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알면서도 물어오는 이유는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았다. 카란은 끝내 이렇게 내게 묻고 말았다.
“자네 정말 아론나이드를 좋아하나? 진심으로?”
“……전.”
나는 그 말에 잠깐 머뭇거렸다. 대답을 회피하거나 모른 척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진정 대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담담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사랑하느냐고, 영혼과 마음 모두 꺼내 줄 것처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섣불리 말했다가는 그 의미가 나를 덮쳐서 원치 않은 곳으로 끌고 가 버릴 듯한 느낌에 나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흠.”
내 대답에 카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카란은 멈칫했다가 말했다.
“앞으론 아론나이드를 좋아하냐고 놀려선 안 되겠군.”
“네?”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가벼운 감정 같진 않거든.”
카란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가 보게.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만나야 할 거야.”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새벽의 어스름이 끝나가는 하늘엔 금빛 해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만물이 온통 금빛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둠을 밝히고 빛을 안겨 주는, 금발의 성기사를.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하얀 돌로 소박하게 지어진 성전은 세 입구가 모두 개방되어 있었다. 따라서 멀리서 봐도 누가 엘크리찬 동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신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사제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전을 잘 찾지 않았다. 이것은 전사로서의 실용주의에 기반한 행동이었는데, 신이 늘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은 성전을 찾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잘 뿜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도나 상부에서는 성전에 인사를 드리는 것을 주기적으로 실천했다. 신성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제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우아한 자세로 신께 기도드리는 모습이 대외적으로 보기에 좋았고, 사제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 데도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지금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성전에 있었다. 그는 지금 큰 싸움을 앞둔 상태였고 지휘 자격을 잃을 기로에 서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심란할지. 나는 더욱더 묵직해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아론.’
그는 전신 갑옷을 입은 채로, 한쪽 무릎을 꿇고 동상 앞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기도하는 동상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의 뒷모습은 고고했으며 한편으론 고독해 보였다. 그가 오른손에 쥔 대검이 반듯하게 그의 곁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전쟁을 앞두고 신께 기도드리는 장군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따라서 아주 조용한 걸음으로 가만히 그에게 다가갔고, 그러던 중 희미한 중얼거림을 듣고 말았다. 말없이 기도 중이라고 생각한 아론에게서 빠져나오는 목소리였다.
“……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쓰시되.”
아론의 목소리는 낮고 선명했다. 마치 어둠에서 한 줄기 불꽃이 타오는 것처럼.
“제게 하나만은 허락하십시오. 오직 하나만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의 절절한 기도 내용에 마음이 알 수 없는 풍랑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고?
나는 그에게 뭘 그리 애절하게 원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무엇이 아론의 마음을 그렇게 꽉 쥐고 절박하게 바라도록 만들었냐고.
내가 한 발 더 다가가자 아론이 멈칫했다. 이제야 기척을 느꼈는지 그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말레드레드?”
그는 날 발견하고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여기 어떻게 왔습니까.”
그는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성소를 빠져나온 그는 여전히 밝게 미소 짓고 있었고, 어떤 괴로움도 곤란함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카란에게 물어서 왔어.”
“절 찾아서요?”
기쁘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띠던 그가 곧 멈칫했다. 그러고는 심각해진 눈으로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절 찾아온 건가요? 누가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아론을 보았다.
“일은 내가 아니라 아론에게 있었잖아. 에일하고…….”
“아.”
아론은 그제야 그를 떠올린 듯 눈빛을 굳혔다.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눈빛은 누가 봐도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분노와 살기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에일을 더 혼내 주지 못해서 분하다는 듯이 잠깐 눈빛을 날카롭게 뜬 사내는 곧, 상냥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게 어째서 아론이 해야 할 일이야? 하더라도 모욕을 당한 내가 해야지.”
나는 이상하게 부담스러운 마음을 담아 대꾸했다. 죄책감과 고마움이 들었는데, 그가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만 같았다. 그가 나 때문에 자격을 잃기라도 하면 그 죄책감에 늘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방지하고자 일부러 냉랭하게 말했다.
“앞으론 날 모욕하는 일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도 돼. 우리 사이가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론이 피해를 보는 게 싫어. 나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이라도 사면 어떡해?”
