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읏, 아론.”
나는 아론의 손길이 내 목덜미로 미끄러지자 작은 신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아론의 손은 내 목덜미에 나른하게 달라붙었다. 내 혈관을 내리누르면서, 부드럽게 피부를 어루만지는 손에 나는 순간적으로 급소를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저를, 알고 계실까요. 말레드레드.”
그에게서 빠져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는 모두 유혹에 가까웠다. 나는 그가 내 경계를 뚫고 파고들어 오는 속도에 질겁했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피부가 전율하듯 떨려 왔고, 그가 주는 열기에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긴장감이 와해되어 갔다.
나는 어느새 그에게 얼굴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맞췄고 열을 품은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사랑스럽게 덮어 갔다.
뜨겁고 농밀한 키스에 흠뻑 빠진 채로,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보았다. 물론 그의 능숙하고도 달콤한 혀 놀림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애초에 그를 찾아왔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래 그를 찾아내서, 마음이 어떠냐고, 괜찮으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 뒤, 고맙지만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나를 위해 그렇게 나서서 불이익을 받지 말라고 충고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내가 아닌 자신이 불편했기 때문에 나서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에 따른 결과도 기꺼이 예상했으며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남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유능한 성기사인 그가, 스스로가 이기적인 인간이라 토로하며 이런 자신을 알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오히려 내게는 더 친숙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범접할 수 없는 어느 별세계의 남자가 아니라, 감정적인 고민에 휩싸여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기껍게 느껴지는 것이다.
“으음, 아, 아론…….”
나는 어느새 손길이 노골적으로 내 몸을 더듬고 있자 신음하고 말았다. 아론은 내 신음에 아쉬운 듯 손을 떨쳐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자신과 키스를 나눠 타액으로 젖어 버린 입술을 빤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맞춰 온 그는, 가시지 않은 음심에 들끓는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선 안 돼.”
나는 그의 뒤에 있는 성전을 잠깐 바라봤다.
“이곳에는…….”
“신께서 보고 계셔서요?”
아론은 내 말을 지레짐작하면서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전에 누군가 올까 봐 걱정되어서였지만 아론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나라도, 엘크리찬 앞에서 알몸을 내보이고 정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뭔가 나란 존재가 발가벗겨진 것처럼 초라해 보일까 봐 걱정이었고, 그래서 신성력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아론은 내 침묵에 답을 얻은 것처럼 어두워진 눈으로 고백했다.
“엘크리찬께서 보고 계셔서 더 하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타락해 버린, 배덕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제가 아니었던가. 마왕의 아래에서 그가 하는 음담패설을 들으면서 신음했던 나였다. 덕분에 마왕을 떠올리고 말자 몸이 흠칫했는데, 아론은 그것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제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요. 성기사답지 못하게요.”
“괜찮아. 신경 안 써.”
나는 서둘러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가 성스럽지 못하다고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론은 그걸 알지 못하고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너무 음습한 게 아닌가 합니다. 말레드레드를 엉망으로 안고, 또 탐하고 싶어지는 걸 보면 말이에요. 정말 음욕에 사로잡힌 인간 같습니다.”
“아주 좋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론의 눈동자가 커지고, ‘정말이요’ 하고 묻는 느낌이 들자 나는 조금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내가 정숙한 이미지는 아닐 텐데, 어째서 아론은 자신이 더욱 음란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널 방 안으로 초대한 게 나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난 네가 그때 거절하고 돌아가 버릴까 봐 사실 걱정했단 말이야.”
“그 순간 말레드레드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는데, 제가 감히 그러했겠습니까.”
아론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전 말레드레드가 초대해 주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차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요.”
아론은 재회한 날의 심정을 열의에 찬 목소리로 고백하고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론.”
나는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태양 빛처럼 나에게 과감하게 감정을 쏟아 내는 그에게 거절도 충고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가 나를 떠나는 건, 그가 떠나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되어야만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발끝을 올렸다. 맑은 피부에 혈색이 빛나는 볼에 입을 맞추자 아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웃는 것처럼 휘어진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에일을 때려 줘서 고마워. 사실 속이 시원했어.”
아론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이 기쁨이 넘실대는 눈동자였다.
“말레드레드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으면 흠씬 더 패주는 건데 말입니다.”
아론의 대답은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짙고,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는 다시 한번 내 턱을 경건하게 끌어당겼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신께서 보고 계서도.”
아론의 눈은 뜨거웠다. 태양의 열기를 모조리 삼켜서 내게 쏟아 내는 것처럼.
