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71화 (71/220)

71.

그는 검을 휘둘러 땅에 신성력을 쏟아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팀은 마물과 직접 싸우는 팀이 아니라 지원을 하는 팀에 속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안전했고 주요한 싸움에서 빠져 있는 꼴이었는데, 라드는 그게 못내 아쉬운지 애타는 눈으로 마물과 성기사가 싸우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기세면.”

라드는 면밀하게 싸움의 양상을 지켜보았다.

“한 시간 후면 마물을 모두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한 시간쯤이 지나자 마물들은 대부분 바닥에 뻗어 있었다. 그들은 성기사들이 다각도로 공격해 오는 것을 당해내지 못했다.

본디 공격당하면 뒤로 빠졌다가 다른 마물들과 함께 다시 공격해 오는 것이 그들의 전법이었다. 한데 도망갈라치면 쫓아와 공격하고, 퇴로는 신성력을 입힌 땅으로 봉쇄당해 있고, 뭉쳐서 공격하기란 어려워 주춤대다 보니 성기사들의 대검에 절단되기 일쑤였다.

“아군의 피해는 적군요.”

라드는 기쁜 듯이 말했다. 먼저 출정했던 중앙 성기사단장이 멀쩡한 몸으로 수하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조금 지친 듯 보이나 신체가 무사했고, 검 또한 손에 온전하게 쥐고 있었다.

“그런데, 마족이 나타나지 않는군요.”

라드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었다.

나는 잠깐 뒤를 돌아 아론을 보았다. 아론은 본대 앞 정문에서 말에 탄 채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론이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 아직도 사제들의 상당수가 대기하고 있는 이유는 나타날 마족을 대비해서였다.

그렇게 마물들이 거의 다 전멸해 갈 무렵, 닫혔던 하늘의 구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마족이다!”

이번엔 날개를 달고 있는 마족이었다. 이마 가운데에 검은 뿔이 길게 난 마족은 전형적으로 마기를 사납게 방출하는 마족이었다. 그는 마기를 뿌리며 흥분해서 성기사들을 공격해 왔다.

“모두 죽여 주지!”

하는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외치면서.

성기사들은 방어 대형을 취했다. 이미 연습했다는 듯이 넓게 펼쳐졌던 인원이 순식간에 하나로 뭉쳤다. 마치 하나의 방어벽을 구축한 것처럼 몸을 붙인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내뿜어 마기를 방어했다.

마족은 요란하게 마기를 방출하는 것 치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긴장으로 몸을 낮췄던 라드는 마족의 공격 형태를 유심히 보면서 결론을 내렸다.

“저번 마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한데요?”

라드는 지난번 전투에서 등장했던 마족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강력한 마족이라고 느껴 다들 두려워했던 것과 달리, 눈앞의 마족은 성기사들이 쏟아 내는 신성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물에게 마기를 보충해 주는 것도 없고요.”

라드는 마족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애초에 그럴 역량이 없는 자 같다고나 할까요?”

“저런 허약한 마족이 나타나다니.”

사제 하나가 적잖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다른 사제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들이 승리를 확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누구도 지금의 싸움을 지켜보면 인간 쪽의 승리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의아했다. 마계에서 보았던 마물은 훨씬 숫자가 많았고 기세등등했다. 그들을 지휘할 마족은 신성국을 무찌르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다고 마왕이 말했다.

정황상 대군을 이끄는 마족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강력해야 수천 마리의 마물을 이끌어 인간계를 침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난날에 보았던 마족처럼 강대한 마기를 품은 존재가 나타나리라 보았는데, 어째서 성기사의 대검에 맥을 못 추는 약한 마족이 나타난 것일까.

“어쩌면 우리를 방심시킨 뒤 허를 찔러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라드가 불안한 추측을 꺼내자 사제들이 모두 움찔했다. 그들은 말없이 무기를 꽉 쥐며 다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드는 그런 사제들을 향해서, 그리고 유독 나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온화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지지 않을 겁니다.”

라드의 시선은 어느새 뒤쪽의 지휘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에 대한 대비를 모두 하고 싸움에 임했으니까요.”

그는 소리 없이 감탄한 눈으로 젊은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어린 금발의 성기사가 이 상황을 얼마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지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경악과 찬탄을 모두 머금은 듯했다.

아론은 뒤쪽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그의 팔과 입뿐이었다. 그의 지시에 맞춰서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성기사들은 대형을 바꾸었으며, 신성력을 맞춘 듯이 뿜어 냈다.

날개를 집중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는지, 성기사들은 마족의 날개에 신성력을 퍼부었고, 결국 마족은 땅에 떨어져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이 끔찍한 인간들! 최악의 존재들!”

마족은 겁에 질려 있었다. 평소 인간이 마족에게 당했을 때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입장이 뒤바뀌자 기분이 묘해졌다.

