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 그런 이유가 아니야. 아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서…….”
구구절절 아이를 가지는 것이 어떻게 다른 이야기인지, 아이가 생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책임과 제약이 생기는지 설명하려던 나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런 것을 아론에게 설명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가벼운 관계로 시작했다. 동의하고 뛰어든 건 그였다. 가벼운 관계는 그 끝도 가벼우리란 것이란 것을 그가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변심한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곤란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억울했고 화가 치밀었다.
결국 며칠간 쌓였던 불만을 폭발시키듯 소리치고 말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처음과 너무 다르잖아! 네가 이렇게 달라져서 나를 몰아가면 나도 내 입장에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 결국 널 떠날 수밖에……!”
툭툭.
갑자기 밖에서 천막 입구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말레드레드? 카란이 늦는다고 와 보라고 해서요. 괜찮아요? 무슨 고함 소리가 들리던데…….”
나는 서둘러 아론을 밀쳤다. 아론은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나는 얼른 가슴 부근을 추스르고 바지를 올려 입으면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냥 목소리가 좀 안 나와서 소리를 질렀더니……. 아무튼 정화 작업 하는 곳으로 바로 갈게요. 준비 조금만 하면 끝나요!”
“그래요? 그럼 카란에게 곧 올 거라고 말해 놓을게요.”
그리고 바깥은 조용해졌다.
나는 마저 무구를 챙겨 입었다. 발에 장화를 신고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는 동안 아론은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윽고 그를 지나쳐 나가려 하자 아론이 내 팔을 잡아왔다.
“이거 놔.”
나는 그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다 아론의 눈을 보고서 크게 멈칫하고 말았다. 아론의 눈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격정보다 고통이 가득했다. 황금빛 눈동자는 불안함과 공포에 점령당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떠나도 쫓아갈 거예요.”
“……아론.”
“어떤 곳이든, 어떤 시간대이든.”
아론의 목소리는 기억이란 물길을 헤쳐온 것처럼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옛날, 서럽게 맞고 외면당했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처럼, 아니면 고독한 섬에 혼자 남겨져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처럼, 절박한 남자가 되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울보 아론. 그의 별명이 떠올랐다. 여리고 약했던 소년이 그냥 지나치려던 내 발길을 붙잡아 쿠키 하나를 건네게 했던 그날처럼, 그의 슬픈 빛의 순수한 얼굴이 내 마음의 화를 누그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화가 누그러진 자리에 채워지는 감정이란 애틋함이었다. 어릴 적의 추억에서부터 끄집어 낸 공감과 애정이 나를 다독이며 너그러움을 발휘하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설사 과거의 인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강요와 강제는 옳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를 숨막히게 했고, 옴짝달싹도 할 수 없도록 궁지로 몰아갔다. 나는 아론과 쾌락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지 이런 불편하고 답답한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던 게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감정과 생각들로 몸이 비틀거리자 아론이 얼른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그 손을 외면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당분간 혼자 있을 시간을 줘.”
아론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럴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나는 천천히 그가 했던 말을 되짚어 가며 설득했다.
“아까 아론은 감정을 하나하나 쌓아 왔다고 했지? 나는 달라.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규정해 두고 감정을 발산하는 사람이야. 아론이 감정을 쌓아 둔다면 나는 내보내려 하지. 그게 나다움을 유지해 준다고 보니까.”
나는 아론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어떤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 혁혁한 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시큰거려 온다. 그가 내게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순정, 그가 바라는 관계란 내가 결코 쉽게 내어 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가볍고 편한 사이가 좋아. 감정을 되새기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서로 언제든지 안녕하고 헤어질 수 있는 사이. 그것이 내가 바라는 관계의 형태였고, 지속하고 싶은 관계의 깊이였다. 그러나 아론은 정반대의 것을 바라고 있었다. 한쪽이 떠나게 되면 상대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관계. 그리하여 상대가 돌아오지 않을 때 발생하는 깊은 상실감과 허탈감, 애절함으로 일상이 무너지고 평온이 깨지는 그런 사이를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지금 아론의 태도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유지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은 척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와 뜨거운 관계를 이어 갔다.
다른 남자였으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울부짖고 강요해도 모른 척 외면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아론, 너하고도 그러길 바랐으니까…….”