“저를 감히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를 증명하듯, 아론은 무섭도록 치밀하고 정열적으로 입을 맞춰 왔다.
***
길고 긴 키스 끝에 우리가 이성을 되찾아 성소를 빠져나온 건 십여 분 뒤의 일이었다. 나는 훈련소로 향하고 아론은 지휘관들의 천막으로 향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자 라드는 얼른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혹시 힘들면 훈련을 하루 빠지게 해 줄게요.”
라드는 기꺼이 호의를 베풀겠다며 말해 왔다. 에일 때문에 내가 큰 상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도리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큰 싸움을 앞두었는데. 이런 때에 숙소에만 있고 싶지 않아요.”
“정말 신을 모시는 사제다운 생각입니다.”
라드는 놀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내가 투철한 사제 정신을 발휘하여 이곳에 남는다고 생각했는지 훈련을 할 때 더욱 친근하고 다정하게 지시해 왔다. 다른 사제들의 시기와 눈치를 사면서 훈련에 임했는데, 어느 순간 커다란 종소리가 들리며 주의를 일제히 환기시켰다.
“마물의 습격이다!”
예상했던 마물의 출몰이었다. 수십 마리의 마물이 본대의 입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은 독성 가득한 침은 금세 벽돌을 부식시켰고 시큼한 냄새와 함께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성기사들이 그쪽을 향해 달려갔고, 어느새 그 뒤쪽에 아론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1, 2팀은 정면에서, 3, 4, 5, 6팀은 좌우로 빠져서, 마물을 둘러쌉니다!”
아론의 목소리가 짧고 굵게 나오자, 성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소환사와 성기사로 이루어진 우리 팀은 당장 출동하지 않았다. 나는 지팡이를 쥔 채로, 라드의 지휘에 맞춰서 신성력을 뿌릴 장소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은 소탕이 아닌 소거에 가까웠기 때문에 마물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 놓고, 그 안에서 마물을 죽이는 게 중요했다.
“공격!”
아론의 외침이 이어지자 성기사들의 대검에서 흰 빛이 번쩍였다. 커다란 흰 빛은 마물들을 반으로 가르면서 뻗어 나갔고, 마물들은 살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것을 제압하는 것은 좌우로 빠져나간 성기사 팀이었다.
“한 마리도 빠짐없이 처단한다!”
중앙 성기사단장의 명이 떨어지자 대검들이 도망치는 마물들의 허리와 다리를 잘라나갔다. 신성력을 피해서 도망치는 마물들은 강력하고 빠른 공격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광하는 소리를 냈다.
“아직 안심해선 안 됩니다.”
그 순간 아론의 냉철한 경고가 이어졌다. 아론은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사제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팀을 도열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두 번째 싸움을 대비해 아군을 준비시킨 것처럼, 아론은 신성력으로 어떻게 마물을 제압할 것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물 군단이 더 나타나면, 먼저 그들이 디디고 있는 땅에 신성력을 뿌리고, 그들이 그것을 견디며 달려오면, 신성력이 배인 무기로 그들의 아픈 다리를 공격해야 합니다.”
아론은 침착하게 신성력으로 약해진 부위를 공격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실전에선 항상 신성력을 낭비하듯 마물 여기저기를 공격했기 때문에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둬야 하는 일이었다.
아론이 그렇게 지원군을 대비시켰을 때쯤,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마물 군단이다!”
나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거대한 구멍은 어둠의 마기를 일렁이면서 마물을 마치 폭우처럼 쏟아 내고 있었다. 마왕의 말처럼 수천 마리의 마물이 오는 것일까, 침을 꿀꺽 삼키던 나는 마물이 어느 순간 쏟아지지 않자 멈칫하고 말았다.
‘백 마리 정도 되려나?’
그것도 많은 수였지만 예상했던 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의아함이 생길 때, 아론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본대 모두, 앞으로!”
아론의 명이 떨어졌다.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와 소환사들이 새롭게 나타난 마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이란 단순할 정도로 명백했다. 나타난 마물들을 모두 죽인다. 그들을 소환 영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나중에 시체를 소거한다, 가 목표였다.
전자는 시체를 처리할 필요가 없는 반면 후자는 시체 처리뿐만 아니라 그 시체가 스며든 땅도 정화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하지만 대규모 싸움에선 엄청난 마물들이 몰려오는 만큼, 그들을 일일이 소환 영역으로 몰아넣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아론은 마물을 말살할 수 있는 후자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라드가 사제들이 마물을 상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예상보다 마물이 많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