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93화 (93/220)

93.

왜인지 섬뜩한 기합이 서려 있는 말이었다. 아론이 빠져나가자 나는 굳은 채로 잠깐 움직이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로 희끗한 액체가 한 줄기 흘러내리자, 그제야 나는 창백한 안색으로 일어나 서둘러 욕조로 들어갔다.

아론은 그날 이후 꼬박꼬박 나를 찾았다. 밤에만 찾은 것도 아니었다. 훈련이 끝나고 잠시 휴식하는 시간에도, 전투에 앞서 갑옷을 재정비할 때도, 아론은 나를 찾아와 정사를 시도했다.

“우읏, 이, 이제 시간이…….”

나는 그가 가장 예민한 부위의 돌기를 핥는 것에 간신히 외쳐야만 했다. 아론의 느리고 뜨거운 혀가 이미 한차례 삽입으로 폭 젖어 버린 음부를 끈질기게 자극하고 있었다.

“가야 하니, 제발 그만, 흣……!”

갑옷을 입은 채였기 때문에 나는 침대 기둥에 의지해야 했다. 기둥을 등지고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면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아론은 내 애절한 탄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내가 절정에 달해 큰 소리를 내지르며 무너질 때까지 애무를 이어갔다.

“하아, 하아…….”

다리 사이로 무언가 넘쳐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그의 정액이 내 배 안에 사정된 터라, 그의 애무에 터져 나온 것은 내 체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액과 체액. 그것들이 섞여 다리 아래로 쏟아지는 것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지금 내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듯 그것은 난잡하게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쾌락의 만족감보다 관계의 씁쓸함이 먼저 나를 뒤덮을 때, 따뜻한 손길이 내 허리춤에 닿았다. 아론이었다.

“씻는 걸 도와줄게요.”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손길은 상냥했다. 요 며칠 그는 계속 이랬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탐하면서 거칠고 난폭하게 관계를 맺었지만, 그 뒤에는 친절하고도 상냥한 마무리가 이어진다. 그의 성품이 원래 어떠한지를 보여 주듯이, 배려 있는 그의 뒤처리를 보면서 나는 완전히 화를 내기에도 애매해진 심정이었다.

나는 수건으로 내 다리를 닦아 주는 그를 보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전투를 앞두고, 쾌락에 신음을 내지르다니. 누가 들으면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떠 보일 터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오늘은 밤새 정화 작업에 투입된다고 했어.”

“…….”

“숙소로 찾아와도 나는 없어.”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나는 충고하고 있었다. 아론이 나를 보았다. 눈빛은 차가웠고 들끓는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늦게 온다고 알고 있죠.”

결국 찾아온다는 말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마왕이 나를 부를 때가 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소환되었을 때 아론이 그것을 목격이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왕과 아론이 부딪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안 돼.’

순간 나도 모르게 공포가 서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론은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빛이 더욱 매몰차게 변했다.

“제가 오지 않기를 바란 건가요?”

아론은 펠을 떠올렸는지 다시금 살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만나려고?”

“그게 아니라,”

나는 서둘러 받아쳤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해. 혼자 온전히 쉴 시간이.”

“그 시간은 나중에 충분히 가지게 될 거예요.”

아론은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길이 내 뺨을 완전히 감싸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왠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아론의 눈빛이, 그의 동작이 심상치가 않다. 질투와 독점욕에 사로잡혀 나를 맹렬하게 바라보는 사내의 전신에서는, 지금은 어떤 말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의지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직은 안 돼요. 제가 안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론.”

나는 참담하게 그를 불렀다. 그는 무척이나 여유가 없어 보였다. 냉기가 철철 흐르는 눈으로 내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그는, 오늘만 해도 내게 작전을 묻는 소환사와 성기사를 훈련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과한 반응이었다. 몇몇은 아론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유명한 성기사가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며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결국 훈련 내내 아론의 불편한 시선을 받으면서 신성력을 뿜어내야 했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감독관에게 몇 번이나 혼나야 했다.

“계속 이럴 순 없어.”

아론의 행동이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었다. 내 일상이 조각나고, 삶의 경로가 흔들리는 것. 애초에 관계를 가질 때부터 내 삶이나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남자를 고르려 신중했었는데, 아론이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그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상부에도 소문이 날 거야. 잘못하다간 황성까지 말이 들어가서…….”

“폐하의 반응이 두려운 것이라면, 저와의 관계를 공표하면 돼요.”

“뭐?”

