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7화 (67/220)

67.

라드는 기합이 단단히 서린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날 오후 훈련을 주도했다. 확실히 라드는 경력이 많은 성기사였다.

젊은 축에 속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성기사가 된 사제답게 능숙하게 다른 사제들을 지휘해 갔다. 같은 성기사들은 물론이고 소환사까지 군말 없이 그를 따라 공격과 방어를 연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들 잘했어요. 오늘 저녁에도 훈련할 거니까 시간들 비워 놓으세요.”

라드는 칭찬과 명령을 교묘하게 섞으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저녁도 먹지 않고 다시 훈련 장소에 모였다.

하지만 라드는 우리를 훈련소가 아닌 2층 주점으로 안내했다. 의아해하는 우리를 보면서, ‘앞으로 협동하려면 서로에게 익숙해져야 한다’라고, 라드가 이유를 설명했다.

“술은 생략하겠습니다. 내일도 아침 훈련을 해야 하는데, 정신과 체력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요.”

라드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하고는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했다. 커다란 식탁에 동그랗게 둘러앉은 우리에게서는 어색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라드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식사를 시키고 함께 먹기를 권유했다.

따끈한 감자 수프와 나무줄기 볶음, 굵은 채소를 넣고 찐 돼지고기 요리가 제법 호화스러웠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우리는 수저를 들어 식사하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는 소리가 곧 요란하게 이어졌다.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라드는 그럼에도 함께 먹는다는 것이 흐뭇한지 눈가를 휘어 왔다.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앞으로의 싸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설명했다.

“생사를 함께하는 우리는 서로를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때야말로 신의 믿음에서 나오는 우리의 힘이 가장 크게 빛을 발합니다.”

라드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어조로 강하게 말했다.

“마물은 서로 협동하지 않습니다. 마족도 협력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싸우고 각자 방어합니다. 우리의 승리는 이들의 이런 점과 극명히 대비되어서야 자명해질 수 있습니다.”

라드는 매우 투철한 사제였다. 그의 말은 신에 대한 믿음과 사제로서의 빛나는 의무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우리의 본연이란 듯이 자부심도 상당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과 눈동자에서 사람들은 이내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면, 그가 사족인 듯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나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맛은 괜찮나요?”

라든가.

“많이 움직였으니, 좀 더 챙겨 드세요.”

라드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했다.

“말레드레드는 외모처럼 먹는 모습도 우아하네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상하게 들을 때마다 속이 불편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낯설고 불편한 식사 자리에선 술 한 잔이 주는 미덕도 분명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결코 술을 즐기거나 잘 먹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주변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며 보리 맥주를 먹고 있는 사제나 주민들이 부러웠다. 술을 먹을 수 없는 거라면 얼른 이 얹힐 듯한 식사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식사를 빨리 했다.

“어- 여기들 있으셨군요! 본대의 대단한 사제님들이.”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는 잠깐 놀라고 말았다. 에일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고 했던 그가 술에 잔뜩 취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그의 뒤에선 같은 동료인 소환사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지만 에일은 못 들은 척 우리를 쓱 하고 좌우로 훑어보았다.

“전 이 지긋지긋한 시골구석을 떠나지만 한동안 여기들 붙어 계셔야 하니, 고생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은 격려처럼 보였지만 실은 비난이었다. 라드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살짝 굳어진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라드가 말했다.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요?”

“용건이라뇨. 없습니다. 전 어차피 이곳을 떠날 입장이니까요. 굳이 미련이 있다면…….”

에일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의 취한 눈동자가 내 쪽을 응시하자 나는 움찔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에일은 일부러 강조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겠죠.”

“그녀라뇨?”

라드가 반응했다. 나와 에일을 번갈아 보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는 것 같았다.

“몰랐어요? 제가 말레드레드를 좋아하는 거. 좋아해서 잘해 주려고 했는데, 건방지게 자신의 신분도 모르고 절 냉랭하게 대하더라고요. 귀족도 아닌 주제에 말이죠.”

그 말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조금 모욕적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서 나는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강력하게 화를 내는 이가 있었다.

“레이디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지껄이다니! 당신은 위대한 신의 사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에일은 라드를 쳐다보았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음산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전 사제가 아니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말레드레드처럼 돌아가도 반겨 줄 가문이 없는 게 아니거든요. 하긴. 사생아 따위를 반겨줄 가문이 어디 있겠어요?”

