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78화 (78/220)

78.

나는 나를 휩쓸듯이 덮쳐 오는 금빛의 남자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하루, 나는 아론의 숙소에서 휴식과 애욕이 교묘하게 섞인 시간을 보냈다. 아론은 나를 침대에 붙잡아 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엉킨 근육을 풀어 준다는 이유로 시작된 마사지는 야릇하게 변질되어 어느새 나신으로 그의 몸 전체가 주는 음탕한 압력을 받아들여야 했다.

뜨겁게 입술을 부딪치고, 몸을 비비고, 나와 교합하고. 이런 욕정 가득한 시간 뒤엔 아론이 점심을 가져왔고, 우리는 침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양이가 엉켜 들듯이 육체관계에 전념했다.

벌써 세 번째 섹스였을까. 해가 떨어질 무렵의 교합은 아주 나른하고 느릿했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뜨겁게 몸을 탐하는 동작은 해 질 녘의 석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련함이 있었고 충만한 정을 느끼게 했다.

아론은 나를 절정에 이르게 한 뒤, 그 자신도 사정했는데, 그런 뒤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이런 말을 해 왔다.

“너무 좋아요, 이런 시간이 그냥 너무 다.”

터져 나오듯 흘러나온 아론의 감탄사는 평범했지만 그 단순함이 내 마음의 빗장을 쉽게 풀어 버리고 깊게 찔러 들어왔다.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사내를 보며 가슴이 뭉클해져서 입술을 부딪쳤고 속닥거렸다.

“아무도 우릴 찾지 않아서 좋아.”

“제가 숙소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쉬고 싶다고.”

아론은 내 손을 끌어다가 부드럽게 입술을 내리누르며 달콤하게 말했다.

“앞으론 말레드레드가 좋다면 이곳에서 만나도 돼요. 전 어디든 상관없으니까요.”

“설사 그곳이 마계라도 말이야?”

우연히 사제들의 최악의 장소를 떠올려 말한 것인데, 아론은 웃는 표정과는 달리 눈을 진지하게 빛내 왔다.

“설사 마계라 할지라도.”

아론은 내 귓가에서 다소곳하게 속삭였다.

“말레드레드가 있다면.”

아론의 말은 열정과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든 함께 있겠어요.”

나는 그를 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금빛의 성기사, 순백의 지휘관. 어릴 적의 소꿉친구. 다채로운 말로 정의되는 그가 얼마나 일관적인 사내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떤 고난이 있어도 늘 내 뒤를 따라왔던 어린 시절처럼, 지금도 그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며 나를 열정적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바보네. 위험한 곳은 따라오지 말아야지.”

나는 그를 보면서 짙은 향수를 느꼈고, 나만을 원한다는 그의 항구적인 태도에 우월감을 맛봤으며 나를 맹목적으로 원하는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복잡한 마음 때문에 대꾸가 조금 투명하게 나왔는지 모른다.

아론은 나의 이런 까칠한 반응에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바보 맞아요. 머리란 걸 쓰지 않으니까요.”

“그,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하지만 말레드레드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곁에 있어야겠다는 마음만 앞서는걸요. 그래서 말레드레드가 원치 않는, 독선을 부릴 때도 있고요.”

아론은 내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리해 주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토록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아론.”

“이런 저를 말레드레드가 싫어하면 어쩌나 늘 걱정하는, 미성숙한 남자일 뿐이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 내가 더욱 불완전했고, 모순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나는 아론의 순정과 열정을 알면서도 그가 주는 육체적인 쾌락을 거절하지 않았고, 마왕이 내게 유희를 넘어선 욕망을 부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지 않았다.

두 남자의 남다른 마음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은 건 그들이 강한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절에는 늘 위험이 따라온다는 것을 다 자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아론, 알다시피 나는 너를…….”

어느새 내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좋아해. 하지만 너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야. 너와 하는 육체적인 관계가 좋아서 함께했지만, 네가 그 이상을 바라면 어떻게야 해야 하나 고민돼. 왜냐하면 내가…….”

나는 기어이 말하고 말았다.

“네게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느낌이니까.”

“아니에요, 말레드레드.”

아론은 내 주먹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체온은 뜨거웠고 눈빛은 강력했다.

