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100화 (100/220)

100.

다행이라면 설명하는 역할을 하지 않아서라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불행하다는 건 지체 높은 귀족에게 잘 보일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일 것이고. 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자 감독관은 가 보란 듯이 손을 휘이휘이 크게 저었다.

“그러니까 보고 생각은 말고 숙소로 돌아가게. 나중에 내가 말해 둘 테니.”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내 발길은 숙소로 향하지 않고 있었다. 쉬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바로 물자를 저장하는 천막이었다. 내가 입구에 다다르자 경비병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는 물자를 지키는 경비였다. 사제가 아닌 그는 천막을 지키는 임무만 담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그에게 묻기로 했다.

“부족한 물품이 있어서요.”

그러자 그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물건이 있다면 상관에게 요청을 하시면 됩니다. 여기는 말 그대로 보관하는 장소라…….”

“궁금해서요. 발라 잎사귀를 받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가 찾아와야 했어요.”

“아. 그걸 물으러 오는 분들이 꽤 있으십니다만, 현재 발라 잎사귀는 보관되어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도요? 하지만 어떻게…….”

“글쎄요. 저도 아는 게 없어서요. 다만 올해 발라드나무의 수확량이 매우 떨어졌다고 하네요. 그래서 황성에서도 값이 치솟은 발라 잎사귀를 공급할 수 없었나 봅니다.”

“정말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조금 있었는데, 그마저도 한 분이 모두 가져가셔서요.”

“한 분? 누구요?”

“아론나이드 경이요.”

경비는 해맑게 대답했다. 나는 어딘가 어색하게 굳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떤 이유로 가져갔는지 말하던가요?”

“아뇨. 별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요. 하지만 필요하니까 가져가고 싶다고 하셨겠죠.”

경비는 아론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어조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아론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져갔을 것이다. 제 말대로 나를 임신시키게 하려고…….

그런 생각을 하자 착잡해졌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슴이 꾹 막힌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경비를 한 번 쳐다보고 짤막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이 남은 수량을 모두 가져간 건 너무한 거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그를 보면서 나는 애먼 사람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질거리는 정신을 부여잡은 채로 몸을 돌렸다. 힘겹게 숙소에 다다랐을 때는, 그러나 편히 누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내 숙소를 사납게 들쑤시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뭘 하는 거예요?”

나는 내 방을 뒤지고 있는 펠을 보면서 기겁했다. 펠은 내가 왔는데도 놀라지 않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제 신성력이 파괴된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멈칫했다. 펠은 그런 내 반응을 살피면서 힘주어 말했다.

“마기를 쓴다면 파훼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 보니 철저하게 파훼되어 있더군요. 얼마나 강력한 마기를 쓴 것인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다고요? 다, 당신 정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기막혔고 기분 나빴다.

“날 마족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신성력을 쓰는 마족으로?”

질렸다는 듯이 외치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미안함의 침묵이 아니라 부정과 확신의 침묵이었다. 펠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나는 그가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마기가 남아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상한 게 없나 급하게 뒤졌더니 이게 나오더군요.”

그가 내 앞으로 툭 던진 것은 토끼 마족이 주었던 쿠키 주머니였다. 달콤한 냄새가 상황에 맞지 않게 번져 나왔다. 머리가 심하게 어질거렸다. 달콤한 냄새 뒤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토끼 마족과 에레나, 그리고 마왕까지. 그가 찾는 것이 그 쿠키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정작 펠은 그것을 모르는지 뜻밖이라고만 말했다.

“맛있는 쿠키더군요. 아주 정성스럽게 반죽을 한 게 느껴집니다.”

“……적당히 해요.”

나는 독기를 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악한 존재라고 규정하며 내 쉴 곳을 망가뜨리는 그에게 분노를 토해 내지 않으면 그가 더한 짓을 하리란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날을 세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도 참을 수 없으니까!”

그는 나를 보았다. 내가 허투루 말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느끼고 있을 터였다. 나를 쳐다보는 눈은 분석하는 눈빛에 가까웠다. 마치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그것마저 볼 셈으로 방을 뒤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마족은 흥분하면 더욱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뿜는 거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펠은 나를 더 도발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이번 건 분명히 항의하겠어요. 펠이 내 숙소에 무단으로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고 보고를 올릴 거예요!”

