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83화 (83/220)

83.

“조심해―!”

쏟아지는 빗소리에 귓속이 멍해지는 순간, 마물을 막아서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론?”

너무나 간절한 순간이었기 때문일까. 빗줄기로 시야를 일그러트리면서, 나를 지켜 주겠다던 그를 떠올리고 만 것은.

“뭐……? 아론나이드를 말하는 거면,”

내 중얼거림에 마물을 막아선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낮고 거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정신 차리고, 뒤로 물러나요!”

“……!”

펠. 같은 팀이었던 성기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마물을 공격할 간격을 확보한 펠은 대검에서 빛을 뿜었고, 마물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신성력이 가득한 대검이 급소를 찌르자, 마물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더니 이내 뒤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쾅.

육중한 마물이 뒤로 넘어가자 땅에 고여 있던 물이 잔뜩 튀어나왔다. 그 탓에 장화와 갑옷, 그리고 얼굴까지 흙탕물이 튀었으나 펠은 닦을 의도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다행이군요.”

그는 무거운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어둠과 습기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오점을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듯이.

“위기 상황에서 부르짖는 이름이 사악한 존재의 것이 아니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곧 그는 몸을 돌렸다. 그의 거침없는 발은 마물에게 고전하는 성기사들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떠나자 그제야 공포에 질려 내쉬지 못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나는 눈꺼풀이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곧 쓰러진 마물 사체에서 진녹색 체액이 짙게 흘러나왔다. 그것은 구불거리는 빗물을 따라서 내 장화 앞까지 흘러왔고, 나는 그것이 내 장화에 닿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마물의 시체나 체액이 닿는 순간부터 모든 것은 부식되고 만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병들듯이 퇴색하면서…….

처참하게 사그라지는 장화의 모습이 마치 나란 존재가 변화해 가는 모습 같아서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소리가 난 쪽에는 두 명의 기사와 함께 달려온 레베카가 있었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워낙 우리 쪽 마물이 세다 보니, 지금 왔네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

“이런, 공포에 몸이 얼어붙어서 안 움직이나 보죠? 제가 도와줄게요. 손을 잡아요.”

그녀는 과장될 정도로 친절한 목소리로 가늘고 어여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검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왔다. 나는 그 상냥한 손을 거절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어요.”

담담하게 대꾸하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자, 레베카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거두어 갔다. 내 거절에 주위에 서 있는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마치, 우리 공녀님의 친절을 거절하다니! 하는 표정 같았다.

그들이 노려보나 불만스러워하나 상관하지 않고 나는 아까 기면서 바닥에 떨어뜨려 버린 지팡이를 찾았다. 지팡이는 완전히 젖어 있었다. 흙탕물이 뚝뚝 떨어지는 지팡이를 털고 있으려니 레베카가 입을 열었다.

“완전 엉망이 됐는데, 물러나서 쉬는 게 좋겠어요.”

레베카는 배려인지 지적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어차피 그 상태론 누구에게도 도움 주기 어려울 테니까.”

“알아서 할게요.”

내 건조한 대꾸에 성기사 하나가 외쳤다.

“무례하군요! 레베카는 그대를 생각해서 말하는데!”

내가 그를 쳐다보자 레베카가 얼른 나섰다.

“아니에요. 제가 주제넘게 걱정이 앞섰던걸요. 소환사분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죠. 모쪼록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레베카는 나를 향해 활짝 웃고는 분노하는 성기사들을 이끌고 돌아섰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에게 시선을 오래 주지 않았다. 아까 구하지 못했던 성기사를 떠올린 것이다.

그는 다행히 치료 사제에게 구출되어 나무 들것에 실려 있었다. 나는 그가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신음을 내뱉던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덥석 쥐어왔다.

“……고, 고맙소.”

그는 마물이 자신을 죽이려던 순간에 내가 신성력으로 옥죄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격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도 억지로 눈가를 휘는 모양이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모, 목숨을 구해 줘서 진심으로…….”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딱히 처절한 정의감을 발휘해 그를 구한 것도 아닌데.

“…….”

나는 뻔한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나는 손끝에서 신성력을 뿜어냈다. 지저분해진 몰골로도 여전히 빛을 뿜을 수 있다. 내 손끝에서 피어난 신성력의 환한 빛무리는 그를 편안하게 치료하는 데 그다지 효과는 없지만 마음의 긴장을 푸는 데는 탁월했다.