이번엔 더 확실하게 모욕을 주려는 듯했다. 나는 에일을 쳐다보았고 에일은 그런 나를 보며 입가를 올렸다. 내가 비로소 당황해서 만족스럽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섬찟한 터였다. 나는 내 과거에 대해 동료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상부는 알고 있을지라도 동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에일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에일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요,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런 부끄러운 출신임을? 조사하면 금방 나와요. 내가 어디 가문인지 잊은 건 아니겠죠? 보노아 가문의 차남이라고요, 나.”

“보노아 백작 가문……?”

라드가 중얼거렸다. 에일은 그에게 고개를 돌려 이제야 알았냐는 듯 오만한 눈빛을 했다. 술에 취해 가문의 이름만을 내세우는 표정은 정말로 비열해 보였다. 나는 불쾌하단 의미로 입을 다물었고 주점 사람들의 눈은 다시 떠드는 에일에게 향했다.

“네, 저는 보노아 백작 가문의 사람입니다! 내가 왜 말레드레드의 뒤를 조사해 본 줄 알아요? 누가 날 여기서 내보냈거든요! 이 촌구석 본대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만든 인물이 누군가 해서, 평소에 제게 건방지게 굴었던 말레드레드의 뒤를 조사해 봤어요! 조사해 보니 말레드레드는 가문의 이름도 거론할 수 없는 하찮은 출신이라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에일…….”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뒤쪽에 동료들이 다가와 있었다. 지난날 보았던 소환사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에일을 말리는 것 같지만 정열적으로 말리진 않았고, 오히려 나를 향해 분노의 눈을 치켜떴다. 에일에게 뭐라고 나를 곡해한 것인지. 나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억울해서 술을 마신 겁니다! 도무지 누가 날 이곳에서 강제로 내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어떤 가문이기에 보노아 백작 가문의 차남인 날 이렇게 휘둘러 버리는지!”

에일은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모든 원인은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던 나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정말 화가 나요! 별것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가 이런 기분을 느꼈다는 게!”

에일은 분노를 씹어 먹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천한 출신의 여자 따위 때문에 말이죠!”

“말이 너무 심하군요! 술에 취했으면 얌전히 인사하고 떠날 것이지, 이런 무례한 막말을 하다니요!”

라드는 마침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은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더 이상 추태를 부리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단호하고도 엄한 기세에 에일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비릿한 눈빛만은 여전히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을 억누르고 있었다. 만약 에일이 가까이 왔다면 그에게 한 방 날렸을지도 모른다. 장담하건대 내가 그보다 더 잘 싸울 것이다. 맞붙는다면 결코 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달려들지 않는 건 사제로서의 내 평판과 체면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런 여자를 거들떠나 본답니까.”

에일은 끝내 그 한마디를 해내고야 말았다. 그게 나라는 여자의 모든 정의란 듯이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그가 몸을 돌렸다. 소환사 동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런.”

주점 안의 분위기는 누가 됐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나를 측은하게 보는 눈길, 내 출신에 놀란 눈길, 그럼에도 호기심과 관심이 간다는 눈길 속에서 라드가 분위기를 정돈하듯이 말했다.

“별 이상한 사제 때문에, 좋은 분위기가 다 망가졌네요. 신경 쓰지 말아요, 말레드레드.”

라드가 말문을 열자 같은 팀이 된 다른 사제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술에 너무 취해서 헛소리가 나온 모양이에요.”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이유를 알겠어요, 진짜 무례한 사람이네요.”

“앞으로 안 볼 사람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불편한 속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쥐고 있는 주먹이 말해 주듯, 모욕감을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에일의 말에 기분 나빴던 과거들이 모조리 함께 떠오르는 기분. 사생아로서 느꼈던 비참함이 에일의 말에 힘을 얻은 것처럼 속을 휘젓고 있어서 나는 결국 일찍 수저를 내려놓아야 했다.

식사 자리가 예상보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우리는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다. 라드는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내 곁에 붙었다. 다른 일행들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상태였다.

“그가 말레드레드에게 마음이 많이 있었나 봐요. 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걸 보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례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라드는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말했다.

“다음에도 그렇게 한다면 상부에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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