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90화 (90/220)

90.

“이 시간에 말레드레드를요?”

놀란 듯이 되물은 아론이 이번엔 나를 바라봤다. 당혹스러움과 의아함이 가득한 눈동자는 그 말이 맞냐는 듯이 묻고 있었다. 나는 맑고 청명한 금색 눈을 보고 있노라니, 방금까지 펠과 나눴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변명했다.

“아, 전투에서 내가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오셨어. 걱정되셔서 아침까지 못 기다리셨나 봐.”

아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자코 있던 펠이 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가 아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습니다. 그녀가 마족에게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요. 그 사악한 것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남겼을지, 같은 팀원으로서 가만히 좌시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 모든 훈련과 작업이 끝난 시간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펠은 내가 얼버무리자 그를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보다 더 유창하게 아론에게 변명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속이 어쩐지 편치 않았다.

‘마치 네가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 동조해 줄 테니 해 보라는 태도라서…….’

기분이 나쁘다 못해 속이 쓰라리다. 거북하고 메스꺼운 감정이 구역감처럼 확 올라왔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펠이 매끄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제 행동이 지휘관마저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확실히 놀랐습니다. 늦은 시간에 숙소를 방문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동감을 표하는 아론의 어조는 무척이나 낮았고 표정은 좋지 못했다. 나는 아론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상황을 마무리하려 서둘러 말했다.

“이제 가실 거야.”

“네, 안 그래도 가 보려고요. 그녀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까.”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태연하게 동조한 펠은, 문득 의아하다는 듯이 아론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휘관께서는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펠은 정중한 자세로, 어떤 저의도 없다는 듯이 순수한 어조로 묻고 있었다. 나는 지휘관으로서 수하를 보러 온 것이라고 답하려 했지만 아론의 대답이 한층 더 빨랐다.

“말레드레드를 보러 왔습니다. 그녀가 무척 걱정되어서요.”

솔직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대답. 숙소까지 찾아와 일개 사제를 걱정하는 지휘관이 있던가. 동료를 늦은 밤에 찾아오는 성기사만큼 기묘한 일이다. 내가 당황했을 때, 펠이 이채가 감도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어쩐지 두 분 사이가 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방금 전 말레드레드가 지휘관께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고, 지휘관께서 그에 반응하는 걸 보고요. 두 분이 매우 각별한 사이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드는데, 실제로 그러한가요?”

아차 싶었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아론에게 반말을 하고 말다니!

늘 조심했다. 남들 앞에서 우리의 친밀한 사이가 드러나지 않도록. 그건 단순히 우리가 육체적인 관계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넘어서, 아론과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쓸데없는 관심이나 호기심을 물리치려는 의도도 다분했던 것이다.

“그, 그게…….”

나는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고 할까? 만약 꼬치꼬치 물어 오면 어떡하지? 내 과거가 드러나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아론과 나의 관계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건 싫었다.

소문이 퍼지면 불필요한 말들이 양산되고, 어쩌면 상부까지 전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그리고 아주 어쩌면……. 황성에까지 말이 전달되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사생아 출신의 소환사와 황족 출신의 성기사. 이 조합은 공녀 출신의 성기사와 황족 출신의 성기사 조합과 달리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보기엔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편치 않을 것이다. 고귀한 나비의 여정에 끼어든 불나방처럼.

나는 아론의 이모이자, 엄격하다는 황제를 떠올리면서 적당한 변명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어떻게 수습할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으니 아론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절 당황하지 않고 펠에게 대꾸했다.

“왜 묻죠? 말레드레드와 제가 각별한 사이든 아니든, 당신에게 알려 드릴 의무는 조금도 없습니다만.”

거부감이 가득한 단어와 어조에는 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물론 그렇지요. 지휘관께서 답하기 싫으시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순수히 궁금했을 뿐입니다.”

“과한 호기심이군요. 동료라고 하기엔 매우 지나칩니다.”

아론은 분명히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펠은 그 적의에 놀란 것처럼 아론을 바라보았고 왠지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아론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아론이 보인 반응이 편치 않다는 듯이 엄중해진 그는 나를 오히려 더 어둡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이 모든 게 네 탓이라는 듯이 펠이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은 충분히 전달했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눈빛은 매서웠고, 적의는 분명했다.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차,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하고도 언짢은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마음 같아서는 썩 꺼지라고,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나는 고개를 숙였고 펠은 그 인사를 받았다. 그가 내게 고개를 까닥이고 몸을 돌리자, 아론의 시선이 따라온다.

펠은 아론나이드를 향해서는 더욱 깍듯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아론은 평소와 달리 그에게 맞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냉랭한 눈으로 무심하게 쳐다봤을 뿐이다.

