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왕이시여.”
에레나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흘러나왔다. 마왕이 어떤 각오로 그녀에게 나를 보여 주고 있는지 깨닫고 만 것이다. 마왕은 경고하듯 말했다.
“다음번에도 내 유희를 방해한다면 왕권 찬탈을 각오하도록 해.”
“…….”
“나는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
마왕이 미소를 머금었을 때, 에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가, 다시 마왕을 쳐다보며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침착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에레나는 절제된 투로 대답하고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곤란하다는 표정의 토끼 마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에레나가 이 방 복도까지 온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마왕을 향해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마왕은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고, 토끼 마족이 긴 귀를 흔들며 사라지자 스르륵 문이 닫혔다. 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공포를 느끼는 순간에 흘러나온 애액의 맛은 묘하군.”
마왕은 투명한 물이 묻어 있는 손가락을 보란 듯이 혀로 날름거렸다. 그 태연함과 적나라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잠시, 나는 정신이 어지러웠다. 방금 마왕과 에레나 사이에 오갔던 대화가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서류처럼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바, 방금 그녀가.”
“그대는 신경 쓸 거 없어.”
마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어조로 말을 더듬었다.
“시, 신경 쓰지 말라니요? 그녀는 저를…….”
“죽이려 했지. 최근 그녀가 공격한 지역이 모두 그대가 있는 곳과 가깝다는 건 우연이 아니야. 내 눈을 피해서 그대를 죽이고 평범한 공격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위장하려 했을 테니까.”
마왕은 그녀의 수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의 태연함과 평온함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긴, 그의 입장에선 차기 마왕의 치기 어린 행동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공포에 사로잡힌 나와는 달리.
“어, 언제부터 그녀가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죠?”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거야. 만약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대는 이미 내 곁이 아닌 신의 곁에 있었을 테니까.”
별로 좋지 않은 농담이다. 나는 창백해진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언제나처럼 그의 아래로 오기를 바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에레나의 일로 더욱 마음이 가라앉아 버린 나는 그럴 의향이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내가 파리하게 질린 채 서 있자, 마왕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왜 그러지?”
“아무렇지 않게 당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요.”
“설마 이런 일로 겁을 먹은 건가?”
“그녀는…….”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제 삶을 파괴하려고 했어요. 제 삶의 모든 것을 없애려고 했다고요.”
나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마족이 어떠한 존재인지,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 에레나라는 마족을 보면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데리고 왔던 마물, 그리고 피워 내던 마기가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라. 그곳에는 오염된 땅과 부패한 시체만이 즐비했다.
타오르며 일그러지는 동료의 시신을 볼 때면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씁쓸함과 안도감이 교차했고, 마물이 나를 죽이려던 순간에는 절망과 공포밖에 느끼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마물, 마족, 마왕으로 대변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버겁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마왕과 관계를 이어 간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 육체적인 욕망만을 취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이토록 잔인하고 험악한데,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것만을 쏙 빼먹고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마왕을 향해 열어젖혔던 욕망의 문이 닫히는 걸 느꼈다. 이 관계를 지속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죽어 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나는 모든 게 내 책임이라는, 비참할 정도로 무거운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마왕을 바로 보며 말했다.
“우리의 유희는 서로의 삶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을 때에만 이어 갈 수 있어요.”
“무슨 의미지?”
마왕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에레나라는 마족보다 더욱 차갑고 어둡게 변모한 그를 보고 있노라니 전신에 소름이 돋아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왕은 내게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어.”
“……그, 그만.”
나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공포에 맞서면서 말했다.
“우리 관계를 끝내요.”
파아앗.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주변에서 어둠의 기운이 마치 파도처럼 일어났다. 방 안은 온통 암흑이었고, 위협적인 번개들이 벽에서 번쩍번쩍 빛나며 위압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나는 마기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마왕의 주변에 회오리치고 있는 기운들은 마왕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 주는 듯 두려움을 느끼게 했고 난폭했다.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덜덜 떨었고, 이내 몸을 가눌 수 없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마왕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사라졌다.
