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도록.”
“으읏, 아론……!”
그의 몸이 파고들어 와 내 안을 쑤셨다. 배 속이 뜨거웠고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얼마나 거칠게 탐하는지, 그가 한 번 허릿짓을 할 때마다 밑이 빠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흣, 아……!”
나는 아론의 팔을 꽉 쥐었다. 눈앞이 혼미해지면서 전신이 불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안쪽을 강하게 짓누르자 배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성기가 뒤로 빠져나가며 질벽을 긁자 불길이 전신으로 번져 나가며 나를 불태워 갔다.
“아, 아……!”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얼마나 휩싸여 있었을까. 아론의 짙은 눈빛, 어두운 표정, 짐승처럼 움직이는 동작, 모든 것이 하나의 창처럼 엮여 나를 관통했고, 나는 그의 아래에서 벅찬 감정과 정사에 흐느끼며 시달려야 했다.
“…….”
폭풍과 같은 정사가 끝나고 아론은 잠시 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가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고된 섹스로 몸이 지쳤기 때문에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켜 주기만을 기다렸지만, 왜인지 그의 훤칠한 몸은 내 가슴에 얹힌 채로 움직일 줄 몰랐다.
“……아론?”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하도 신음을 내지르고, 애원했던 탓인지 목소리가 긁힌 것처럼 부끄럽게 흘러나왔는데, 그 소리에 아론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
아론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두 눈은 형형했다. 금빛 눈에 들어찬 분노는 여전히 생생하게 타오르는 채였고 나에 대한 감정도 갈무리가 되지 않은 듯 사납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비켜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내가 다시 말하자 그는 나를 어두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읏.”
그가 빠져나가자 아래에서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성기가 거칠게 삽입되었던 흔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픈 것도 아니어서 나는 짧은 신음만을 내뱉고, 가느다란 한숨을 이어 쉬고 있었다. 가만히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론이 갑자기 팔을 뻗었다.
“뭐, 뭐…….”
나는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그의 손이 불쑥 다리 사이로 들어와 민망한 부위로 향하자 당황한 것이다.
“아…….”
곧 은밀한 부위에서 빛이 쏟아졌다. 나는 온기가 내 그곳을 감싸는 기분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신성력을 그곳에다가 써 본 적이 없었다. 내 생애 결코, 그곳에 신성력을 쏟았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왠지 아론을 쳐다볼 수 없었고, 아론이 치료를 마칠 때까지 다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아론은 왠지 딱딱함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내 음부에 닿았던 손가락에는 투명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내가 민망해진 것과 달리 아론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혀로 살짝 핥으면서 나를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관능적이고, 퇴폐적이었다. 방금 정사가 끝났는데, 아론은 여전히 나라는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욕구 불만족인 눈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눈을 깜박이고 뜰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고, 그 사이에 내게 어떤 이야기를 쏟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그것을 고집스럽게 표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아론은 내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뜨겁고 지독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론.”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론에 대해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를 절대적인 존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선망하며 바라볼 때부터, 내가 그를 챙겨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기분이 상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겠지.
나는 그를 찬찬히 응시했다.
“나는 사과하지 않을 거야.”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누구보다 명확하게 그에게 알려 주어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도록, 그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아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나는 큰 결심을 하고선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에 대해서.”
“……!”
아론은 순간 분노한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눈에 휘몰아치는 살기는 굉장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번쩍거리는 흰빛이 보일 정도라서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비릿한 맛이 순간적으로 느껴졌다.
놀란 탓에 내가 내 입술에 상처를 낸 것인데, 아론이 더 크게 움찔했다. 그는 곧 자신의 손을 뻗었다. 눈빛은 부단하게 흔들렸고, 내 입술을 향한 손끝도 마찬가지였다.
흰빛. 눈이 부신 광명. 그 신성한 온기를 여전히 뿜어내는 그는 도리어 고통스러워 보였다. 마치 내 고백이 칼날이라도 된다는 듯이, 상처 입은 표정과 눈빛을 하면서도 정작 내 상처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치료하는 그가 어이없었고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너, 너도.”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가슴이 아려 왔고, 한편으론 그의 행위가 몹시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냉혹하게 나를 내치기라도 하면 나도 냉정하게 그를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어찌도 저렇게 모순적인 걸까.