펠이 떠나가자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차가운 달빛의 한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기분에 나는 몸을 움츠리면서 아론에게 물었다.

“어떡하지? 펠이…….”

그러자 아론이 기막히다는 듯이 대답해 왔다.

“지금 그를 걱정하는 겁니까? 제게 그걸 물어서요?”

“무, 무슨 말이야.”

네가 아니면 누구에게 묻냐고 되레 황당해져서 반응하자 아론이 화를 억누르는 듯한 음성을 토해 냈다.

“펠 말입니다. 그가 왜 늦은 시간에 말레드레드의 숙소에 있는 겁니까?”

“말했다시피 내가 마족에 당했다는 말을 듣고 걱정되어서…….”

“그렇다면 아침에 올 수도 있었습니다. 동료라면 분명 아침에 왔을 겁니다. 말레드레드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올 리가 없습니다.”

아론은 감정에 복받친 듯이 외쳤다.

“제가 그러하니까요!”

“제,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나는 주변 숙소에 들릴까 쿵쿵 뛰는 가슴을 느끼면서 아론에게 말했지만, 아론은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반응해 왔다.

“그하고의 사이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아무에게도 알려지면 안 되는?”

격한 감정에 금빛 눈과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침착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아론.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나와 펠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거꾸러진다. 펠과 사귄다니. 그런 오해는 아주 잠깐이라도 받기 싫었다. 펠은 나를 공격하려는 사람이지 위해 주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론에게 부드럽게 오해를 풀어 주려고 했다.

“정말 우연히 온 거야. 내가 마족에게 당했다는 말에 놀랐나 봐. 자신도 마족에게 당한 적이 있어서, 내 상태가 더욱 걱정된 거지. 악몽까지 꿀 정도로 말이야.”

악몽의 정도가 심각해서 나를 마족으로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이 주변에 신성력까지 뿌렸다면 아론은 어떤 반응일까.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펠을 조금은 싫어해 주지 않을까.

속마음은 처절하게 위로를 필요로 했다. 나를 의심하고 괴롭히는 펠이 잘못되었다고 함께 외쳐 줄 동료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밤중에 온 거야. 악몽 때문에, 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서.”

진실은 나만이 끌어안을 수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나는 두 팔을 끌어안은 채, 아론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철저히 속이기라도 하자면서.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요?”

아론의 초점은 펠과 나의 사이에만 맞춰져 있었다. 나는 쓰리게 웃고 말았다. 나는 펠이 우리 사이를 천하에 떠벌릴까 걱정인데, 아론은 그런 것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펠과 나의 사이에만 마음이 온통 쏠려 있었다.

“응. 아니야.”

내가 대답한 순간 아론은 안도하는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렁이던 눈동자를 가라앉힌 사내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정말 놀랐습니다. 이 밤중에 말레드레드의 숙소에 남자가 있는 걸 보고서요. 그가 말레드레드를 내내 살펴보면서 반응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끼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서…….”

이제야 제 마음을 착실하게 고백하고 있던 아론이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어루만지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이 멈칫했다.

“왜 그래?”

“여기, 붉은 기가…….”

그의 시선은 내 목 언저리에 닿아 있었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이제야 보인 모양이었다.

“……이건.”

내가 반사적으로 흠칫하며 가렸으나 이미 달빛에 드러난 잇자국을 보고 만 아론이었다. 그의 표정은 창백한 달빛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진정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걸 느꼈다.

“자, 잠깐.”

“그 자국은 뭡니까.”

아론은 다급하게 물었다.

“펠이 남긴 겁니까?”

“아, 아니…….”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 사이가 아닌 게 아니군요…….”

아론은 창백하게 중얼거렸다.

“늦은 시간에 말레드레드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어요…….”

거짓과 부정(不貞), 그것만이 아론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전부인 것 같았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확 변한 그의 모습에 나 역시 눈앞이 깜깜해졌을 때, 무섭게 굳어진 아론이 내 팔을 확 잡아끌었다.

“어, 어디 가?”

나는 그에게 끌려가듯 따라가면서 물었다. 아론은 서늘하게 나를 힐끗 바라봤다.

“보는 눈이 걱정된다면 숙소에서 하는 게 최선이겠지요.”

냉담하게 대꾸하며 그는 숙소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놓고 자신의 갑옷과 옷을 거칠게 벗기 시작했다.

“저, 저기, 아론…….”

무표정으로 옷만 벗고 있는 사내가 왜 이리 무섭게 느껴질까. 평소 다정했던 그라서,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했던 남자라서 지금의 변화가 더욱 참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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