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따라서 그 중요성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한 마왕이 나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서린 눈동자. 사람을 꿰뚫어 보는 그 오싹한 심안에는 기이한 이채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물을 죽여 그대를 살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마왕은 묻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대가 멸종해 가는 나의 족속보다 더욱 중요한 것일까.”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을 하자면 아니오, 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가 질문을 던진 진짜 이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특별한지를 묻고 있었다. 제 종족을 저버릴 만큼 나를 진실로 원하고 있는지를, 제 자신에게 물음으로써.
“…….”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들어 줄 용의가 있다는 눈빛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적당히 상대와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무난하게 관계를 엮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상대는 마왕. 그에게 어떤 것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는 눈을 하면 영혼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영혼. 과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 개인의 정수이자 증표를 왜 마족들은 탐내는 것일까. 그 영혼의 힘이란 게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이기에 그들은, 그는 이토록 탐을 낸단 말인가. 나는 그런 하염없는 생각을 하며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한낱 인간일 뿐인데.”
중얼거린 그의 말은 영혼이란 게 그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마왕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데도 그가 원하는 이유는 그 영혼이 내 것이라는 데 있었다. 말레드레드라는 인간의 것이라는 데.
‘하지만.’
나는 그에 응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는 이미 인간임을 저버릴 수 없다고 결정했다. 나는 나라는 존재를 소중히 했고 아꼈으며 애틋하게 여겼다. 그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내가 어떤 짓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악한 존재라면, 내 감정도 달랐을 것이다. 메마르고 삭막해져 마족처럼 파괴와 죽음을 일삼을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
따라서 나는,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영혼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어찌 그에게 영혼을 바치고 속한단 말인가. 영혼은 반드시 내가 사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상징하고, 나를 나답게 해주는 명백한 증명이었으므로.
“…….”
내가 말이 없자, 그도 말이 없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마왕이 손을 뻗어 왔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내 팔에 머물러 있었다. 곧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쏟아졌다. 마계 식물의 공격으로 뻣뻣해진 손은 그 마기의 도움을 받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의 마기는 신성력을 가진 내게 어떤 고통도 선사하지 않은 채, 내 팔에 있는 나무줄기만을 건드려 사라지게 했다. 팔뚝에 똬리를 틀었던 나무줄기가 하나씩 사라지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고 두려움이 걷혔다. 나는 생사의 길목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처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가 씨앗을 어떻게 할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그의 검은 기운에 씨앗이 완전히 바삭하게 말라 가는 게 보였다. 나는 왠지 뜨끔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흠칫한 눈을 보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나무줄기를 말리면 어차피 고통스러워하다 서서히 죽는다. 오히려 이 편이 회라바라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지.”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가도록 하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가 새삼스레 대단해 보였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마왕의 성으로 이동되었다.
성은 여느 날과 같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싸늘한 느낌이 흘렀고 사나운 바람이 맴돌았다. 나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 처음엔 몰랐다. 그러다 토끼 마족이 나타났을 때 조금씩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마족은 무척이나 걱정된다는 듯이 마왕의 몸 상태에 대해 물었다. 마왕은 대꾸 없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았고 토끼 마족은 곧 죄송하다는 듯이 허리를 숙였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사죄드립니다. 마기가 매우 불안정할 때 나가신 터라 부득이하게 여쭙게 되었습니다.”
마기가 불안정하다. 그 말인즉 마기의 주인인 그의 힘이 불안정하다는 뜻이었다. 내가 마왕의 안색을 다시 한번 살피려 바라보았을 때, 토끼 마족의 눈이 나를 향했다. 토끼 마족은 나를 살피며 긴 귀를 쭈뼛거렸다. 어쩐지 나라는 존재를 데려왔다는 것에 안도한다는 기색이었다.
“빨리 찾으셨군요.”
다행이라는 어조였다. 토끼 마족은 이어서 말했다.
“수하들에게 내린 명을 거두겠습니다.”
토끼 마족은 자연스레 덧붙였다.
“왕께서 명하시자마자 특별한 존재를 찾으라고 군단을 내보냈거든요.”
특별한 존재? 인간인 나를 말하는 걸까? 마왕이 나를 찾아오라고 한 것? 내가 의아해져 있을 때 마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보냈지?”
“천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 종속된 마물까지 합치면 만에 다다르고요.”
“그렇다면.”