아니, 좋아한다는 감정에 함몰되어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걸까. 나라는 사람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에 광분해 나를 강압적으로 안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다치자 자신의 신성력을 다급하게 발휘한다.
모두 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나는 왠지 멀쩡한 남자 하나를 망가뜨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사자를 설득해야만 했다.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돼. 그게 우리가 처음에 말했던 관계니까.”
나는 우리가 맨 처음 관계를 가지게 된 이유를 끄집어냈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 말이야.”
“가벼운 관계로 시작했다가 진지한 관계가 될 수도 있잖아요.”
반론하는 아론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무거웠고 살벌했다. 아직도 내 고백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이 형형한 살기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가오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는 침대뿐이었다.
아론은 궁지에 몰린 나를 바라보며 양팔로 나를 가뒀다. 독점과 욕심이 뚝뚝 떨어지는 황금빛 눈동자가 내게 쏟아졌다.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말레드레드를 안았어요. 말레드레드가 당장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를 받아 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론의 손이 내 왼쪽 가슴을 내리눌렀다. 야한 손길은 아니었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내리누르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가쁘게 뛰는 걸 느꼈다.
“생각해보면 말레드레드는 처음과 같았죠. 변함이 없었어요. 늘 저를 좋은 상대, 괜찮은 남자로 보니까요. 저는 거기에 만족했어요.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말레드레드가 제 것이 되리라 생각했거든요. 아주 어리석은 판단이었지만요.”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놀란 것처럼 곤두박질쳤다.
“제가 가진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것이에요. 하나하나, 그 무게며 부피며 아주 짙고 깊어요. 말레드레드가 알면 놀랄 이 감정이 저를 고독 가운데서 견디게 해 주었고 죽음과도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어요.”
아론의 눈빛이 부서지는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늘 조심했어요. 말레드레드가 이 감정을 알고 놀라서 도망가는 일이 없도록요.”
“……아, 아론.”
“모범적인 성기사요? 세기에 추앙받는 신성력이요?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제 감정 하나만으로도 추스르기 벅차서 곤란한 사람이니까요. 오로지 머릿속에서 말레드레드를 어떻게 가질지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격렬한 눈빛이, 뜨거운 표정이, 묵직한 손이 나를 헤집고 있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아론이 아닌, 격렬하고 난폭하고 감정을 다스릴 줄 몰라 하는 한 남자가 되어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제 감정, 제 마음, 오직 말레드레드를 향한 것뿐인데!”
“그, 그만, 아파…….”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론은 심장을 압박하던 것을 관두었다. 어느새 거둬진 그의 손에는 희미한 빛이 맺혀 있었다.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아론은 냉랭하게 설명했다.
“제 신성력을 조금 부어 넣었어요. 이러면 말레드레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알 수 있거든요.”
나는 그제야 아론이 고위 사제들만 할 수 있다는 신성력의 부여를 내게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건 황족에게나 한다는…….”
아론은 놀란 내 반응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자잘하게 다치는 일이 있으니 이런 식으로 신성력을 넣은 것일까? 신성력의 부여를 고위 사제들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소 생소한 기분으로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에서 번지는 온기와 그가 내 살을 문질렀을 때 일어난 열이 합쳐지는 기분이다. 오묘해진 기분과 생경한 느낌에 나는 아론을 보았다. 아론은 천천히 떨어진 옷을 주워, 다 입은 후에 침착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시간 후면 기상 시간이에요.”
“…….”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상관에게 말해 둘게요. 좀 더 쉬도록 해요.”
“아론…….”
나는 그를 불렀다. 그의 파도와도 같은 고백 뒤,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명확하게 해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먼저 말을 가로챘다.
“우리 관계는 여전히 가벼워요. 그리고 저는 그게 바뀔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지만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