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여인이 그렇게 살벌하게 경고하고는 훌쩍 뛰어올랐다. 아론은 ‘달아나지 못하게 공격하세요!’라고 외쳤지만 여인은 쏟아지는 신성력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동족의 마기를 얻어서 조금 활력을 되찾은 것인지, 그녀는 하늘에 난 구멍에 바짝 다가간 뒤 잠깐 내 쪽을 쳐다보고는 그 차원의 문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하늘의 구멍도 사라졌다. 애초에 그녀가 만들었던 것인 만큼, 그녀를 통과하자 바로 소멸된 듯싶었다. 다시 멀쩡해진 하늘을 보면서 아론의 곁에 서 있는 기사단장이 중얼거렸다.
“잡았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어조에는 강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투구 속의 눈동자가 잠깐 하늘을 향했다가 아론에게 돌아갔다.
“오늘 전투 말이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응……?”
하지만 아론은 그의 곁에 없었다.
“……!”
기사단장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론은 어느새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주위의 기사들과 소환사들이 쳐다보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짧고 흐릿한 내 인사에 아론은 고개를 수그려 눈을 맞췄다. 그 눈빛에는 강렬하면서도 다정한 정이 있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기색이 완연해서 나는 조금 울컥하고 말았다.
수많은 기사가 쓰러져 있었지만 아론은 나를 부축했고, 치료하는 사제에게 직접 데려다주었다. 시선들이 몰리는 것을 느꼈지만 당장은 나를 보좌해 주는 그의 체온이 너무도 편안해서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아론은 다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마무리 작업을 지휘했다. 몰려든 마물이 많았기에 처리할 사체도 많았고 망가지거나 부서진 건물도 복구해야 했다.
아론은 늦은 밤까지 그 처리에 몰두했고,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떠서야 내가 있는 치료소로 올 수 있었다.
“아론나이드!”
“와아!”
치료소에 있는 사람들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전투에서의 경험과 감정, 공포와 절망들을 공유하며 이야기하기 바빴는데, 그때 갑자기 나타난 젊은 지휘관을 보면서 다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론은 그들에게 훌륭히 싸웠으며 고생 많았다고 격려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친 자들은 그런 아론나이드에게 열광했다. 비록 늦은 밤에, 잠든 자들이 많아서 시끄럽게 환호하진 않았지만 아론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론나이드,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
나는 그중에서 유독 아론의 곁에 가깝게 붙은 여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갈색빛이 감도는 금발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곱상한 외양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녀의 사랑스럽고 애절한 어조에서 아론을 얼마나 숭상하고 애정하는지 깨닫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아론에게 가깝게 붙어 조잘거리자 왜인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쥔 채로 그녀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아론나이드 경이 있어서 이번 전투도 무섭지 않았어요. 승리가 우리의 것임을 예감했고요. 아론나이드만 있으면 늘 마음이 든든해져요.”
“과찬입니다.”
아론은 간략하게 대꾸하며 나를 보았다. 순간적으로 우리 둘의 시선이 부딪쳤으나 그런 우리 둘의 시야를 막은 금발의 여인이 아론에게 말했다.
“나중에 제게도 마족을 상대했던 검술을 알려 주세요. 꼭 배우고 싶어요.”
“훈련은 상처가 호전된 뒤에 진행할 겁니다.”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릴게요.”
보이진 않았지만 여인은 아론에게 환한 미소를 지은 모양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 감탄해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아론의 시선은 그 와중에도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찰나였지만 그녀는 아론의 시선이 다른 곳에 있음을 놓치지 않았고, 잠깐이지만 내 쪽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저번에 마차에서 보았던…….’
나는 그녀의 냉랭한 눈빛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멈칫했을 때, 아론은 곧 그녀에게 작별의 말을 건넸다.
“그럼 다친 분들을 마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아, 네에.”
그녀는 아론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아쉽다는 어조였다. 그녀는 아론이 가는 방향을 끈질기게 쳐다보았고 그가 병자들과 대화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나는 그녀와 또 시선이 마주칠까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치료소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말레드레드.”
달밤,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환한 빛 하나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머지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아론이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서야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이지 않아서 잠깐이나마 걱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마무리 작업이 잘 끝났는지 물었다.
“마물의 시체는 모두 소거되었고, 땅의 정화 작업도 끝났습니다. 부서진 건물은 앞으로 복구가 차차 될 것이고요. 피해가 크지 않아서, 금세 원상태로 돌아갈 거라 봅니다.”
“네가 잘 지휘한 덕분이지.”
내 칭찬에 아론은 고개를 저었다.