마왕은 냉철함이 빛나는 눈으로 명했다.
“돌아오지 말고 일어날 소란에 대비해 성 주변에 대기하도록 한다.”
그의 말에 토끼 마족이 큰 눈을 껌벅거렸다. 걱정이 서린 눈빛이었다.
“소란이라면 마물이 일으키는 소란 말입니까?”
“마물, 마족 할 것 없이 마기가 불안정해지면 폭력적이 되는 건 당연지사. 지금같이 내 힘이 약해진 때에는 큰 힘이 충돌해 마계 전체가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알겠습니다. 나가 있는 수하들 말고도 다른 마족들도 투입해 소란을 진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마왕은 냉정하게 눈을 빛냈다.
“나가 있는 수하들이면 돼. 다른 마족들은 성 주변에 경계를 선다.”
“어째서…….”
질문을 하려던 토끼 마족이 멈칫했다. 그는 마왕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는 이유를 절로 깨달은 모양인지 고개를 까닥였다.
“성을 철저히 지켜야겠지요. 마기가 약해지면 성부터 공격해 오는 정신 나간 녀석들이 있을 테니까요.”
마왕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충신을 바라보았고, 충신인 토끼는 충성스럽게 귀를 까닥거리며 내게 힐끔 눈을 돌렸다.
“음식을 준비할까요? 인간이 기운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 그는 지난번처럼 먹을 것을 가져올지 묻고 있었다. 마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토끼 마족은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토끼 마족이 나가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적막했던 공기가 그제야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동시에 무너지듯이 소파에 앉아 버리는 마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정말 몸이 안 좋군요?”
알아챘다는 듯한 중얼거림에 마왕은 등받이에 깊게 몸을 누이며 나를 바라봤다.
“이제 안 것인가?”
어조는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살짝 울컥했으나 이런 일로 일일이 대꾸를 하기에는 몸이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를 노려보기로 했다. 마왕은 입가를 조금 올렸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피곤해 보였다.
“무리를 좀 했지. 그래서 정신이 없군.”
마왕은 정신이 없다기엔 지나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어쩐지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대도 앉도록 해. 아니면 우리 침대에 누워도 되고.”
“괜찮아요.”
나는 짤막하게 사양했다.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이 따라오자 나는 굳이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솔직히 지금 앉으면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요.”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 한번 다리를 뻗고 누우면 결코 쉬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기절하든지, 아니면 잠이 들든지. 둘 중 하나가 되리란 판단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꼿꼿하게 세우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기력을 잃고 쓰러지면 하루가 지날 거예요. 전 하루 안에는 반드시 돌아가야 하고요.”
“나의 기운을 받으면 생명을 이어 갈 수 있지. 설사 하루 안에 죽는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내 마기를 받아들이면 충분히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어.”
“마기요?”
나는 믿을 수 없는 단어에 콧등을 찡그리고 말았다. 내 거부감을 느꼈는지 마왕은 피식 웃었다.
“그대는 참으로 충실한 사제야. 나를 원하면서도 그대의 몸은 늘 신을 향해 기울어져 있지. 신의 아래, 신의 기운 아래, 그를 따르려고만 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토록 신을 열망하게 만드는 거지? 그 역시 나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나처럼 거대한 힘을 지녔고, 나와 같은 수명을 지녔으니, 그와 내가 다른 것은 없어.”
마왕은 어쩐지 내가 신을 따르는 게 분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나는 그의 불만이 느껴져서 멈칫하고 말았다. 마왕은 차분한 어조로, 그러나 노기를 띤 눈으로 말했다.
“인간들은 그가 고귀하다고 말하지만, 그의 존재는 우리의 입장에선 그저 파괴자일 뿐이야. 악하다는 본성을 자연스레 가지고 태어난 우리를 말살해 버리려고 하니까. 그와 우리의 차이는 속성이 정반대라는 것일 뿐, 다른 어떤 것도 없다.”
마왕은 유창하게 말을 쏟아냈다.
“우리 역시 삶을 갈망하는 생명이며, 우리의 후손으로 하여금 대를 이어 가려는 의지의 집합체이다. 그런 우리가 어째서 본성대로 행한다는 이유만으로 멸망해야 하는가. 죽어 마땅하단 말인가. 어떤 포식자든 자신의 먹이를 먹어 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공포라고 느껴지는 모습도 그 자신에겐 한낱 생명 유지 활동에 불과한 것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