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기겁해서 외치던 나는 누군가와 말다툼했던 것이 머릿속에 스치자 멈칫했다. ……펠! 그가 내 숙소 주변에 신성력을 뿌려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내가 마기를 쓰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이라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신성력을 내 숙소 주변에 뿌려 두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이야!’
나는 그제야 알겠다며 마왕을 바라보았다. 마왕은 내 눈빛을 읽은 것인지 살짝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뭐지?”
“그, 그러니까……. 전혀 상관없는 성기사가 제 숙소 주변에 신성력을 뿌려 두긴 했어요.”
“전혀 상관없는 성기사? 그대는 몸을 나누는 자를 그렇게도 말하는가?”
나는 그 말에 발끈하고 말았다.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리고 원인을 따진다면 이 일은 순전히 당신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지?”
어두워진 눈빛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왠지 이런 일을 일일이 말해도 되나 괜히 고민스러워진 것이다. 그래도 아론에 대한 오해를 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마왕과 아론이 최대한 접점이 없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나는 진실을 말했다.
“당신이 제 몸에 마기를 숨겼던 걸 그 성기사가 목격했어요! 그래서 그날부터 쓸데없는 관심과 호기심을 사고 있어요. 그는 저를 마족이라고 의심하고 감시하니까…….”
“그래?”
마왕은 의외의 말에 멈칫했다.
“제 숙소에 신성력을 한참이나 뿌리는 걸 발견했다고요. 저는 그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이런 이유 때문이네요.”
나는 핏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기로 벌어지는 일을 방해하려고요. 제가 마족이라면 그 힘을 다시 쓸 테니 그걸 잡아내려는 것이었겠죠.”
내 말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확실히 내 소환을 방해하는 힘은 그대의 힘과는 달랐어. 나는 그대가 누군가의 힘을 빌려 소환을 거부했다고 확신했지. 왜냐하면 소환을 하다가 되돌아온 힘에 도리어 내가 큰 타격을 입었으니까.”
“……!”
그게 지금 그가 창백해진 이유일까? 토끼 마족이 마기가 매우 불안정하다고 했다. 그 말은 그의 상태가 몹시도 좋지 않다는 뜻이며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놀라 눈을 끔뻑이자 마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힘이 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더욱 큰 충격을 입었다. 그래서 그대를 온전히 이 방으로 소환할 수 없었지. 그대를 간신히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만 해도 고역이었으니까.”
“그럼 절 그 이상한 숲속으로 소환한 게 고의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대를 그런 곳으로 소환시켜서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떨고 있는 내 몸에 무언가를 덮어 주었다. 움찔해서 보니 침대를 덮고 있던 비단이었다. 따뜻했다. 나는 안도하며 그것을 더욱 끌어안았다. 마왕은 그 모습을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물론 그대를 향해 불쾌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야. 차라리 마계의 동식물에게 먹혀 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으니까.”
“…….”
“나를 거부하는 인간이라면 나 역시 자비를 베풀 수 없으니까.”
마왕은 느리고도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의 분노는 진정된 것처럼 그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대가 회라바라에게 먹혀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군.”
그것은 마치 깨달음과도 같았다며, 마왕은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은 냉정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데 그 속에 있는 감정이란 어쩐지 둥글고 온화해 보였다. 제 감정의 모습을 살짝 비쳐 낸 채로 마왕은 고백했다.
“멸종해 가는 내 족속과 그대 사이에서 나는 그대를 선택하고 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명확한 문장. 한 줄기 선명한 빛과도 같은 고백은 내 가슴에 무겁게 꽂혀 들었다.
“아주 분명하게도 말이야.”
마왕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래서 그대를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대의 육체만이라도 내 것으로 만든다면 그대의 마음도 자연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내 것이 된다면 결국 마음도 나를 따라올 것이다.”
“…….”
“나는 이렇게 그대를 원해.”
마왕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고백이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론의 고백이 절절하고 애틋하다면 마왕의 고백은 무언가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왕은 그런 내 모습을 지그시 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그대는 그렇게 나를 원하지 않지.”
