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77화 (77/220)

77.

아론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눈빛은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카란이 말레드레드를 찾아서요. 그가 바쁘다 보니 제가 말을 전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순간이지만 아론의 눈빛에 파도 같은 질투가 역력하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아! 그렇군요.”

라드가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돌아보고는 씁쓸함이 가득 묻어 있는 어조로 인사했다.

“가 보셔야겠네요.”

그는 눈을 빛내며 마음을 전했다.

“제가 수도로 가면 편지를 보내도 될는지, 답장을 기대해도 되는지 모르겠…….”

“말레드레드, 가 봐야 합니다.”

아론이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자 라드는 멈칫하며 아론을 쳐다보았다. ‘작별의 말조차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긴급 상황인가?’ 싶었던 라드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가 아론의 차가운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어서요.”

나는 아론이 다시 재촉해 오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뒤따랐다. 라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인사하자 라드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온다.

나는 그의 당혹스러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고 소문난 지휘관 아론이 자신을 냉대했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과연 느꼈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아론을 따라 걷던 나는 금세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론, 걸음이 너무 빨라.”

내 말에 훤칠한 등이 멈칫했다. 돌아보는 미남자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로 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누구에게서? 라드에게서?”

아론의 눈이 나를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그는 다른 의미로 라드를 정의했다.

“말레드레드를 원하고 있는 남자에게서요.”

그의 금빛 눈동자엔 선명한 적의가 넘실거렸다. 차가운 불처럼 굳어 버린 눈동자에는 거부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라드를 향한 적의였고 반감이었다. 단순히 경계하는 눈동자라고 보기엔 그 깊이나 무게가 남달랐기 때문에 나는 그에 놀라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론은 내가 흠칫한 것을 느꼈는지 금세 표정을 풀고 가까워져 왔다.

내가 멀어지는 것이 싫다는 듯이 살짝 처연한 표정으로 다가온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가 말레드레드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론은 숨죽였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척이나 거슬려요. 기분이 어그러질 만큼이요.”

“나 인기 많은데.”

나는 웃으며 삭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했다.

“그런 남자들에게 어떻게 일일이 반응하려고.”

“그러게 말입니다.”

아론은 웃으며 대답했지만 눈빛만은 혁혁했다. 마치 그런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하나씩 모두 반응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갑자기 잊고 있던 걱정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번쩍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마왕과의 관계를 알게 되면 아론은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사악하고도 강력한 존재라고 알려진 마왕과 내가 적나라한 관계임을 눈치채면 아론은 지금처럼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라드가 소박하게 마음을 표현한 것만으로도 얼굴을 굳힌 그였는데, 만약 마왕과 내가 훨씬 긴밀한 관계라는 말을 한다면…….

“말레드레드, 괜찮아요?”

내 낯빛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는지, 아론이 얼른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으응, 카란에게 얼른 가자.”

“아아, 그게 말이죠.”

아론은 살짝 멋쩍다는 듯이 고백했다.

“말레드레드를 데려갈 변명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요.”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아론의 솔직함이 귀엽다고 느껴진 나는 일부러 추궁하듯이 묻고 말았다.

“그럼 거짓말이란 거야? 그러다가 라드가 카란에게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잘못 알았다고 하면 되지요. 문제없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 왔다. 나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얼떨결에 잡고 말았다.

“나 오늘 쉬기로 해서, 훈련소로 가면 안 돼.”

내가 말하자, 아론은 다시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가는 것에 내가 당황하자 아론이 걱정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감독관한테 들었어요. 그래서 숙소로 찾아간 거고요.”

아론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의 철두철미함에 놀라면서도 걱정스러워져 묻고 말았다.

“설마 내 일정을 모두 물어보고 다니는 건 아니지?”

“노골적으로 물으면 티가 나니까.”

아론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작전을 위해 팀을 짜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며 묻고 다녀요. 그러면 다들 더 묻지 않고 말레드레드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요.”

“…….”

결국 내 위치를 묻고 다닌다는 말이다. 그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늘 살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하는 황망한 생각이 들어 훈계하듯이 말했다.

“아론, 지휘관이 되어서 할 일도 많을 텐데 나한테 너무…….”

“그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어요. 결국 말레드레드와 함께 있으려고 싸우는 거니까요.”

