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66화 (66/220)

66.

몇십 분 후. 우리는 카란과 사제들이 건건 풀을 꺾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나타나자 기척을 느꼈는지 카란이 곧 우리를 돌아봤다.

“자네들이 왜…….”

카란은 멈칫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아론을 하대했음을 깨닫고 머뭇거리며 허리를 숙이려 했다. 아론이 사과는 불필요하다는 듯이 얼른 말했다.

“이분이 카란의 사무실 밖에서 헤매고 계셔서요.”

아론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란의 시선도 내게 옮겨 왔기 때문에 나는 아론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눈이 마주치게 되면 방금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서로의 얼굴에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론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카란을 찾고 있다고 하셔서, 제가 직접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아아. 사무실을 빌려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죠. 그래서 자연스레 그쪽으로 간 모양입니다.”

카란은 미안하다는 듯이 아론에게 대꾸했다. 이미 자신의 상관과는 이야기가 된 모양인지 카란은 제 사무실을 아론이 쓰고 있다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카란은 나를 한 번 보았다가 아론을 향해 무뚝뚝했던 눈매를 휘었다. 눈치를 보는 듯한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그녀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아론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카란을 찾고 있었을 뿐이죠.”

“그렇군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론은 담백하게 말을 끝맺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그와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에 감정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론의 짙은 황금빛 눈동자에선 열렬한 감정이 철철 쏟아졌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나를 원하고 탐하고 욕정하는 저 깊은 눈빛.

나는 멀어지는 아론을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이런, 말레드레드.”

카란이 나를 보며 혀를 차 왔다.

“그런 넋 나간 표정을 하고 말다니.”

나는 흠칫해서 카란을 보았다. 그가 놀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았나? 아론나이드에게 친절한 대접을 받은 것이?”

그의 말은 교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친절함을 넘어선 극한의 대접을 받고 왔지만, 카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다.

“모두의 우상이신 분이니까요.”

“그래서 자네의 얼굴이 그렇게 상기된 건가? 아주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카란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사제로서 쉽게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니까.’

나는 얼른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요. 함께 와 주신 게 너무 좋았으니까요.”

“……흠.”

카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이라 설마 들킨 건가, 싶어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의연함을 가장해 그를 보았을 때, 카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자네도 다를 게 없군. 아론나이드라고 하면 완전히 얼이 빠지는 게 말이야. 안 그래도 이번에 그가 지휘관이 되었다고 하자 몇몇은 방방 뛰면서 난리도 아니었지. 정말 인기가 본대를 뚫고 황성까지 다다를 지경이야.”

카란은 의아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런 남자가 아직도 연인이 없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란 말이야.”

연인. 그 말은 왜인지 내 가슴을 움츠리게 했다. 육체적으로만 아론을 원하고 있는 것인데 왜 이리 연인이란 말이 갑자기 신경 쓰이는 것일까.

방금 전 아론에게 연인의 애정행각에 버금갈 만큼 완벽한 애무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의 뜨겁고 진한 눈빛이 아직도 내 살결에 머무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전에 느꼈던 아론의 농염한 혀 놀림을 생각하자 절로 아랫배가 쑤셔 오는 걸 느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고 손목이 떨려 왔다. 그가 주었던 쾌락의 진한 여운이 아직도 몸을 감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들키겠어.’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라 민망했다. 평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깊은 호흡을 하는 동안, 카란의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불공평하단 말이야. 누군 땡볕에서 풀을 뽑으면 가축 같고, 누군 땡볕에서 사람을 안내하면 왕자님 같으니. 그가 나이트가 되면 얼마나 더 인기 있어질 건지 예상이나 되나? 분명 제국 전체에서 아가씨들이 혼사의 말을 넣으려고 할 거야. 어쩌면 이곳에도…… 응?”

카란의 수다스러운 말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보고 있는 곳을 응시했다. 풀을 뽑고 있던 사제들이 어느새 아론을 둘러싸고 말을 걸고 있었다. 그네들이 흥분해 있는 게 느껴졌다. 아론의 차분한 표정과 달리 그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상기되어 있는 것이다.

카란이 눈썹을 씰룩였다.

“정말 뭐하는 거야!”

아론이 난데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카란의 미간은 더할 나위 없이 깊이 패어 들어갔다.

“이봐, 자네들! 어서 일 안 해? 설마 밤까지 풀을 뽑고 싶은 건 아니겠지?”