나는 흠칫해서 그를 보았다. 그러하다는 이유로 나를 어떻게 할까 두려워진 것이다. 마왕은 내 반응을 보면서 곤란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날 두려워하지. 처음처럼 나를 경외의 존재로만 보고 있어. 그대가 경계를 풀 때는 오로지 육체관계를 가질 때뿐이니까.”
“…….”
“어떻게 해야 나에 대한 인식을 바꿀 건가.”
나는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여태까지 그가 보여 주었던 행태들이 성적으로 자극되는 것도 있었지만 나를 궁지로 몰아간 것도 있었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언제든 그가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는 그래서 침묵으로 내 마음을 표현했고 마왕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대답을 듣기에 좋은 날이 아닌 것 같군.”
마왕은 이렇게 덧붙였다.
“힘을 보충하고 다음에 보도록 하지.”
마왕의 말이 끝나자 토끼 마족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예쁜 리본이 달린 주머니가 있었다. 얼떨결에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번져 왔다. 토끼 마족이 귀를 찡긋거리며 미소 지었다.
“쿠키입니다.”
“……아.”
“힘을 내시라고 갖가지 열매를 넣었으니 오래 씹히는 게 있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토끼 마족은 유창하게 말을 이었다.
“짐승의 젖과 함께 마시면 더욱 맛있을 겁니다.”
“…….”
“두었다가 먹으려면 서늘한 곳에 보관하시고요.”
부업으로 무슨 일을 할까. 새삼스럽게 마족의 다른 직업에 대해 의견을 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마족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다시 충성스러운 얼굴이 되어 마왕에게 보고했다.
“에레나 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이번엔 아주 정중하게 마왕님을 뵙고 싶다고 요청하고 계시고요.”
“방문 이유는 역시 마기 때문인가?”
“네. 마기가 요동치자 놀라서 달려오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간이 왔다는 걸 이미 짐작하고 오신 게 아닐까 합니다만.”
나는 토끼의 눈길이 내게 향하자 멈칫했다. 에레나라는 이름이 들리자 이미 떨리던 몸이었다. 두려움을 느끼며 쿠키 주머니를 꽉 쥐었을 때 마왕이 내게 말했다.
“그대는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
좋은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내 달라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손을 까닥거렸다.
“잠시 이리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팔이 내 목을 휘감았고 나를 그의 품으로 깊게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자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얇은 비단만 걸친 채였다. 그의 근육에 닿는 가슴이 느껴지자 기분이 엉망이 됐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곁에는 토끼 마족이 있었다. 설마 더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을 때 그가 은밀한 어조로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번엔 이렇게 흔적을 묻혀 오지 마.”
마왕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명백한 선전 포고 같으니까 말이야.”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이 내 목덜미를 이빨로 깨물었다. 알싸한 아픔이 느껴지자 나는 절로 미간을 찡그렸다. 저번에도 이러더니 이번에도……!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나는 마기에 휩싸였고, 어느새 하얀 침대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쳤다, 정말…….’
침대를 보자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
다시 깨어났을 때 여전히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피로를 떠나서, 어제 마계에서 당한 흔적들로 몸은 여러 군데가 아팠고 걸을 때에는 허벅지까지 떨려 왔다. 가벼운 훈련에도 식은땀이 흐르자 감독관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어 왔다.
“자네 괜찮나?”
“……괜찮아요.”
감독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색이 아주 창백한데. 몸이 안 좋으면 쉬도록 해. 지팡이를 쥔 손마저 떨고 있으니.”
나는 그제야 내가 지팡이를 덜덜 떨면서 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놀랐다는 듯이 내려다보자 감독관이 혀를 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몸이 그런데도 몰랐나.”
마왕에 대한 생각, 아론에 대한 생각. 두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신성력 훈련에 집중하려 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도록……. 두 남자가 내게 던진 요구를 잊어버리도록…….
그러나 감독관은 내가 안 좋은 몸을 괜히 혹사한다고 보았는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서 숙소로 돌아가게. 작전에 보냈다가 아파서 실수하게 되면 더 큰일이 벌어지니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냉정하게 보자면 내 몸은 지금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알겠다며 카란에게 보고하고 쉬겠다고 하자 감독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오늘 바빠. 수도에서 공작 각하 한 분이 방문하셨거든. 그분에게 이 본대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무리에서 빠졌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