사제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중앙의 기사단장이 마족 앞에 섰다. 기사단장의 몸에선 살기가 철철 흘러나왔다. 자신감과 승리의 야욕에 취해 있는 듯했다.

“마족, 그 더러운 육신에서 해방시켜 주지.”

그의 중얼거림은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더욱 크게 들려왔다.

“위대한 엘크리찬의 힘에 죽을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기사단장이 대검을 번쩍 들었을 때, 마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성기사, 그리고 전멸한 마물들 사이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레나 님!”

에레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살려 주세요!”

마족이 재빠르게 외쳤을 때, 성기사단장이 멈칫했던 검날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마족을 반으로 가르려는 의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마기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으억!”

마기는 짧지만 강렬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마치 운석처럼 땅에 꽂힌 마기는 그 주변에 짧은 파동을 일으켜 근처의 기사들을 날려 버렸다. 성기사단장은 마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고 뒤로 날아가 쓰러진 터였다. 서둘러 사제들이 그가 괜찮은지 보러 가고, 남은 기사들은 마기가 쏟아진 곳을 보며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때 그 마족이다!”

검은 머리의 여자 마족. 강력하고 강대한 마기를 품고 있던 존재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이글거리는 마기를 피워 내며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인간들을 보는 눈은 비할 데 없이 무정했으면 잔혹하리만큼 냉랭했다. 그녀는 자신이 나타나자 화색을 띠며 반가워하는 마족에게 건조한 시선을 던졌다.

“누가 내 이름을 감히 부르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어…….”

마족은 성기사단장이 검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에레나라고 불린 마족이 어지간히 무서운지 그녀가 쳐다보는 시선만으로도 몸을 벌벌 떨었다.

“제, 제가 이기려면 필히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라…….”

“흐음.”

“절 이곳에 보낸 게 바로 에레나 님 아니십니까! 그, 그러니 제발…….”

마족은 여인의 시큰둥한 반응에 애원하듯 매달렸다. 여인은 웃고 있었지만, 왜인지 그녀에게서 뻗쳐 나오는 기운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인은 살기 가득한 마기를 일렁이며 말했다.

“널 여기로 보냈으니 내가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거야? 이런 대군도 아닌 인간들에게 맥도 못 추고 당하고 있는 너를?”

“제발, 에레나 님! 부디 선처를……!”

“나도 제약이 있어 이곳으로 너를 보낸 거야. 물론 기대는 안 했지만 생각보다 더 형편없이 당해서 어이가 없군.”

여인은 웃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매우 불쾌한지 몸에서 검은 마기가 거칠게 피어올랐다. 여인은 자신에게 달려들려는 사제들을 비릿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모두 끔찍하게 죽여 버리고 싶어.”

순간, 여인의 시선이 정확하게 내 쪽으로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적의는 명백했다.

“내 손으로 직접.”

섬뜩한 살의가 느껴졌다. 내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을 때, 그녀의 손에서 저지할 수 없는 거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니, 마물이나 상대하도록 하기 위해 너를 보낸 건데.”

여인의 신경질적인 말이 끝났을 때, 그녀의 손에 있던 마기가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그 검은 기운들은 빠르게 죽어 있던 마물들에게 흡수되었다. 그러자 너절하게 조각났던 마물의 몸이 하나로 붙었으며, 사라졌던 기운이 생겨났고, 더욱 흉포하고 거대하게 변해 달려들었다. 성기사들은 기함하며 다시 진영을 갖춰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신호가 왔어요!”

그때, 라드가 외쳤다. 아론이 지시를 보낸 것이다. 나는 재빨리 소환사들과 함께 하늘에 난 구멍을 향해서 신성력을 그러모았다. 작고 더운 온기를 가슴에서 찾아 확장시키자 지팡이에서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집중하세요.”

라드가 가만히 외쳤다. 우리는 그녀가 마음대로 구멍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이었다. 이곳에서 제 입맛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래서 아론이 준비한 다른 계략이 통할 수 있도록 말이다.

“흠!”

여인은 빠르게 자신의 통로가 막힌 것을 알아차렸다. 살려달라는 마족의 뒷목을 잡고서 날아오른 그녀는,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을 깨닫자 다시 우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있어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건대 ‘귀찮은 소환사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내 쪽을 보는 것 같은데.’

구멍을 막는 소환사들은 다른 팀에도 있었다. 허나 그녀는 유독, 뚫어지게 우리 팀을 보았고 그중에서도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적의가 느껴지자 두려워지고 말았다.

에레나. 그 이름은 마계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마왕이 다음 대 마왕 후보자라고 했던 이가 아닌가.

나는 흠칫 떨리는 몸을 느꼈고 공포에 젖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간 공중에서 사라졌다. 날개 달린 마족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 버렸는지 그가 비명을 지르며 낙하하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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