카란이 커다랗게 외쳤다.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 몸을 지탱하고 있는 지팡이가 흔들려 상체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사제들은 그의 서슬 퍼런 호통에 그제야 입을 다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론은 잠깐 고맙다는 의미로 카란을 보았다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 그런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게 인기가 참 많구나, 생각한 나와 달리, 카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제는 아론나이드가 아니라 체면 없이 매달리는 사람들이 문제지. 남녀를 따지지 않고 아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제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된단 말이야.”

카란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러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몰라. 아론나이드가 여기 있어서 분명 좋은데, 격이 다른 인기다 보니 여기 있는 게 썩 좋지만은 않군. 그 재능을 가지고 더 큰 곳에서 활약해야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도 들고 말이야.”

나는 가만히 카란을 쳐다보았다. 카란의 내심에 어느 정도 공감도 갔다. 아론이 인기 있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아론의 실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이 본대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가 머무르는 이유가 오직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최근 들어 그런 느낌은 더더욱 커졌다. 내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꼈을 때, 카란이 한탄했다.

“아아,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잔뜩 늘어놨군.”

그는 멈칫하고 지팡이를 바닥에 꽉 눌렀다. 그러자 그의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그렇게 자세를 바꿔 분위기를 환기한 그가 말했다.

“새벽부터 풀을 뽑아서 그런가. 답답해서 그런지 수다스러워졌나 보군.”

“항상 수다스러우셨는데요.”

내 악의 없는, 그러나 노골적인 지적에 카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나는 얼른 덧붙였다.

“전 알아서 흘려들을 테니 걱정 마세요.”

“…….”

카란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이내 그가 투덜거렸다.

“자네는 의외로 냉정한 데가 있어. 상냥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생각보다 말이 날카롭지.”

카란은 그렇게 다시 한번 나를 세심하게 평가한 뒤 물었다.

“그런데. 왜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았나?”

나는 잠깐 망설였다. 원래는 마왕의 경고를 전달할 셈이었다. 하지만 아론의 계획을 듣자 그게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그럴싸한 말을 꺼냈다.

“오늘부터 다시 작전에 투입된다고 들어서요. 누구랑 함께 작전에 들어갈지 궁금하네요.”

“자네도 마족의 등장으로 매우 놀란 모양이지? 평소에 안 하던 질문을 하고 말이야.”

그는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그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원래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어떤 사제와 어떤 작전에 투입되든 개의치 않는다. 그때그때의 환경에 맞춰서 싸우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누구와 팀이 될지 묻고 있자 카란은 의아함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하지. 근래 겪은 것을 보면 말이야.”

카란의 목소리가 동정심을 느낀 것처럼 측은해졌다. 시찰단으로 일하면서 고생했던 걸 모두 전해 들은 것인지, 카란은 주위를 슬쩍 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원래 이런 이야기는 미리 안 하지만, 자네를 생각해서 특별히 말해 주지. 일단 자네는 다른 팀에 소속될 거야. 펠은 치료가 아직 안 끝났고, 에일은 갑작스럽게 다른 본대로 이동하게 되었으니까. 팀에는 자네밖에 남지 않는 걸세.”

펠의 상태는 눈으로 보았으니 이해가 되었지만, 에일이 왜 갑자기 떠나가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굳이 ‘왜’라는 질문을 할 정도로 에일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어서, 나는 그러냐며 그냥 넘어갔다.

카란은 강조했다.

“당분간은 다른 팀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자네도 그렇게 알고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소에서 신성력 훈련을 하고 나자 새로운 팀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팀은 예전과 달리 3인 체제가 아니라 9인 체제로 새롭게 재편성되어 있었다. 나는 중앙 성기사단의 일부와 본대의 사제들이 모여 있는 팀에 새롭게 들어갔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눈에 익은 얼굴도 있었다. 바로 비키의 숙부라는 라드. 투구를 쓴 그였다. 라드는 같은 팀이 된 나를 보자마자 투구를 벗으며 활짝 웃어 왔다.

“이렇게 또 함께 싸우게 되다니.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지네요.”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웃고 있는 얼굴만 보건대 내게 호감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나는 나를 향해 실실 웃고 있는 그에게 짤막한 미소만 지어 보냈다. 라드는 그런 나를 따뜻하게 쳐다보고는 앞으로 나섰다.

“예전과 다른 팀 구성이지만 목적은 똑같습니다. 마물과 마족, 그 사악한 것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것이요. 그것만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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