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는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건 펠이 남긴 자국이 아니라고, 다른 사내가 남긴 것이라고 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의 화를 더욱 키울 부분이었다. 나는 냉정해지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론은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섬뜩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게 두려움에서인지, 아니면 죄책감에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두 손을 꽉 쥔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펠과 하룻밤을 보냈든, 보내지 않았든,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아론은 멈칫했다. 그는 몸에 걸쳐진 마지막 하의를 벗으려던 찰나였다.
“우, 우린 가벼운 관계니까…….”
그의 어두운 눈길이 내 얼굴에 꽂혔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지도 모른다. 쥐고 있는 주먹 사이로 땀이 흥건해지는 기분, 그의 한기에 내 살갗이 붉게 변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나는 간신히 힘주어 말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툭.
내 말이 끝나자 그의 속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을 덮쳐 왔다.
“읏.”
양손으로 손목을 하나씩 틀어쥐고, 침대로 내리누른다. 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들썩거렸다가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느끼고 저항을 멈추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론은 굳어져서 저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가벼운 관계라. 말레드레드는 정말로 그 말을 좋아하는군요.”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엄동설한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버석거리는 얼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는 배신감으로 말미암은 분노가 차갑게 서려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들었다.
“늘 그 원점으로 회귀하려 해요.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아닌 양.”
순간적으로 아론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부서지는 눈빛에는 고통과 원망이 어려 있었다. 나를 향해서, 제 맘을 왜 몰라 주느냐는 듯이.
“저는 그게 너무도 싫어요.”
아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쳤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강렬하게 시작된 키스는 내 저항에도 끝날 줄 몰랐다. 나는 두 팔과 다리로 한차례 발버둥쳤지만 그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아론의 속도와 기술이 모두 능란했고 그의 힘은 나보다 강했다.
다정하기만 했던 평소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행위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나는 도리질치듯이 저항했지만, 그것마저 오히려 턱을 잡혀서 더욱 깊게 그의 혀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입술을 잔뜩 탐해 놓고선 곧 턱과 목으로 입술을 옮겨 갔다. 그의 입술은 뜨거웠고, 난폭했으며, 사정없이 살결을 빨아들여 가는 곳마다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흐읏! 읏……!”
나는 불에 덴 것 같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아릿함이 몰려왔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는 내 가슴으로 내려가는 그를 보면서 애원하고 말았다.
“흣, 제, 제발, 그만해…….”
“왜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아, 아론…… 아읏!”
그가 내 유두를 힘껏 빨자 아프면서도 짜릿한 느낌이 밀려왔다. 나는 두 팔에 힘을 가득 주고 말았다. 어느새 자유로워진 손목으로 그의 어깨를 꽉 쥐었으나 그는 아픔 따윈 모르겠다는 듯이 내 가슴을 애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으읏, 아…….”
한 마리의 사나운 짐승처럼 그가 내 예민한 부위를 빨아 대자 나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자고 있던 욕망이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난폭하고 험한 동작이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점점 몸이 반응하고 있었고, 눈앞이 흐려지면서 쾌락이 번져 나가고 있던 것이다.
아론은 잠깐 입술을 뗀 채로 말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그만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느릿하게 가슴을 핥았다. 제 흔적을 여기저기에 남겨 두려는 짐승처럼 그의 동작에는 소유욕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왜…….”
아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딘가 상처 입은 듯이 흔들렸다. 비난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나는 간신히 말했다.
“그야, 네가 좋아하지 않으니까.”
“……!”
나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진심을 꺼내 놓았다.
“네가 지금 좋아서 이 행위를 하고 있지 않으니까.”
아론은 멈칫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선명하게 전해지는 분노보다 더욱 크게 다가오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상처 입은 그의 마음이었다. 진득한 슬픔이 가득한 눈동자에는 정말로 이 상황이 괴롭다는 순수한 고통이 비쳤다.
나는 어금니를 콱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관계를 끝맺어야 했다. 아론을 떠나보내야 했다. 아니,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야 했다. 결결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보건대, 그와 관계를 지속하는 건 그에게 더한 고통만을 준다는 것을 명백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론이 나만을 원한다는 것, 그래서 독점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것,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순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며, 두 남자와 관계할 수 있는 음탕한 여자라는 데 있다.
이런 성적 취향을 가진 내가, 그렇다고 한 남자의 마음을 괴롭히면서 관계를 이어갈 만큼 독하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아론을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아론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슬픔을 간직한 채로 그에게 말해야만 했다.
“여기서 나를 맘대로 가져도 좋아.”
이 지고지순한 금빛 눈동자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지끈거려 온다. 알 수 없는 허무함과 허탈감이 헤엄쳐 올라오고 상실감으로 나를 휘감아 고독 속에 던져 넣는다. 나는 벌써 아론이 떠나간 후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론이 안녕을 고하는 순간을 늘 바랐지만, 그날이 다가왔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하지만.”
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하고야 말았다.
“더 이어질 수 없어. 가벼운 관계가 될 수 없으니까.”
“…….”
“그러니까 이만…….”
끝내, 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론이 내 양팔을 거머쥐었다.
“읏, 무, 무슨.”
그렇게 내 팔을 위로 잡아올린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침묵한 채로 엄중한 시선이 쏟아졌다. 굳어진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고, 유리처럼 매끈했다. 틈이나 흠이란 게 존재치 않았다. 온기가 사라진 표정은 차가운 석상 같았고 완벽한 조각상 같았다.
딱딱한 표정을 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싫어요.”
그 한마디. 그 매몰찬 거절 뒤에 그의 다리가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좌우로 벌어지는 허벅지를 느끼면서 당황했다.
“뭐?”
“싫다고 했습니다.”
아론은 분명하게 반복했다. 나는 놀라서 그에게 입술만을 벌렸고, 곧 내 입술을 파고드는 그의 뜨거운 혀를 느꼈다. 그의 혀는 문대고 잡아당기고 빨고, 난잡한 행위를 치밀하게 선사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의 키스에서,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거대한 것이 내 안을 찔러 들어왔을 때였다.
“아!”
내가 고개를 꺾으며 입술을 벌리자, 아론은 더욱 깊게 허리를 내리눌렀다.
“아아……!”
아래를 쑤시고 들어오는 그의 성기가 거대한 파도와 같았고, 뜨거운 열풍과도 같았다. 나는 곧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읏, 읏……!”
애무로 음부가 살짝 젖어 있긴 했으나, 난데없이 들어온 성기는 녹진한 쾌락을 안겨 줄 만큼은 아니었다. 그것은 따가운 쾌감을 연달아 선사했다. 나는 어금니를 물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온몸이 쭉쭉 늘어졌고, 머릿속은 붉은 물이 든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 그의 성기가 더욱 거세게 파고들 때마다 나의 신음도 커져만 갔고, 쾌락도 짙어져 갔다.
“얼마나 싫으냐면.”
아론은 강하게 허릿짓을 하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당장 이 안에 제 아이를 품게 하고 싶을 만큼 싫어요.”
“흣, 아, 아론…….”
“저와 이별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려고요? 펠에게 가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황당해져서 아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궁지에 몰려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박함과 다급함, 초조함으로 점철된 눈빛은 광기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아론은 감정이 배제된 듯한 냉정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발라 잎사귀가 얼마나 가죠? 챙겨 먹었을 텐데.”
“그, 그만, 아론……!”
“일주일인가요? 그럼 일주일 동안 저랑 함께 있어요.”
아론의 차분하고 냉정한 어조가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저를 떠날 수 없도록 만들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