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불현듯 나는 아까 나를 으스러뜨려 잡아먹으려 했던 나무를 떠올리고 말았다. 회라바라의 열매. 나에게 끔찍했던 그것이 마계에는 귀중한 생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기막힌 일일 뿐이다. 마왕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졌다. 감정에 묻힌 듯 깊은 수심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우리는 그러한 존재다. 인간의 영혼을 탐하도록 만들어졌고, 파괴를 일삼도록 설계되어 있는 존재. 그래서 늘 인간계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마왕은 나를 쏘아보았다.
“그런 우리가 마냥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우리 마계가 생존할 가치가 없는 세상이라고 확신하는가?”
마왕은 마침내 신을 모욕했다.
“오히려 신이, 이념으로서 그대들을 조종하려는 그가, 그런 면에선 더욱 냉정하며 사악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 무슨 말이에요?”
나는 화가 나서 대꾸했다. 마왕이 말했다.
“그가 직접 우리를 공격한 적이 있던가? 그가 정말로 선한 의지를 지녔다면 허약한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를 공격해 왔을 것이다.”
“……그게 무슨!”
나는 어이가 없어 울컥했다. 신이란 마계 종족처럼 인간계를 드나들 수 없다. 그는 우리의 불안한 감정을 먹이 삼는 마물도, 영혼을 탐하는 마족도 아니었다. 그런 존재가 어째서 우리의 것을 탐하는 마계의 우두머리에게 비난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나는 분노했지만 마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실상은 어떻지? 신은 인간을 부추겨 우리를 대항하는 세력을 만들고 매일같이 우리가 악하다는 사상을 주입한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약한 인간에게 자신의 힘을 조금 넘겨 주고, 그 빛에 반하게 해 우리에게 맞서도록 하는 거지.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면 할수록 인간들은 신을 따를 테니까. 그는 편안하고 안락한 채로, 자신을 따르는 수백만 명의 생명을 얻게 되는 거야.”
마왕은 단정 짓듯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욕망에 약한 그대 역시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걸 보면.”
“……그게 뭐가 이상해요? 마족이 우리의 세상을 부수려 하잖아요. 마족이 본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우리도 우리를 보호하는 존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그건 살아남으려는 당연한 행동이라고요!”
“그대는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인간 세상을 부수려고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신이 그대들을 순수한 이념으로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계가 우리 세계를 어떤 식으로 황폐하게 만들어 왔는지 직접 눈으로 보아 온 터였다. 그걸 아는데 그는 어째서 부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명백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내가 노려보자 마왕이 엄중한 시선을 부딪쳐 왔다.
“어떤 포식자도 자신의 먹이가 멸종되기를 바라지 않아. 그렇다는 건 제 생명도 끝이 난다는 걸 의미하니까.”
“하지만 마물과 마족들은 늘 우리를 죽이고 파괴하려고 해요.”
“그건 그대들이 신의 힘으로 저항하니까. 우리를 파괴하려는 힘에 우리도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우리는 원래 ‘계약’을 하는 존재야. 계약은 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의 영혼을 받는 것은 계약을 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지.”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의 기운이 불안정하다고 한 것이 어떤 말인지 갑자기 알 수 있었다. 그의 기운이 난폭하게 흔들렸고 그의 주변으로 사나운 바람이 몰아쳤다. 피부에 따끔거리도록 느껴지는 그의 기운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이 때때로 얼마나 공포스럽게 비쳐질지 알고 있다. 얼마나 그대들을 두렵게 할지도 말이야. 하지만 알아 줬으면 해.”
마왕은 나를 설득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원래 공생하는 관계란 것을.”
그의 목소리는 왜인지 다정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포식자와 피식자가 아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란 것을.”
마왕의 눈이 나를 꿰뚫었다. 그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처럼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붉은 눈이 나를 관통할 때마다 가슴이 떨렸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깊이 가라앉은 욕망이 동요하듯이 일렁였다.
“그렇게 우리를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대의 세상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마왕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나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에게 허물어져 가는 몸을 느꼈다.
“신과 달리 그대들을 마냥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가 내뱉는 말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나는 그를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어둠에 휩싸인 그가 전부였고 그밖에 없는 세상이 당연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에게서 마침내 어떤 요구가 던져졌다.
