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힘의 소진이라니. 나를 소환하는 일이 그에게 그토록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는 마왕이었다. 지적 수준이 낮은 마물도, 마기가 약한 마족도 아닌데, 인간 하나를 소환하는 것을 벅차 하다니.
내가 의외란 눈을 하며 이성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노라니, 마왕이 짐짓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아읏…….”
“그대는 인간 세계로 돌아가야 돼.”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는 불만스러웠고 악의를 품고 있었다.
“내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마왕은 본심을 토해 놓았다.
“그러니 다음엔 답을 해 주어야 할 거야.”
마왕은 내 목에 자신의 숨결을 덮으며 말했다.
“내 제안에 대한 분명한 답을.”
하지 못한 성교의 불만을 표시하는 것처럼 그는 내 목에 잇자국을 남겼다.
“읏!”
내가 아릿한 통증에 왈칵 인상을 찡그렸을 때,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나는 숙소 침대에 돌아와 있었다. 불쾌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초월자라는 고도의 지성체가 암컷을 탐하는 짐승처럼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겼다는 게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나는 그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소유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성적인 관계로, 유희적인 면만을 탐하는 게 전부다. 그런 부분에서 서로가 종족을 떠나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는 제가 가진 힘과 위압으로 나를 억누르며 자신에게 종속되라고 하다니.
절대적인 악, 지하 세계의 잔혹한 군주. 나는 검은 머리칼의 마왕과 그가 가진 마기를 떠올리자 불쾌감이 공포로 변하는 걸 느꼈다. 그를 거절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관계를 끝내자고 하자 분노해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를 보건대, 이번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끝은 가히 좋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잘게 떨리는 몸을 느꼈다.
왜 유희의 관계가 무관심으로 끝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을까. 왜 마왕이 나를 지루해할 거라고 확신했을까. 그에게 있어 나는 잠깐 놀다 잊어버릴 존재라고, 왜 스스로를 얕보았던 걸까.
내 문제는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에 있었다. 내가 그와 짧은 순간의 쾌락만 즐겨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 후에도 그리워하거나 찾지 않을 여자라고 말이다.
‘지금 아론에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하지만 아론은 어떠하지? 그 역시 나만을 원한다며, 제발 자신만을 원해 달라고 말한다.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외친다. 마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를 지키면서 내게 제 감정을 고백해 온다는 것이다. 간절함과 다정함, 절박함으로 합쳐진 순정을 내보이면서.
‘……어떡하지?’
나는 눈앞이 까매지는 걸 느꼈다. 달콤한 포도를 탐내다가 바닥없는 늪에 빠져 버린 여우 꼴이었다.
여우는 늪 속에 자라는 맛있는 포도가 먹고 싶어서 꾀를 냈다. 늪을 살짝 디뎌서 조금만 먹고 빠져나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늪은 그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조금 내디뎠을 때 살짝 들어가고, 한 발 더 디뎠을 때 더욱 깊게 들어간다. 몇 알 먹고 나면 어느새 무릎까지 빠져 버린 저 자신을 발견한다. 벗어나려고 하지만 더욱 깊게 잠길 뿐,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그렇게, 얕은수를 부리다가 오히려 함정에 빠져 버린 동화책 속의 여우처럼 당황했고 절망했다.
“어떻게 해야 마왕을…….”
내가 곤란한 심정으로 중얼거렸을 때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천막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빠르게 주변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몸을 굳혔다.
‘누굴까?’
사제라면 이 늦은 시간 천막 주위를 저렇게 부산하게 움직일 리 없었다. 설마 마물인가? 기습 공격? 나는 재빨리 무기가 있는 곳을 보았다. 지팡이는 다시 보급받지 못한 상태로, 있는 것은 방어구 뿐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달렸다.
공포와 초조함으로 방어구를 집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방어구를 껴입고 숨을 죽인 채, 닫혀 있던 입구를 살짝 열어 바깥을 살폈다.
역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덩치는 상당했고,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인영에서 길쭉하게 하얀빛이 뿜어지자 눈을 크게 뜨며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펠?”
횃불이 비치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보이는 얼굴은 익숙했다. 남자는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의외란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분노와 황당함으로 날카로워진 어조로 물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제 숙소 주변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죠?”
