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8화 (68/220)

68.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짤막하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라드는 내가 기분이 저조하다고 느꼈는지 따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내 옆에서 걸었을 뿐이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일쯤이면 나에 대한 소문이 번지겠구나.

귀족가의 사생아, 에일이 좋아했던 여인, 따져보면 별거 없는 소환사……. 그런 걸 떠올리고 나니 속이 다시 불편해져 온다. 역시 한 대쯤 에일의 뺨을 올려붙였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잠들기 전,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은 아론도 마왕도 만나지 않았다. 꿈에서 술에 취한 백작 부인을 만났을 뿐이다.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정확히 남아 있는 대사를 외쳤다.

‘울면서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겠지.’와 ‘너 같은 건 평생 울지 마.’라는.

그 문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옥죄어 왔다. 나는 그 고통 속에서 울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말을 듣고 어린 시절의 소녀로 돌아가 홀로 고독하게 있었을 뿐.

‘별로 꾸고 싶지 않은 꿈인데.’

나는 찌뿌둥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론과 오전 내내 섹스를 했을 때에도, 마왕과 밤새 음탕한 정사를 했을 때에도 이런 찜찜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과거, 그게 뭐라고.’

나는 울적해진 채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씻으러 향했다.

얼굴과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은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높이 고정한 나는, 일부러 더 담담한 척 기합을 넣고서 훈련소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완전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들은 호기심과 동정심이 섞여 있는 눈으로 나를 보았고 모여서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누군가 ‘정말 사생아예요?’하고 물어왔을 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당신 일이나 신경 쓰시죠.’라고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슬픈 척 ‘사실이에요, 아쉽지만요.’라고 답해 동정의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부담스러운 관심들을 어찌어찌 넘기면서 훈련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거울 앞에서 아론이 에일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 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어떤 연유에서 발생한 건지 이유는 몰라도 주위가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사제들이 모두 입을 벌리며 굳었을 정도로 충격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아론은 휘청거리는 에일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나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론의 표정만 읽었을 뿐 아론이 에일에게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좋지 않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에일이 표정이 사색이 되어서 아픈 볼을 부여잡고 재빨리 사라진 걸 보면 말이다.

내가 훈련소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아론은 상관들이 데려간 상태였다. 사제들은 둘 셋씩 모여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듣거나 말거나.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아론이 왜 에일을 때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에일이 큰 잘못을 저지른 걸 거야. 예의 바른 아론나이드가 저렇게 화를 낼 정도면, 엄청나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거지.”

“하지만 정말 무례한 일을 저질렀다면 아론나이드의 성정 상 주먹이 나가는 게 아니라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을까? 아론나이드는 절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야 모르지. 아론나이드가 참고 있다가 마침내 폭발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폭력성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 없어. 아론나이드가 마물 때려잡는 거 못 봤어? 여유나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쳐 산산이 조각을 내지.”

그는 시선이 모여들어 신이 난다는 듯이 더욱 신나게 떠들었다.

“그 모습이 어디 자비나 인정이 있어 보이는 모습이야? 절대 아니지. 아론나이드는 적이라고 생각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아. 아주 철저하고 잔인하게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우리가 든든하고 완벽한 구원자라고 생각할 만큼.”

“그건 그래.”

사제들은 모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의 호응을 받은 기사가 이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다들 아론나이드를 얕잡아 보면 안 돼. 그가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마냥 사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치지. 그가 대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건대, 그는 목표한 것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이뤄내는 사람일 가능성이…….”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치고,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싶었다. 동료들은 ‘왜 갑자기 말을 멈춰?’ 했다가 역시 나를 보면서 흠칫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어 내가 있던 것을 알지 못했던지, 그들은 모두 놀란 듯했다.

나는 그들이 훈련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비켜달라는 듯이 그들을 쳐다봤고, 그들은 얼른 몸을 비켜 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레너드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 왔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말레드레드?”

