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72화 (72/220)

72.

“모두 조심하세요!”

아론의 외침이 경고하듯 이어졌다. 눈앞에서 사라진 마족 여인은 어느새 지상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검은 번개처럼 움직여 성기사들을 공격했다. 성기사들은 그녀와 스친 부위가 거뭇하게 타들어 가자 비명을 질렀다.

“점점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요?”

라드는 긴장한 채로 말했다. 그녀는 이쪽저쪽에서 사납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결국 경로를 보면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힐긋 위쪽을 보았다. 구멍은 우리가 만든 차원의 문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소환사들을 모두 없애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옵니다!”

라드는 검을 종으로 내리쳤다. 앞으로 빠져 있던 성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내리치자 굵은 신성력이 뭉쳐져 여인에게 쏟아졌다. 여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그 신성력을 피하고는 팔을 뻗었다. 그러자 아주 가는 실처럼 검은 마기가 빠져나와서 성기사들의 다리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크윽, 조심해요!”

실 같은 마기는 성기사들의 다리를 잡아당겼을 뿐만 아니라 살갗을 파고들어 고통을 안겨 주었다. 성기사들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서둘러 마기를 끊어냈지만 그 순간 당도한 마족을 마주해야 했다.

“으악!”

그녀의 손에는 마치 칼처럼 날카로운 마기가 생성되어 있었다. 얼떨결에 대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여인의 손에 피어오른 마기의 강도가 더 높은지 대검이 그냥 깨져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 본 라드가 피가 흐르는 다리에서 눈을 떼고 외쳤다.

“신성력으로 상대해야 해요!”

라드가 외치자마자 여인은 라드에게 달려들었다. 여인의 속도는 무척이나 재빨랐다. 소환사인 우리는 뒤로 물러나 그녀를 소환 영역에 가두려는 시도를 해 보았지만 그녀는 마물처럼 둔하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종종 마기를 폭사하면서도 라드의 검술을 상대하는 그녀는 위협적이었고 능숙했으며 또한 영리했다.

“크헉!”

결국 라드가 아픈 다리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자 여인의 손이 그의 배를 강타하면서, 라드의 방어구를 완전히 깨어 버렸다. 산산이 조각난 가슴 방어구를 입은 채로, 라드는 결국 여인의 발길질 한 방에 뒤로 저만치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른 성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다리를 공격해 그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한 번에 감소시킨 여인은 성기사들에게 마기를 폭사하듯 쏟아 내고는 쓰러진 그들 사이로 우아하게 걸어왔다.

“……이제 너희들 차례인가?”

그녀는 한껏 뒤로 물러난 소환사들을 웃으면서 쳐다보았다. 휘어진 검은 눈이 먹이를 보는 포식자처럼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 여러 명의 소환사가 겁을 먹고 있었는데, 그녀는 유독 나를 요염한 눈동자로 쳐다보며 말했다.

“얼마나 강할지 궁금하군.”

나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 예쁜 얼굴이 망가지는 게 싫으면 온 힘을 다해 방어해 봐.”

여인은 그렇게 경고하고는 자신의 두 손에 마기를 피워 올렸다. 성기사들을 상대한 것보다 더욱 강하게 일렁이는 그 암담한 죽음의 힘에 소환사들이 비명을 지른 것은 당연했다.

여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하찮은, 버러지 같은 모습이겠지만.”

여인은 나를 노려보며 말을 끝맺었다.

“감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말이야.”

‘뭐?’

나는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의아해지고 말았다. 마족인 그녀의 입장에서 우리는 늘 주제 파악 못 하고 그녀와 싸우려 드는 인간 종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굳이 날 보며 그런 말을 하지?’

그러나 의문을 질문으로 바꿀 시간은 없었다. 여인의 마기가 위로 솟구쳐 우리에게 창처럼 낙하하여 온 것이다. 당연히 소환사들은 질겁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신성력을 최대한으로 뽑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신성력이 잠깐만이라도 방어해 준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고서.

“제법인데?”

내가 뿜어낸 신성력은 얇은 막처럼 소환사들의 위를 덮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우산 같은 방어가 마기를 쳐냈고, 소환사들은 모두 멀쩡할 수 있었다.

‘두, 두 번은 못 해…….’

나는 머리가 어지럽고 손이 떨려 오는 걸 느꼈다. 신성력의 형태를 바꿔 응용한 것이지만 여인의 강대한 마기를 여러 번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녀에게 맞설 만한 실력자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방어만으로도 온몸이 경련하듯 떨리는 사제. 그렇게 미약한 소환사가 바로 나였다. 나는 현기증에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보았고, 곧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흙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이대로 죽여 버리고 싶어.”

여인은 간절함이 배인 눈으로, 그러나 불만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의 말씀을 감히 거역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분……?’