나는 그가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환사들의 지팡이였다. 왜 성기사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일까. 나는 방금 전 그가 뿜어낸 빛을 떠올리고는 흠칫해서 말했다.
“설마 소환 영역을 그리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경악한 채로 묻자 펠은 무거워진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전 성기사이지 소환사가 아니니까요. 이 지팡이는 신성력을 모으는 데 좋더군요. 대검과 달리 모으는 데만 집중하게 만드니까요.”
펠은 착잡하고 어두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꿈을 꿨습니다. 그대가 가면을 벗자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더군요. 사악한 마족이 되어 사방을 암흑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자연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 끔찍하고 삭막한 세상에 남은 거라곤 소수의 인간과 동물뿐. 신성국이, 세상이 멸망한 것이죠.”
“무, 무슨…….”
나는 기막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말도 안 되는 꿈과 제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요? 지금 당신이 신의 사도로서 예지몽이라도 꾸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엘크리찬의 대사제로?”
“……그럴 리가요.”
펠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 입에서 신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 다시 말하지만 성기사입니다. 성기사 이전에 용병이었고요. 아주 어릴 적부터 검을 들고 우리 부모님의 물건을 빼앗으려는 도적들과 싸워 왔죠. 평생을 누군가와 싸워 투쟁해 온 기사입니다. 그런 제가 믿는 게 있다면 제 감입니다. 상대에 대한 본능적인 감.”
펠은 내가 움찔할 정도로 눈빛을 빛냈다.
“그대는 그런 면에서 아주 좋지 않죠.”
“그, 그때 제가 뿜어낸 기운 때문이라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때 마기를 본 뒤로, 그대를 조용히 지켜봐 왔습니다. 그대에게 뭔가 거슬리는 면이 있어요. 딱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끔찍한 꿈을 꾼 것이겠죠.”
펠은 나를 간파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대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던 심정이 꿈으로 나타난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밤에 여기까지 와야 했습니다. 그대가 진정 정체를 숨긴 마족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했거든요.”
“그게 한밤중에 남의 숙소 주변에서 신성력을 집중하는 이유라고요?”
“그냥 집중한 게 아닙니다. 전 그대의 숙소 주변에 신성력을 흩뿌렸어요. 만약 누군가 마기를 사용하면 그 기운을 흩뜨리게 만드는 아주 신성한 기운을 잔뜩 뿌려두었죠. 그래서 마기를 보충받거나, 마기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그, 그런…….”
“그대가 마족이라면 고통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마왕이 방해꾼이 있다고 한 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누군가 나를 마계에 둘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펠이었다니. 나를 내내 의심해 온 그가, 내 숙소에 신성력을 뿌려서 마계에 있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내가 크게 당황하자 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나를 떠보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럽니까? 무척 당황한 거 같은데.”
“다, 당연히 당황하죠! 이 밤중에 마족이라고 의심 받아서 숙소 주변에 신성력이 깔리는 일을 당했는데 제가 어떻게 평정을 유지하겠어요? 이건 정도를 지나쳤어요! 질 나쁜 괴롭힘이라고요!”
“……사과하겠습니다. 그대의 잠을 깨우고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허나 신성력을 깔았을 뿐, 함정을 설치하거나 무기를 겨눈 건 아닙니다. 애초에 대검은 숙소에 놓고 왔으니까요.”
“이번 일! 상관에게 말하겠어요!”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펠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징계가 내려온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왜 그대에게 이런 일을 했냐는 추궁이 나올 텐데, 모든 일을 말하고 나면 그대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혀, 협박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펠을 쳐다보았다. 그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협박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그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건 마기가 분명하니까요. 제 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 힘은 아주 사악하고 잔혹한 느낌…….”
그때였다. 펠이 멈칫하고 어둠 속을 쳐다본 건.
나는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렸고, 곧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횃불 속에서 진홍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성기사. 아론은 나와 펠을 보고선 크게 몸을 굳혔다.
“……아론나이드?”
펠이 놀랍다는 듯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 아론이 나를 한 번 쳐다보고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펠과 내 사이에 끼어들듯이 선 채로 펠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아론의 표정이 몹시도 차가웠다. 예의 바른 아론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펠은 그런 아론의 반응마저도 반갑다는 듯이 화답했다.
“말레드레드를 만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