“그러니 나를 원하도록 해. 내게 영혼을 바치고 종속되도록 해.”
그가 풍기는 기운처럼 그 물음은 절대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에게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손이 내 볼에 닿았고 내 가슴에서 강하게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
마왕은 무척이나 놀란 눈이었다. 단순히 놀란 것에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몸에 마기를 피워서 그 빛에 대항하듯 날카롭게 겨누었다. 나는 침을 간신히 삼켰다. 만약 그가 나를 마기로 공격한다면 나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그의 힘이 허약해졌다고 한들 나보다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놀란 눈으로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내 가슴에서 뿜어졌던 빛이 잦아들자 마왕은 제 마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뭔가 묘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내 가슴 부근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의 소환이 어려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왕의 눈이 어둡게 번쩍였다.
“마냥 그대의 능력만은 아닌 모양이군. 가슴에 들어 있는 다른 신성력을 보건대 말이야.”
나는 그제야 내 가슴에 누군가가 신성력을 부어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아론이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마왕은 눈치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성기사인가? 재미있군. 아주 교묘하게 심장에 넣어 두었어. 웬만한 마족이라면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에게 마기를 쓰려 했다가 당했을 거야.”
아론은 누가 공격하면 알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했는데, 실상 그보다도 더욱 의미 있는 힘이었을까? 나는 마왕의 반응을 살폈다.
“뜻밖이라 뒤통수를 맞은 느낌인데.”
마왕은 그렇게 웃는 듯이 말했지만 표정이 좋지 못했다. 나를 현혹하여 가지려고 했던 그의 입장에선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분 나빠하든 말든 나는 그가 매혹으로써 나를 가지려고 했다는 것이 몹시도 불쾌했다.
“바, 방금 제 영혼을 억지로 가지려고 한 거예요?”
나는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이런 건 싫어요! 제 의지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그대의 의지는 무엇이지? 내 소환을 외면하는 것인가?”
“외, 외면?”
나는 움찔했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마왕이 비웃듯이 말했다.
“모른 척하는 건가? 그대의 순진한 표정은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로 뻔뻔하군.”
“윽!”
마왕이 내 몸을 기운으로 붙들었다. 나는 날카롭고 섬뜩한 기운이 온몸을 옥죄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마왕은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암담한 핏빛이었다. 무언가 지극히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처럼 그는 흥분한 상태였다.
“내 소환을 방해한 것 말이야. 얼마나 신성력을 쓴 거지? 그대를 소환하려다가 도리어 내 힘이 반사되어 돌아온 걸 보면 그대 혼자만의 힘은 아닐 텐데 말이야. 그 힘을 얻는 대가가 있었겠지.”
“으읏, 그, 그만…….”
마왕은 내 옷을 산산이 조각냈다. 금세 알몸이 되어 버린 내 몸은 나무의 공격으로 붉은 줄이 곳곳에 가득했다. 마왕은 그런 상처들 사이로 아론이 한참을 탐했던 자국들을 발견해 냈다. 아론은 근래 정사를 나눌 때 내 몸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하얀 살결에 불긋하게 번진 입술 자국은 야릇하기만 했다. 마왕은 그를 확인하고 더욱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내 목덜미, 가슴, 허벅지. 그는 아론이 탐했던 흔적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가며 짓이기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나 그가 대가를 받았군. 온몸으로 말이야.”
마왕은 웃고 있었다. 그것은 온기가 없는 미소였다. 비정하게 쏟아지는 웃음 사이로 나는 살기를 발견하고 흠칫 굳어졌다. 그는 아론에게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쉽군. 그가 여기 있었다면 더욱 재미난 만남이 되었을 텐데.”
재미난 만남이란 피로 얼룩진 싸움을 말할 것이다. 나는 몸을 불안하게 떨었다.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는 소환과 관계가 없어요……!”
“지금 그대의 심장에 숨겨진 힘이 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마왕은 질책하듯이 물었다. 나는 그가 두려웠지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더 무서웠다. 따라서 힘주어 대답했다.
“성기사의 것은 맞지만 그가 소환을 방해했을 리가 없어요. 그는 당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마기로 그려지는 소환 수식을 방해할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