그런 면에서 눈앞의 금발 청년이 진심으로 곤란했고 난감했으며 얄미운 감정까지 들었다. 아론이어서, 다름 아닌 그라서, 이렇게 고민되고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워진 것이다.
나는 아론이 다른 남자와 다르다는 것을 순간 분명히 깨달으며 입술을 다물었다가 벌렸다.
“이런 내가 너를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해. 우리 관계를 다시 정의할 시간이.”
“알겠습니다.”
아론은 마침내 대답했다. 그의 눈길은 내 표정에 진득하게 머물고 있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몰아세웠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말레드레드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도요.”
아론은 미간을 울컥 찌푸렸다. 괴롭고 격노한 듯한 감정이 눈에서 이글거렸다.
“하지만 말레드레드가 제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상상하면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생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서…….”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몸 주변으로 아릿한 살기가 번져 나왔다. 펠을 찾아가서 화풀이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내가 흠칫해서 뒤로 물러서자 아론은 살의를 줄였다. 간신히 감정을 갈무리한 듯 침착해진 그는 여전히 분노가 들끓는 눈으로 말했다.
“……다른 남자가 있었다고 해도 좋아요.”
“…….”
“미친 듯이 화가 나지만 참을게요.”
“아론…….”
“참고 삭힐게요. 하지만 더는 안 돼요. 이 이상은 참아낼 수 없어요.”
아론의 완강히 굳은 표정이 조금 부서졌다.
“저는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니까…….”
“…….”
“말레드레드를 괴롭게 몰아갈 수밖에 없어요.”
아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못내 괴로운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질끈. 어느새 감긴 그의 두 눈은 후회와 자책의 감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마음의 동요를 떨쳐 버린 듯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져 있었다.
“일주일. 말레드레드가 혼자 있을 시간을 줄게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아론은 나를 바라보았다. 단호한 표정과 달리 눈빛은 애정을 갈구하듯 애틋했다.
“말레드레드가 없는 나날을 제가 견디지 못하니까.”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그제야 막혔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일주일. 그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강압적으로 변한 아론과 매일 관계를 가지다 결국 임신하는 것으로 우리 관계는 치닫는 것일까.
‘하지만 마왕은.’
그는 어떻게 하지? 내 영혼을 원한다는 그를 거절하면 그가 순순히 나를 떠날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나를 죽이고 말까? 만약 내가 마왕 손에 죽으면 아론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마 그는 완전히 변모하여 마왕을 죽이겠노라고 마계로 달려올지 모른다.
위대한 성기사와 힘을 잃어 가는 마왕의 싸움. 그 대결의 끝이 어떠할지.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고 말았다.
‘일단 가자.’
지팡이를 들었다. 당장 닥친 일을 해결한 뒤 생각을 이어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정화 작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은 복잡했고 신성력은 느리게 번져 나왔다. 카란이 눈치를 주듯 눈을 흘겼지만 그럼에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아 흰빛이 번번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큰 문제는 없었다. 정화 작업은 마물과 싸우고 난 뒤 대지를 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른바 작전의 보조였는데, 성기사들은 모두 떠나고 난 터라 소환사들만 지루하다는 듯이 지팡이를 땅으로 향한 채 작업을 행하고 있었다.
“갈수록 정화 작업이 지겨워지는군.”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가 무슨 청소부도 아니고, 매번 이 짓거리를 하려니 정말 귀찮아 죽겠어.”
“그에 비해 성기사들은 승리의 명예와 영광은 모조리 차지하고 냉큼 사라져 버리니! 얄미워 죽겠다니까?”
소환사들은 긴장감이 사라진 목소리로 떠들었다. 성기사들이 마물을 죽여 버리고 떠난 터라 목소리를 높여도 듣는 사람은 같은 소환사밖에 없었다. 일의 분배가 최근 극명하게 나눠진 터라 소환사들의 불만은 커진 상태였다.
“들었어? 이번에 들어온 소환사 둘은 아예 결혼해서 무직으로 옮긴다고 하더라고.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이런 허드렛일보다 서류 작업하면서 상부에 잘 보여 승진하는 게 안전은 물론 미래까지 보장되는 일이니까.”
“같은 사제끼리 결혼이라. 어디 괜찮은 상대가 있는지 한번 찾아볼까?”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괜히 눈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한 명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묵묵히 작업을 하는 나를 그가 몇 번 힐끗거리는 것을 느꼈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일을 계속했다. 머릿속에선 아론과 마왕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