무엇이 됐든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였고 잘못된 건 잘못된 거였다. 날 마족으로 몰아세우고 싶으면 그가 공식적으로 상부에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이러는 것은 그냥 나에 대한 괴롭힘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괴롭힘에 수더분하게 넘어갈 만큼 온순한 성향이 아니었다. 나태하고 제멋대로인 나지만, 순순히 얻어맞으며 살아갈 만큼 수더분한 건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맞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먼저 나는 그를 내쫓을 생각으로 쏘아보았다. 펠은 눈빛을 알아듣고 몸을 돌렸다. 그는 나가기 전 사과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 신성력이 파괴된 걸 보고 너무 흥분해 버렸거든요.”

“이제 와서 사과하더라도 늦었네요.”

내 차가운 대꾸에 펠은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한 대로 하십시오. 용서를 바라고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가 잘못한 것이니 기꺼이 징계를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어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얄미울까. 나는 속이 콱콱 막히는 분노란 무엇인가를 경험했다. 말로 하면 그 마음이 모조리 표현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를 힘주어 노려보았고 그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마계를 향한 제 반감은 아주 지독합니다. 변명은 되지 않겠지만, 제가 그 때문에 말레드레드를 이렇게 귀찮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귀찮게요? 이 정도면 패악을 부리는 수준이라고요!”

나는 맹렬하게 쏘아붙였다. 펠은 빤히 나를 보았다. 내 흥분에도 그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하지만 그대는 무언가 숨기고 있습니다. 제 감은 분명합니다.”

그가 나가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이 내 심장을 찔러 왔다. 나는 기습 공격을 당한 것처럼 숨을 멈추고 말았다.

숨기는 것. 나라는 사제가 음탕한 존재라는 것을 숨기려 했다. 그것이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어찌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나는 순간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내가 바랐던 일들이 마치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되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쾌락과 욕망만을 탐했던 일들이 옳지 않다는 듯이…….

나는 결국 내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말레드레드?”

펠의 의아한 목소리가 천막 너머로 들렸다. 그러나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나는 어둑한 시야를 밝히는 것이 천장의 등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깜박이자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느껴졌고, 숨을 들이키자 시야가 맑아졌다. 나는 내가 치료소에 있음을 깨달았다.

“깨어났어요?”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치료하는 사제였다. 깨끗한 사제복을 차려입은 그녀에게선 아픈 자를 위로해 주는 상냥한 기색이 느껴졌다.

“성기사 분이 데려왔어요. 갑자기 쓰러졌다고 무척 걱정하시더라고요. 깨어나면 알려 달라고 하셨는데, 날이 밝는 대로 소식을 전해야겠네요.”

아론일까. 걱정이라는 말에 아론을 무작정 떠올려 버린 나였다. 그라면 나를 걱정할 만하다면서. 그러나 그녀가 꺼낸 이름은 아론의 것이 아니었다.

“펠이 누군가를 그렇게 걱정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그분은 이곳에 누워 있을 때도 필요한 말만 하셨거든요.”

나는 펠이 이곳에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걱정이라는 것은 사실 마족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녀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의외로 다정한 분이세요.”

나는 불쾌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이곳에서 마기에 침식된 육체를 회복시켰던 게 떠올랐다. 그는 이곳에서 얼마나 내게 반감을 키웠을까. 새삼스럽게 이 장소가 소름 끼치게 느껴지고 만다. 나는 몸을 오스스 떨었다. 그러자 사제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또 몸이 안 좋아요?”

사제는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어서요. 마물에게 심하게 당한 것 같은데 치료를 하러 오지 않았군요.”

이것은 마물이 아닌 마계의 식물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사제는 이틀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인 건 마기에 당한 건 아니라서 후유증이 없다는 거예요. 몸의 상처만 치료하면 언제든지 작전에 복귀가 가능합니다.”

상냥하게 설명하는 그녀에게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참. 펠에게 말할 필욘 없어요. 제가 그를 보면 안부를 전할게요.”

“아, 그러시겠어요?”

그녀는 순순히 수긍했다. 펠과 나의 사이가 각별하다고 본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싸웠던 입장에서 사실 펠은 괜찮은 성기사이자 동료였다. 그가 나를 마족으로 몰아가지만 않았어도 그는 계속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가 병문안을 온다는 것마저 끔찍하게 다가온다. 나를 어떤 식으로 몰아갈지, 어떻게 마족이라고 의심하며 괴롭힐지 벌써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었다. 나는 펠을 떠올리자 기분이 확 거꾸러져서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진정하려 눈을 감았고 다시 잠들려고 애썼다. 호흡이 진정되고 느려졌을 때 나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치료 사제인가.’

굳이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잠들고 싶다는 느낌도 한몫해서 눈을 감은 채로 있으려니 나를 돌봤던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가 데려왔어요. 펠이요. 팔로 안아들어 데리고 왔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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