더욱 감격하는 그에게 나는 얼른 회복하길 빈다는 말만 남기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다시 싸움터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끝나가고 있었다. 비는 이제 그친 상태였고, 마지막 남은 마물은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칼을 휘둘러 마물의 목을 완전히 동강 냈고, 다른 기사들도 마물의 시체를 가르기 시작했다.

조각조각 나눠진 마물의 몸통은 고깃덩어리에 가까웠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물의 체액이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때 소환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지저분한 몰골로 몇몇 소환사와 성기사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지팡이를 앞으로 뻗었다. 진흙으로 엉망인 내 외양과 달리 손에서는 반짝이는 흰 빛이 신성하게 피어났고, 나는 그것을 마물의 사체에 무차별하게 쏟아 냈다.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진이 빠졌을 때는 정화 작업이 모두 끝나 있었다. 어느새 캄캄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힘겹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씻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

“괜찮나?”

나는 마왕의 방에 누워 있는 채였다. 그는 지난번 일 따윈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옷을 벗기고 나를 침대에 눕혀 내 음부에 커다란 성기를 쑤셨다.

모든 게 일상적인 일처럼 진행되는 가운데, 마왕은 자신의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박혀서 내가 몸을 가늘게 떠는 것을 보고 나서야 멈칫하며 물었다.

“어쩐지 피로해 보이는데.”

때늦은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짧게 대답했다. 마왕은 가늘어진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빠르게, 때론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읏, 아흣……!”

강약이 조절된 그 노련하면서도 달콤한 허릿짓은 내 머릿속의 잡념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나는 그저 쾌락과 신음에 들뜬 한 여인이었고, 욕망의 늪에 빠진 미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얼마나 신음하고 몸을 떨었을까. 그와 정사를 마쳤을 땐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마왕은 자신의 아래에서 몸을 완전히 이완시켜 버린 나를 보며 살짝 눈썹을 올렸다.

“너무 기력이 없는데.”

마왕은 내 한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게 만들었다. 나는 멈칫했지만, 어차피 그를 거부할 힘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힘이라도 나눠 줄까?”

“……마기, 말이에요?”

“그게 내 힘이니까.”

마왕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장난을 하는 건가, 고심했다. 신성력을 발휘하는 사제에게 마기라니, 이게 무슨 천지가 뒤바뀔 제안이란 말인가. 마왕이 자신의 마기를 누군가에게 주는 일이란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고, 마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을 까닥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귀족 같은 옷을 차려 입은 토끼가 나타났다. 마왕은 간단히 지시했다.

“음식. 그녀가 잘 먹었던 거로 가져와.”

토끼 마족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반갑게 웃고는 귀를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저 충성스러운 태도가 나를 더욱 놀라게 한다. 그만큼 마왕에게 복종한다는 것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왕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마왕은 내가 눈으로 무얼 묻는지 알겠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내 마기를 받지 않겠다면, 일반적으로 인간의 기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을 해 줘야겠지.”

한마디로 나를 먹여서 내 힘을 채우겠다는 건가? 나는 황당해져서 마왕을 바라보았다.

“전 괜찮은데요…….”

“보는 내가 괜찮지 않아.”

마왕은 그렇게 말하며 보란 듯이 제 허리를 뒤로 뺐다. 그러자 뜨겁게 욕망을 드러내던 육중한 성기가 몸에서 빠져나간다. 나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고 말았다. 마왕은 내 체액으로 젖어 있는 자신의 성기를 내 가슴 사이에 비비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 녀석도, 괜찮지 않아. 여전히 그대의 안을 쑤시고 싶어 하지.”

“으, 으읏…….”

정액과 체액으로 뒤범벅된 성기가 가슴과 유두에 비벼지자 묘한 자극이 된다.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팔딱거리는 그의 성기가 애무하는 것처럼 내 살결에 마찰되고 있었다. 하얀 정액을 흘리면서 유두를 성기로 건드리는 그의 동작에 나는 허벅지를 조이고 말았다.

마왕이 피식, 웃었다.

“이런 거로 자극되나? 역시 그대는 음탕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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