“잘못 알고 있어요, 말레드레드.”
아론은 다정한 눈빛이었지만 단호함을 빛내며 말했다.
“전 피해를 본 적이 없어요. 이번 일은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요. 제 마음이, 제 기분이 불쾌했기 때문에 그를 때린 거예요. 마음 같아서 죽을 만큼 패고 싶었지만.”
아론은 빙긋 웃었다.
“간신히 참았어요. 이 본대에서 쫓겨나면 안 되니까요.”
“뭐……?”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따스했으며 근사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약간 씁쓸하면서도 어두운 미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절 보고 착하고 예의 바르다 하지만, 실은 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에요.”
“……!”
“그냥 성기사 아론일 뿐이죠. 모범적인 신의 사도나 기사, 이런 게 아니라요.”
아론의 어조는 너무나 건조해서 흡사 남의 일처럼 삭막하게 들릴 정도였다. 겸손함이 지나쳐 자기 비하에 가까운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사람들이 너를 찬양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론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론이 애절하고 애틋하게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좋아 보인다면 말레드레드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전 말레드레드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으니까요.”
“……아, 아론.”
나는 결국 당황하고 말았다. 내 앞에서 나를 살피고 있는 사내에게 어떤 식의 충고를 해 줘야 할지, 어디를 바로 잡아 줘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나는 심호흡을 짧게 하고 하나씩 따져 나갔다.
“아론. 아까 에일의 일 때문에 지휘관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고 들었어.”
“바로 그렇게 되진 않을 거예요. 이 작전이 제가 주도해서 나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요.”
아론은 냉철하게 덧붙였다. 이미 그것에 관해 생각해 본 듯한 눈빛이었다.
“마족만 처리할 수 있다면, 그 뒤에 지휘관의 자격을 박탈당해도, 설사 성기사보다 지위가 낮아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본대에서 쫓겨나지만 않는다고 한다면요.”
“쫓겨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데?”
나도 모르게 천진하게 묻고 말았다. 아론은 몰랐냐는 듯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야 제 하나뿐인 여인과 헤어지고 말겠지요.”
“……그, 그래?”
아론의 눈빛이 한층 더 그윽해졌다. 욕망으로 달구어져 나에게 직선으로 달려오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러다가 아침 정사라도 나눠야 하는 건 아닌지. 음탕한 생각에 잠깐 젖었던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런데, 에일이 나중에라도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차남을 그렇게 대접해 주는 가문이 아니어서요. 무엇보다 보노아 백작 가문보다 제가 가진 배경이 좀 더 좋으니 절 함부로 하려고 들지 않을 거예요.”
조금 더 좋다는 건 정말 겸손한 표현이었다. 그는 황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황제의 조카였다. 나는 그의 지위를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려 보고는 마음의 불안을 털어놓고 말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 해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돼.”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말레드레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못 견뎠기 때문에 한 거예요.”
아론은 수그러드는 내 턱을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 자신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게 한 뒤 그는 가만가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레드레드는 잘 몰라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요. 저는 말레드레드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은 평범한 남자예요. 성기사나 신성력, 이런 건 그냥 제가 살아남기 위해 얻어낸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론의 눈은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별처럼, 하늘에서 가장 강렬하고 변치 않는 빛을 뿜어내는 영원함의 상징처럼.
“그래서 저는 마물과 싸우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위해서 신에게 헌신하고, 그의 이름을 빌려 싸우는 건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물을 죽이고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이건 그저 제가 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니까요.”
아론은 이내 나를 끌어당겼다. 자신의 코앞까지, 내 허리를 감싸 안은 그는 방금 전과는 다른 절박함과 절절함에 휘감겨 있었다.
“이렇게 이기적인 제가, 말레드레드를 감히 가질 수 있는지. 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끔은 불안해져요. 부족한 저를 알고서 말레드레드가 실망하고 가 버리면 어쩌나 싶어서요.”
아론은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전 정말 말레드레드를 원하는데 말이죠.”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론, 네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묻고 말았다. 아론은 쓰리게 웃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말했다시피.”
아론은 내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에 느껴지는 야릇함은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말레드레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