과 효과적인 작전을 통해서 다양한 마물과 마족을 상대하는 데 좋은 성과를 내려 합니다.”
그는 흐뭇하게 덧붙였다.
“실제로도 최근 작전이 모두 성공하기도 했고요.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긴 하나, 마계의 사악한 힘을 저지하는 데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자신감이란 참 중요하죠. 그냥 자신감이 아닌 능력이 뒷받침 된 자신감이요.”
그의 시선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론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번들거렸다.
“그건 무언가를 이뤄 내고 일궈 내는 힘이니까요. 탐낼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모습이죠.”
“그렇습니까? 공작 각하께서 과찬을 해 주시니 제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대장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분이 몹시도 좋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공작이 그를 보며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어두운 눈으로 그를 보았을 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 여식에게도 늘 강조합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자신감 있게 쟁취해야 한다고요.”
공작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제가 가진 모든 능력과 수단을 이용해서.”
“아아. 그래서 레베카 경이 그렇게 열정이 넘치는군요. 마물을 잡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기에 놀랐는데. 이제야 어디서 그 집중력이 연유했는지 알겠습니다.”
대장은 알았다며 손바닥을 쳤다. 공작은 그 받아치는 모양새가 재밌었는지 짧게 미소 지었다. 공작의 시선은 성기사들에게 다시 머물렀다. 그는 성기사들이 관목에 숨어 있던 마물 하나를 찾아서 칼로 조각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검은 피가 튀고, 거죽이 벗겨졌지만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그것을 지켜보았고, 이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성기사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근데 소환사들은 할 일이 많지 않군요?”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장은 그제야 뒤쪽에 소환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보고서 얼른 설명했다.
“이들은 정화 작업에 투입될 예정이어서요. 당장은 할 일이 없습니다.”
“마물의 시체를 소거하는 것보다.”
그때 잠자코 있던 카란이 끼어들었다. 그는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소환사가 마물의 시체를 차원의 문을 통해 마계로 돌려보내는 게 훨씬 좋습니다!”
“자네, 갑자기 무슨 말을…….”
대장이 끼어들었으나 공작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카란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자네는 서류 작업만 하는 인 줄 알았는데?”
눈에는 무시하는 기색이 있었다. 카란은 굴하지 않고 의욕 가득하게 말했다.
“소환사로서 마물과 오래 싸웠던 전사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상, 마물의 시체는 쌓이면 쌓일수록 그 처리가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마물이 죽자마자 바로 처리하려는 것이고요. 이것은 저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계에서도 시체들이 쌓이면 곤란해질 겁니다.”
“어째서? 그들의 세계로 그들의 시체가 돌아가는 것인데?”
“지켜본 바, 마물의 시체는 마물조차 피해 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 말은 마물 시체 그 자체로는 같은 동족에게도 일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마물 시체를 저희가 처리하지 않고 마계로 보내 버리면, 우리의 부담을 덜면서 그들의 부담을 가중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흐음, 난 잘 모르겠군. 원래 그런 식으로 소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물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서 성기사들이 그냥 죽인 뒤 정화 작업을 하는 쪽으로 바뀐 거로 아는데?”
“저는 원래의 방법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훨씬 좋은 일이니까요. 기사와 소환사가 한 팀으로 움직여서요.”
“흐음.”
“기사가 소환사를 보호해 주면서 마물의 시체를 처리하게 되면, 아군의 전력 손실 없이, 적군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카란의 간곡한 말에도 공작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그의 말에 전혀 감흥을 받지 못했는지 표정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카란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소환사는 단순 정화 작업만 하기엔 훨씬 유용한 자원입니다! 차원의 문을 여닫을 수 있다는 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의미니까요! 나중엔 마물의 시체를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접 마계로 가서 그들을 공격할 수도…….”
“자네, 너무 과한 생각을 쏟아내는군.”
마침내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증명이 되지 않은 생각은 망상일 뿐이야. 전투에선 아주 쓸모없는 것이지. 더군다나 사제로서 그런 사악한 땅에 발을 디딜 생각을 하다니. 자네가 정말 신의 믿음 아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진실로 돌아보도록 하게.”
냉랭한 목소리에 카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무뚝뚝한 인상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우울하게 굳어져 있었다. 공작은 그를 보지 않은 채로, 언제 냉랭한 소리를 했냐는 듯이 밝게 미소 지었다.
“저기 보게. 성기사들이 마물 여럿을 찾아낸 모양이야.”
마물들은 모두 세 마리였다. 긴 다리를 가지고 있는 마물은 언뜻 보면 커다란 새처럼 생겼다. 그러나 다리에는 커다란 가시가 사납게 나 있었고, 그들이 깃털을 휘날리며 뛰어올 때마다 작은 가루가 반짝이며 떨어졌다. 독이었다.
“도망간다-!”
그들을 추격하던 성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노랑 마물 셋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세 갈래로 나눠 뛰었다.
“머리를 쓴다! 흩어져서 쫓아가!”
긴 다리로 달리는 녀석들은 무척 빨랐다. 머리도 좋은지 그들이 성기사들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발톱으로 흙을 움켜쥐어 뿌려 댔고, 성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멈춰서야 했다.
“이, 이쪽으로 옵니다!”
마물 하나가 우리 쪽으로 뛰어오자 공작의 가신이 기겁하며 외쳤다. 대장이 외쳤다.
“뒤쪽으로 가십시오! 저것은 우리가 상대하겠습니다!”
공작이 그렇게 뒤로 물러나자 대장은 남아 있던 성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마물은 조용히 성기사들을 응시했다. 붉은 눈을 빛내는 마물은 성기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마물은 성기사의 검에 가까워진 순간, 갑자기 뛰어올라 성기사를 훌쩍 넘어섰다. 그러자 가루가 반짝반짝 성기사의 몸에 떨어졌다.
“으아아악!”
독은 갑옷은 물론이고 옷과 피부를 부식시켰다. 성기사들이 땅을 뒹구는 것을 확인하고 마물은 우리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더니, 대장에게 살의 어린 눈을 고정했다.
‘설마 우두머리가 누군지 파악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