아론은 태연하게 말했다.

“저와 공식적인 연인임을 선포하면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도 뭐라고 하지 못하실 거예요.”

아론은 이미 생각해 본 것처럼 조리 있게 말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선 친자식이 없으시죠. 따라서 조카인 제가 황태자의 후보에 올라 있어요. 만약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자연스레 승계권이 제게 돌아오는 거예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세요.”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제가 황제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거든요.”

“어, 어떤 점에서?”

나는 혹시 신분 때문인가 생각했다. 아론의 아버지가 노예 출신의 용병이었기 때문에, 아론의 피에는 귀족들이 소위 말하는 천한 피가 흐르는 것이다. 아론은 덤덤하게 말했다.

“잔인함이 부족하다고 하셨어요. 자신의 핏줄이라도 냉정하게 죽일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면서.”

“!”

나는 크게 멈칫했다. 아론의 과거를 알고 있는 황제가 그런 말을 했다니. 아론의 어머니인 황녀는 아론의 할아버지인 선황제의 손에 의해 죽었다.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다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목을 매달게 만든 사람은 선황제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선황제가 아론의 어머니를 바로 처형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건가? 아론이 태어나지 않도록?’

아론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였을까. 나는 가슴이 심하게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고귀하고 위대한 황제는 천출의 조카를 증오하는 것일까. 어쩌면 아론 때문에 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합리적이며 실용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던 황제가 아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심란했다. 그러나 아론은 그런 나를 보면서 오히려 괜찮냐고 물어 왔다.

“난 괜찮아. 너는?”

“저는 괜찮아요.”

아론은 살짝 웃고 있었다. 그것은 비웃음도 두려움의 표현도 아니었다. 아론은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건 따로 있어서요. 어렸을 때 깨달았어요. 수없이 많은 주먹이 날아와도, 며칠을 마물의 마기에 고통받아도, 그 사람만 곁에 있다면 어떤 것도 무섭지 않다는 걸요.”

뺨을 덮은 아론의 손길은 의미심장했다. 내 볼을 보드랍게 감싸면서 내 눈을 들여다보는 사내에게선 짙은 순정과 애정이 느껴졌다. 아론은 그렇게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차갑게 눈빛을 굳혔다.

“그러니까, 다른 자를 허락할 수 없어요. 그 사람 곁에 있는 자는 오로지 저 하나만이어야 해요.”

“황, 황제 폐하 이야기는…….”

나는 말을 돌렸다. 아론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시 말하자면, 황제 폐하께선 제가 성기사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을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신다는 거예요. 대외적으론 황족인 제가 신성국의 성기사가 되어 사악한 무리로부터 제국민을 지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내적으론 조카인 제가 폐하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고 전투에만 몰두한다는 점에서.”

아론은 어느새 내 볼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쓸 만하다고 보고 있다는 거죠. 제가 소환사를 아내로 맞이한다고 하면 놀라긴 해도 분명히 인정해 주실 거예요. 제가 승계권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더욱 증명하는 일이니까요.”

“내가 사생아 출신이라서 안도하신다는 거지?”

“폐하께서는 선황제만큼은 아니어도 귀족은 귀족끼리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어서요. 제가 말레드레드와 인연을 맺는 것을 싫어할 리가 없어요. 황제의 자리를 누구보다도 굳건하게 유지하시는 분이니까.”

아론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 내 가슴 갑옷에 손을 올렸다. 갑옷을 입던 도중 아론이 들이닥쳤고, 곧바로 아래가 벗겨져 애무를 당했다. 아론은 미처 채우지 못한 갑옷의 끈을 손수 엮어 주면서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이야기는 더 쉬워지죠. 폐하께서는 저를 성기사 지위에만 머무르는 황족으로서 토지와 성을 내리실 테니까요.”

나는 임신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안 그래도 요 며칠간 아론과 치열하게 정사를 나눈 터였다. 발라 잎사귀를 챙겨 먹어야 하는데, 기존에 갖고 있던 잎사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새 잎사귀는 전달되지 않았다. 아론이 한 일이란 걸 알았지만 그를 추궁해 봤자 사태만 더 나빠질 거란 생각에, 나는 아론을 은근히 노려보며 말했다.

“아이는 그렇게 쉽게 가지면 안 돼.”

“왜요?”

아론은 도리어 나를 맹렬하게 쳐다보았다.

“말레드레드가 저를 떠나는 것과 달리, 아이는 쉽게 떠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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