“사제들이 모두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대규모 전투인데도 다들 크게 겁먹지 않고 따라와 준 것이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마족과의 전투를 앞두고선 다들 긴장하기 마련이다. 경험이 부족한 사제들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고, 경험이 많은 자들은 공포를 떠올리며 지나치게 흥분했다. 마물이 많은, 대규모 싸움일수록 그런 양상은 더 심했는데, 이번 싸움은 그런 아군이 일사불란하게 전략대로 움직여 아군의 피해가 줄어들고 적군의 피해가 커진 경우였다.
나는 그 원인을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강하니까. 다들 네 실력을 믿고 따라온 것 같아.”
나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다. 아론은 나를 보았고, 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나도 그러니까. 네가 강해서 정말 안심돼.”
“그렇습니까? 그런 이유라면, 강하다는 칭찬은 기꺼이 받아들여야겠군요.”
아론은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쁘게 웃는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우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아름답고 금욕적인 미남이 청아한 달빛의 우아한 색을 받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화사해 보인다.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정말 신의 현신 같아.”
내 말에 아론은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내 노골적인 칭찬이 퍽 나쁘지 않다는 듯이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마족과 싸울 때, 신께 힘을 달라고 하긴 했습니다. 절대 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을요.”
날 보는 아론의 눈길은 뜨거웠다. 언제나처럼, 애절함과 강렬함을 품은 채로.
“말레드레드를 지킬 수 있도록.”
“그럼 이번 승리는 나 때문이네. 나 때문에 네가 힘낸 거니까.”
나는 일부러 새침하게 말을 받았다. 웃자고 한 말인데, 아론은 어이없게도 더 진지하게 나왔다.
“정확해요. 이번 승리는 모두 말레드레드 덕분이죠.”
누군가 그를 본다면 나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디서 이런 바보처럼 나만 바라보는 남자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내 위주로 생각하니까. 나는 약간 발그레해진 볼을 느끼면서 ‘그렇게 말해 주니까 내가 오만해지잖아.’라고 했고, 아론은 ‘오만하게 저만 바라봐 주세요.’라고 답해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를 사랑스럽게 보는 그의 눈빛이, 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나를 덮쳐 쓰러뜨릴 듯해서 나는 다른 화제를 꺼내야 했다.
“강력한 마족과 싸워서 이긴 기분이 어때?”
아론은 멈칫했다. 눈빛이 아주 신중해져 있었다.
“이겼다고 보긴 애매합니다. 그녀가 그물에 걸려서 상대가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아마 그것이 없었다면 이처럼 쉽게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론은 잠깐 고민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제가 보았던 마계인 중 가장 강한 개체가 아닌가 합니다. 마왕 다음으로 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래?”
나는 조금 떨렸다. 실제로 그녀는 다음 대 마왕 후보자였으니까. 마왕의 측근이자 강력한 마왕 후보. 나는 그녀의 적의 서린 눈빛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는 두려워진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론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마기를 뿜어내는 속도나 그 양, 무게, 응용력까지. 모든 게 고위 마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그녀가 마계에서 높은 지위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에레나.”
“네?”
“날개 달린 마족이 그녀를 에레나라고 불렀어.”
내 정정에 아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다른 마족이 외치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론에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더 구체적으로 말하진 못했지만, 이런 경고는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강한 마족이야. 마물을 지휘하는. 우리 인간들을 혐오해서 없애고 싶어 하는 게 느껴져.”
“다음엔 더 철저히 준비해서 상대해야겠지요. 안 그래도 미움을 산 모양이니까요.”
아론은 마족의 마지막 외침을 떠올린 듯싶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그 무시무시한 경고는 일반 사제였다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움츠렸을 테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고 어둡게 눈을 빛내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놓치지 않겠습니다. 말레드레드를 위협하는 걸 보니까 더더욱 잡아야겠어요.”
아론은 그녀가 내가 소환사이기 때문에 나를 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통 마족들이 소환사를 먼저 잡아 차원의 문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선두에 서 있는 내가 목표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녀를 잡으면 우리 본대에도 평화가 찾아오겠죠.”
아론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그보다 더한 존재와 관계하고 있음을 말할 수 없었다. 마치 내 깊숙한 곳의 치부를 보이는 것처럼, 그에게 마왕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머뭇거릴 때, 아론이 손을 뻗어 왔다.
“오늘 밤, 함께 있고 싶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문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론이 멈칫하고 내가 뒤로 물러났을 때, 금발의 여인이 빠져나왔다.
“어, 여기 계셨군요, 아론나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