누굴 말하냐고, 혹시 마왕을 말하냐고 물으려는 때, 여인이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휙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팔에는 방금 전 피워 냈던 마기가 출수되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느껴서 방어하듯 쏟아 낸 마기는 화사한 빛에 부딪혀 곧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네 녀석이군.”

여인은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는 다시 사악한 마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파훼시킨 성기사를 부지불식간에 찢어 죽이겠다는 듯이.

“무척 젊고 잘생긴 성기사란 말이야.”

여인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성기사를 보며 주변에 쓰러져 있는 사제들이 들으란 듯이 말했다.

“비록 인간이지만 성노예로 만들어서 굴종시키면 볼만할 거야.”

여인은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사악하게 말했다.

“내게 안아달라고, 제 것을 풀어달라고 엉엉 우는 모습, 모두 보고 싶지 않아?”

순간적으로 왜 내가 기분이 나빠졌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사제들을 도발하기 위해서, 아니, 사기와 의욕을 꺾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안다. 아는데도, 아론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했다는 것이 화가 났고 부아가 치밀었다.

‘아론은 네가 그럴 상대가 아니야.’

나는 그녀가 아론에게 던질 거대한 마기를 보면서 가슴 속의 온기를 끌어내듯 온 힘을 집중시켰고, 마침내 작은 빛 덩어리 하나를 생성해 그녀의 등에 던질 수 있었다.

“윽, 네 년이……!”

마족에게서 바로 욕이 튀어나오며 마기가 쏟아졌다. 그녀의 거대한 힘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의 하찮은 신성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여인의 주의를 흩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인은 마기를 막고 저만치 굴러간 나를 보면서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다가왔다.

“팔다리 하나쯤은 봐주시겠지.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잃었다고 한다면 나를 혼내진 않으실 거야.”

여인은 누구에게 변명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 나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기라도 한 건가? 다음 대 마왕 후보자인 그녀에게?

‘그럴 존재는 마왕밖에 없을 텐데.’

나는 설마 싶었다. 마왕이 자신의 유희 상대를 지키고자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곧 여인의 손에서 살벌하게 피어나는 마기를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공백으로 변했다.

그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힘이었다. 내 생명을 앗아갈 강력한 마기.

여인은 싸늘하게 웃었다.

“제발, 하찮은 인간답게 인간계에서 썩어 가. 마계로 올 생각은 두 번 다시…….”

여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뒤로 빛이 도달했다. 여인은 이미 그 빛의 공격을 예감한 것처럼 짜증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피어난 마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빛을 압사시켜 나갔다.

그런 뒤 여인은 내게 마기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어서 쏟아지는 빛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사방에서 강력한 신성력이 쏟아지자 여인은 ‘귀찮게.’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공중으로 뛰어 날아올랐고, 곧 자신의 머리를 덮는 그물망을 발견했다.

그녀가 뛰어드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건건 풀로 만든 그물망이 그녀를 뒤덮은 것이다.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연약한 풀줄기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여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물을 찢어 버렸다.

“이건, 뭐야…….”

여인이 비틀거렸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바닥에 착지에 제 손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여인은 몹시도 당황하여 제 손에서 피어나는 마기를 보고 있었다.

“……내게 뭘 한 거지?”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잘 조절이 안 되는 것처럼 늘었다가 줄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둔해진 것처럼 여인은 힘겹게 팔다리를 움직였고 마침내 오만상을 찌푸리며 누군가를 노려보았다.

“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느새 다가온 아론은 말이 없었다. 말에서 내려서는 순간 그의 뒤쪽으로 망토가 펄럭이며 소리를 낸 게 다였다.

아론은 마족에게 여유를 주지 않을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대검에서 뿌려지는 환한 빛, 신성력에 여인은 당황하면서 반격했고, 마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아론이 마족을 몰아가는 것은 압도적이었다. 여인은 금세 팔다리에 상처가 났고 요염한 눈가가 무너졌으며 마기가 사라질 것처럼 불안하게 출렁였다.

“……너!”

여인은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성기사를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았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인간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이었다.

어느새 아론의 주변으론 성기사들이 도열하여 그녀에게 2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완전히 그녀를 잡을, 아니, 죽일 기세란 걸 느꼈던 걸까. 갑자기 마족 여인이 방어하는 것을 멈추고 한 팔을 어디론가 뻗었다.

“어, 억…… 에, 에레나 님……!”

아까 그녀가 놓았던 날개 달린 마족이었다. 죽지 않았던 마족은 갑자기 자신의 몸에서 마기가 빠져나가는 것에 몹시 당황했다.

허나, 여인이 힘을 빼앗아가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는지 곧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졌고 완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생명력 한 줌까지 모두 가져간 것이다.

여인은 아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날 이 지경까지 만들다니.”

그녀는 동족을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든 책임을 아론에게 떠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감정 없는, 저주하며 분노하는 미소를.

“이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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