나는 멈칫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긴장했는데, 레너드가 ‘아론나이드요.’ 하고 서두를 꺼내자 어깨에 힘을 탁 풀며 안도하고 말았다. 레너드는 방금 들었다면서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론나이드가 사제에게 갑작스럽게 주먹을 휘둘러서요. 지휘관 자격이 박탈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뭐?”

나는 상당히 놀란 터였다. 나도 모르게 뱉은 단어가 반말에 가까웠지만, 레너드는 이해한다는 듯,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황당하죠.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에일이 함께 싸웠던 동료에게 인사하러 왔다고 할 때부터 아론나이드의 표정이 아주 안 좋았어요. 표정이 완전히 냉랭하게 변해 있었는데, 에일이 동료들에게 ‘별거 아닌 여자는 이만 잊고 떠날 겁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뭔가 휙, 하고 움직이더니 에일이 나가떨어져 있었어요!”

레너드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생생하게 목격한 것을 말했다.

“아론나이드가 에일을 때린 거예요.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르게 움직여서요. 에일은 알았어도 피하지 못했을 거예요. 성기사인 저도 피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 말하던가요?”

목소리가 떨렸다. 레너드는 그게 자신처럼 흥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실은 아론의 과격한 행동의 이유가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너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일에게 하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요. 왠지 섬뜩했는데…….”

내가 떨리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이내 레너드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모욕하면, 제가 가진 모든 걸 이용해 무너뜨려 주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숨을 멈췄다. 레너드가 말을 이었다.

“‘철저하게요.’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요.”

“아…….”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나는 아론이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마도 화가 나서, 자신이 애정하고 있는 여인을 모욕한다는 게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서.

레너드는 순진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아론나이드는 에일이 누굴 모욕한다고 말한 걸까요? 자신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 말레드레드?”

내가 갑자기 돌아서자 레너드는 당황해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황급히 입구로 뛰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라드가 날 불러 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론을 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반듯하고 모범적인 성기사. 하지만 자신이 마음을 품고 있는 여인을 위해선 주저 없이 주먹을 내지를 수 있는 사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이 떨리는 마음이 진정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무작정 나와서 아론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카란 덕분이었다. 카란은 훈련소에 들어가지 않고 돌아다니는 날 보며 눈을 찌푸리더니, 내가 아론의 행방을 묻자 미간을 좁혀 왔다.

“그렇게 남자만 쫓아다니면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아론은, 아론나이드는…….”

나는 그의 충고를 못 들은 척 말을 가다듬었다.

“지금 어디에 있죠?”

“그는 잠시 신의 성전으로 향했어. 거기서 참회하고 다시 훈련에 복귀할 거야. 방금 전의 소동으로 다들 놀랐는데, 그는 상관들 앞에서 무척이나 침착하더군.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듯이.”

카란은 무뚝뚝한 눈을 하며 곤란하다는 심리를 내비쳤다.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변명도 없어. 그저 ‘행동의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할 뿐이니.”

카란은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론나이드에 관한 얘기를 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행동 같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모범적이고 선한 그가 왜 동료를 주먹으로 때렸는지 말이야. 그 돌발적인 행동에 다들 그의 지휘를 박탈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정작 본인은 차분하지.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이.”

“정말 지휘관 자격이 박탈되는 거예요?”

카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당장은 그러지 못해. 이번 작전이 아론나이드가 이끄는 작전인 만큼, 그가 지휘관 자격을 잃어버리면 곤란해질 일이 많으니까. 하지만, 이번 작전이 끝나는 대로 자격을 잃게 되겠지.”

카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본대의 기강을 세워야 하니까.”

억울한 감정이 치솟았다. 죄책감도 따라왔다. 아론은 나를 모욕하는 에일을 혼내 주려고 한 것인데, 그 때문에 지휘관 자리를 잃게 되었다니. 불편한 감정에 휩쓸리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울한 얼굴 말게. 나까지도 우울해지려고 하니까.”

내 상심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는 표정을 바꿔 그에게 말했다.

“가 볼게요.”

“성전으로 갈 생각인가? 아론나이드를 만나 보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