싱긋 웃으며 답하는 남자에게 빈틈이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내게 오감이 집중된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를 맞닥뜨린 것처럼 허탈과 경악에 차서 그를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이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단단한 팔과 그 위로 보이는 어깨, 목덜미, 눈빛. 그리고 그의 표정들. 아론이 전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선명했고 분명했으며 나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날아왔다.

너만을 원한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그런 순백의 티끌 없는 순정. 이런 감정을 목도했는데, 어찌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의 벽이,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각오는 이미 느슨해진 터였고, 그 느슨해진 틈을 타서 내 마음의 단단한 장벽을 깨고 그라는 존재가 향긋한 봄바람처럼 휘돌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상상 이상으로 그에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앞에 서면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었기 때문에, 나는 침착하게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고백하고 말았다.

“아까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너를 봤어. 기사들이 네 옆에 붙어서…….”

“아. 검술 지도를 해 달라고 하도 요청해서요.”

아론은 뭘 말하는지 알겠다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거절하면 숙소까지 찾아오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알려 주게 되었어요.”

“너와 친해 보이던데. 갈색 금발에…….”

“레베카요? 그녀는 같은 성기사일 뿐이죠.”

아론은 군더더기 없이 딱 잘라 말하고는 나를 보았다. 나는 조금 움찔했다. 아론의 눈빛이 왠지 의아할 정도로 묘한 빛을 띤 것이다.

“혹시 그 점이 신경 쓰였던 거예요?”

“……아니. 좋아 보여서 그런 것뿐이야.”

나는 왜인지 변명하고 말았다. 아론은 나를 잠깐 빤히 보고는 곧 스스럼없이 말했다.

“요즘 그런 일이 잦아요. 솔직히 귀찮을 정도로요. 제가 남을 가르치는 데 적합한 기사는 아닌데 말이죠.”

“네가 남을 가르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대꾸하자 아론이 살짝 눈을 휘었다. 내 표정이 귀여웠는지 그는 크게 벌어졌을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적합하지 않아요. 전 본능대로 검을 휘두르는 성격이라서요. 작전과 달리 검술에선 머리란 걸 쓰지 않죠.”

“네가 머리를 쓰지 않는다고?”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는지 아론은 더욱 짙게 눈꼬리를 휘어 반응해 왔다. 그가 재미있어하든 말든,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닥치는 대로, 나 몰라라 검아 휘둘려라, 하고 싸우고 있다는 거야?”

“역시 말레드레드는 표현을 정확하게 하네요.”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아론을 보자 나는 왠지 그가 얄미워졌다.

“장난치지 말고, 아론.”

“장난이 아니고 정말이에요.”

아론은 이번엔 내 귀를 쓰다듬었다. 내 귓바퀴를 천천히 쓸며 귓불까지 천천히 매만지는 그의 눈빛에선 선명한 다정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론은 상냥한 바람처럼 따뜻한 애정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전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자예요. 말레드레드에게 가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둘러 온 평범한 남자라고요. 그런 저에게 체계가 어디 있겠고, 논리가 어디 있겠어요?”

아론은 어느새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도 둘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제게 유일한 검술이 있다면, ‘말레드레드를 지키는 검술’일 거예요. 이름을 굳이 명명하고자 한다면요.”

어느새 손길은 내 목에 와 닿아 있었다. 이 순간, 나는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의도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내 입술과 내 숨결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저는 남을 가르치는 데 적합하지 않아요. 오로지 말레드레드를 지키는 데에만 적합한 남자일 뿐.”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항거할 수 없이.

“……그, 그만.”

한적한 길이었지만 본대 내였고, 사제가 지나갈 수도 있었다.

나는 간신히 아론을 밀쳐 냈다. 아론은 여전히 욕망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뜨겁게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타액으로 미끈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선 안 돼. 누,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제 숙소로 가죠.”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이럴 작정이었다는 듯이 우리가 가고 있는 길도 그의 숙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의 숙소는…….”

그의 예전 숙소를 떠올리고 거부하려 했지만 아론의 말이 더 빨랐다.

“지휘관이 되면서 숙소가 옮겨졌어요. 전 다른 숙소와는 멀리 떨어진 곳을 골랐고요.”

아론은 내 손을 꽉 쥐어 왔다. 그의 눈길은 욕망과 순정이 각각 요란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제 숙소에서 푹 쉬어요, 말레드레드.”

아론은 나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저랑 단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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