“이건 나쁜 짓이 아니에요. 그저 좋아서 둘이 함께하고 있는걸요. 말레드레드가 앞으로도 절 원한다고 한다면, 전 이 관계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내 말에 아론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슬픔과 분노가 엇갈리는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내 손 위에 덮어진 그의 손을 차마 치우지 못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감히 상상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진다는 듯이 심각해진 그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우리의 관계가 이보다 더 무거워지기 전에 무언가 언질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 나는 네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질 수 있어, 그게 가벼운 관계니까. 네가 아니어도…….”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천막 밖에서 큰 소리를 아론을 불러왔다.

“아론나이드, 자네 있나?”

본대 대장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고, 아론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본 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데. 나와서 말할 수 있나? 급한 일이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론은 우선 내게 비단 천을 끌어다가 덮어 주었다. 그리고 서둘러 가볍게 윗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가 맨몸에 옷을 껴입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단 속으로 몸을 숨겼고, 살짝 벌어진 틈으로 아론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대화는 두꺼운 천막 탓에 잘 들려오지 않았다. 대충 들리는 단어를 취합해 보면, 황성, 연락, 마족, 습격 이런 단어들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론의 대답이 들리고, 그는 머지않아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가 갑옷과 무구를 챙기는 것을 보면서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황성에서 긴급한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마족이 마물과 함께 수도 근처를 습격한 모양인데, 건건 풀을 가지고 지원해 주기를 바라더군요.”

“우리 본대에서 수도를 지원해 주길 바란다고?”

아론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뇨. 정확히 저만 지원 오길 바란다더군요.”

“아.”

나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황성에서 아론이 지휘한 작전을 통해 마물과 마족을 소탕한 것을 좋게 보고 있는 것이다.

수도를 방어하는 사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만큼, 수도에서 본대의 지원을 요청한 일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론에게만 요청한 것을 보면 그가 남다른 성기사라서 그럴 것이다. 나는 용기를 주듯 말했다.

“네가 가면 든든하다고 느낄 거야.”

내 말에 아론은 묘하다는 듯이 눈썹을 굳혔다. 하지만 곧 나를 향해서 다정한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조심히 다녀와.”

“금방 올게요.”

마치 근교 여행을 떠날 것처럼 말하는 아론에게 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도면 꽤 먼데.”

“황성에서 가장 빠른 말을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갑옷을 다 차려입고 내 앞에 섰다. 어느새 빛나는 갑옷을 차려입은 사내는 두말할 것도 없이 휘황찬란한 신의 전사다웠다.

“얼른 다녀올 테니.”

아론은 내 눈을 뚫어져라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남자는 안 돼요.”

“뭐…….”

“아까 하려던 말이요. 그 말 뒤에 이어질 문장이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론은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치 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엄숙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애절하고도 짙은 목소리를 쏟아 냈다.

“절 기다려 주세요. 다른 남자에게 가지 말고요.”

“……아, 아론.”

“저만으로도 충분하다 느끼실 겁니다.”

“그게 아니라……. 아.”

나는 그대로 아론이 내 몸 위로 올라오자 멈칫하고 말았다. 애절함의 표상인 아론은 누구보다도 뜨거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 겁화처럼 타오르는 불이 나를 삼키고 나의 망설임과 모호함까지 불태우며 내 신념까지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었다.

“제발, 말레드레드.”

그는 내 입술에 낙인을 찍듯 키스하기 전에 간절하게 속삭였다.

“저만을 원해 주세요.”

입술이 어떻게 덮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남은 건 열기와 목소리. 그리고 강한 독점욕이 담긴 말뿐이었다.

아론이 그렇게 바랐지만, 사실 마계로 가는 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론이 두 명의 수하만을 데리고 본대를 떠났을 때, 나는 내 숙소에 돌아와 잘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덧 그의 침실이 보였고 보랏빛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용암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기이한 나라. 마계라 일컬어지는 이 생소한 세계에서 마왕이라 칭해지는 남자는 침착했으며, 이성적이고 냉정했다. 날뛰거나 흥분해서 인간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다. 그저 수하들을 조종하고, 마물들을 공급해서 인간계를 점령하라고 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둥근 거울로 수하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으면서 죄책감과 불안감에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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