“……허약한 사제라지만, 할 말은 기어이 한단 말이야.”
“…….”
“겁에 질린 채로도 나와의 관계를 그만두자는 말을 하다니. 분명 이 관계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그만둘 수 없다고 경고했을 텐데 말이야.”
마왕은 주저앉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순간 흠칫했다. 그의 행동에서 연상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와는 완전히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다정함과 집착을 함께 머금은 금발의 성기사가.
내가 그를 떠올리며 멍해져 있을 때, 마왕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이 작은 머릿속엔 너무 쓸데없는 생각들이 꽉 차 있어.”
“……저, 절 죽일 거예요?”
나는 예전에 그가 자신의 수하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내 머릿속을 휘저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나를 미치게 만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할 수도 있었고, 나를 단번에 죽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다.
마왕은 내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내가 그대를 죽여서 얻는 게 뭐가 있지? 몸을 섞던 사제 하나를 해치웠다는 만족감에 희열이라도 느낀다는 건가? 아니면, 내 적수를 비웃고 그 파생물을 능욕했다는 것에서 내 존재의 위대함을 상기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마왕은 꾹꾹 누르다시피 내 얼굴을 매만졌다. 마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내 얼굴 근육이 어떠한지 샅샅이 보려는 사람처럼 내 얼굴을 더듬어 가면서, 마왕은 붉은 눈을 빛냈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는 생각이 너무 많아. 욕망에 약한 인간치고 너무나 심오하게 생각하고 또 고민하지. 차라리 어리석었다면 내가 주는 쾌락에 고민 없이 빠져들었을 텐데…….”
“놔, 놔줘요…….”
나는 그의 난폭한 손길에 두려움을 느꼈다. 내 애원에도 마왕은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먹잇감을 잡은 것처럼 내 목을 쥐고서 말했다.
“그래서 화가 나. 그대가 떠나려는 걸 죽여서라도 막고 싶을 만큼.”
“윽…….”
나는 조여 오는 악력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신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뿌옇게 시야가 변하는 걸 느꼈을 때, 거짓말처럼 목을 쥐었던 손이 풀어지고 마왕은 어느새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아.”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두 손으로 목을 더듬자 그의 손이 닿았던 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마왕은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오늘은 그대 말대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마왕의 목소리는 언제 잔혹함을 드러냈냐는 듯이 침착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거칠어진 심경을 반영하는 것처럼 광포하게 휘날렸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
마왕은 손을 휘저었다. 관계의 끝이란 없다는 듯이. 나는 나에게 밀려오는 마기를 보면서 절망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 * *
“말레드레드, 괜찮아요? 힘이 없어 보이는데.”
훈련 중, 내 옆을 지나치던 레너드는 내 얼굴을 보며 기어이 이렇게 묻고 말았다. 오랜만에 본 그는 기력이 많이 빠진 얼굴이었다.
“고위 마족이 나타나면서 본대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훈련 시간도 길어지고, 강도도 세진데다 작전도 어려워지고. 고위 마족을 상대하려면 수도의 나이트들처럼 훈련해야 한다고 그러네요.”
서글픈 표정으로 시름을 고백한 레너드는 이내 나를 보면서 목소리를 죽였다.
“소환사들도 그렇죠? 보니까 같은 팀이었던 분들도 신성력 응용을 연습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해요. 마족들은 소환사들을 먼저 공격하니까 방어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고요.”
한마디로 본대 전체가 강한 마족을 대비하는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냐고 대답하면서 땀에 젖은 장갑을 손에서 빼냈다. 신성력을 모으면서 평소보다 배로 긴장했는지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카란에게 가기 전에 씻자고 생각하며 떠드는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아, 이럴 때 아론나이드라도 있으면 좀 안심이 될 텐데. 그분은 언제쯤 돌아오실까.”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듯한 어조로 말한 그는 이내 나를 보며 멈칫했다.
“그런데 왜 스카프를 했어요? 답답해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