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왜 이렇게 눈을 빛내며 말하는 걸까. 나는 살짝 두려워져서 두 손을 저어 사양하겠노라고 진지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비키를 찾아왔다. 그녀는 내 눈치를 잠깐 보고 비키에게 속닥거렸고 비키는 이내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중앙에서 연락이 왔나 봐요. 가 봐야겠어요. 비숍에게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했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내가 그런다고 하자 비키는 살짝 웃었다.
“고마워요. 우리 대화는 저녁에 더 해요. 제가 말레드레드 숙소에 찾아갈게요!”
손을 흔든 비키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아차 싶었다. 지금 내 침대에 아론이 누워 있지 않은가. 알몸으로 누워 있는 그를 비키가 보아서는 안 될 일이다. 경악할 그녀와 쫙 퍼질 소문을 생각하며 몸을 흠칫했다. 비키가 오기 전에 미리 숙소 밖에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치료소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 속에서 아까 비키와 이야기를 나눴던 시찰단 동료를 찾았다.
비숍. 그는 마기에 침식당한 정도가 커서 신성력으로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거뭇하게 변한 얼굴색과 바짝 마른 입술은 병색이 깊어 보였다. 그의 온몸에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고약한 약초 냄새가 끝없이 올라왔다. 나는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비키는 일이 있어서요. 먼저 돌아갔어요.”
“…….”
“얼른 회복되길 빌어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그렇게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고통이 가득한 눈으로 그가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왠지 가슴이 시큰해졌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가슴에 숨겨진 온기를 끌어내 손끝으로 피워내자 하얀 빛이 일어난다. 빛은 빠르게 비숍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순식간에 비숍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는 다소 놀란 눈이었다. 나는 멋쩍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회복하는 데 큰 영향은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치료 사제가 아닌 한 신성력은 치료하는 효과가 미미하다. 따라서 나는 별거 아니란 듯이 말했지만 그는 감동했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였다.
“가 볼게요.”
빤히 보고 있으면 민망할 듯싶어서 나는 작별의 말을 건네고 치료소를 나오려 했다.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신성력이 나오는군요?”
펠이었다. 그는 목발을 짚은 채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목발을 움직여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향한 표정은 엄숙했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익숙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어둡고 의구심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날, 마물에게 당할 순간에 내 몸에서 마왕이 심어놨던 마기가 쏘아져 마물을 공격한 것이다. 펠은 그걸 보았고, 그게 무엇이냐고 경악하여 묻기까지 했다.
‘깨어났을 때 다 잊었다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그는 모든 걸 기억한 채다. 나를 파헤치려고 쏘아보는 눈동자가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나는 어금니를 물기까지 했다.
긴장하는 나를 알아챘는지, 펠은 자신의 몸을 슥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전, 아직 치료 중입니다. 마물, 그 사악한 것에 당한 상처가 아직도 전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죠.”
자세히 보니 그의 피부는 군데군데 헐어 있었다. 신성력의 치료로도 다 아물지 못한 피부는 아파 보였고, 처참했다. 내가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마물이란 존재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와 그 마족, 그리고 마왕까지. 모두 멸절할 때까지 절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요.”
“…….”
“그런 의미에서 묻고 싶습니다. 지난번, 그대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검은 기운은 무엇입니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모르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미 변명거리를 생각해 둔 터다. 그러나 펠은 만만찮았다.
“마물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할 때, 그대의 몸에서 빠져나와 마물의 목으로 달려든 기운 말입니다. 몹시도 사악하고 암담했던 그 기운. 우리의 신성력과는 정반대되는 마기 말입니다.”
펠은 그 힘이 마기라고 분명하게 단정 짓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당시 경황이 없었던 터라.”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몸에서 검은 기운이 나왔다고요? 그것도 마기라 생각되는? 보다시피 전 신성력을 뿜어내는걸요. 마기는 뿜어낼 수 없어요.”
펠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확신을 부술 만한 말을 했다.
“아니면 제가 마기와 신성력을 동시에 뿜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닙니다.”
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도 두 힘을 동시에 낼 수 없을 겁니다. 위대한 신도 사악한 마왕도 불가능하죠.”
나는 가만히 펠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펠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백하듯 말했다.
“그대의 활약을 챙겨 듣고 있었습니다. 신성력으로 동료들을 구했다고 하더군요. 다수의 마물에 홀로 맞서며 사람들이 피할 시간을 벌기도 하고, 동료를 구하려 마물에게 무모한 공격을 펼쳐 시선을 끌기도 하고……. 솔직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제 눈으로 신성력이 발휘되는 걸 보지 않고선 그대가 사제란 걸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
펠의 눈이 서늘하게 번쩍였다.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쓰고,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고도의 전술을 부리는 고위 마족인지.”
“……펠.”
“알다시피 그런 마족들이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계를 혼란에 빠트려 우리의 세계를 호시탐탐 노리는 괘씸한 의식체들이.”
“전 인간이에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펠의 추궁이 두려웠다. 이러다 내 이중생활이 들통 나는 것이 아닌지 간담이 서늘해진 탓이다. 나는 강조하듯 말했다.
“분명히 소환사라고요. 당신처럼 신성력을 뿜어내 마물을 상대하는 사제란 말이에요. 그런 제가 마기를 뿜는 마족이라니, 너무 황당한 추궁이네요.”
“…….”
펠은 말이 없었다. 내 속상하다는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봤을 뿐이다. 내가 입을 다물자 펠의 입술이 열렸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물의 힘이 그대의 몸에 반사되어 튕긴 걸 제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눈빛은 냉랭했다. 자신의 말을 자신이 믿고 있지 않을 때의 눈빛이었다.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면서 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얼른 몸을 회복하시길 빌어요. 가 볼게요.”
그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 않다. 불편한 추궁도 불쾌한 눈빛도 모두 기분 나쁘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사실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이마를 찡그린 채로 빠르게 치료소를 빠져나왔다. 펠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돌아볼 이유 따윈 없었다.
“……말레드레드.”
아론은 막 상의를 꿰어 입던 찰나였다.
“왔군요.”
안도하듯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급하게 옷을 입는 동작이 동시에 멈춰졌다. 반쯤 열린 셔츠 사이로 단단하게 짜인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한다. 그는 막 나가려던 게 분명했다.
‘그렇게 고되게 움직이고도, 여전히 나를 찾으려고?’
그 생각을 하자 사나워졌던 마음이 온화해지는 걸 느낀다. 방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불편함, 펠이 보내는 의심에서 스스로가 찔려 불쾌했던 감정들이 조금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나는 마왕과 나의 관계를 떠올리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어난 거야?”
“……네.”
“몸은 괜찮아?”
“네. 그런데 저보단 말레드레드야말로 괜찮은지…….”
“난 괜찮아. 마지막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순간 아론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나는 멈칫했다. 아론의 반응이 너무 순수했다.
“풋.”
“…….”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부끄러워하는 그가 어쩜 이토록 어여뻐 보이는지. 나는 그에게 절로 몸을 기대고 말았다. 아론은 자신의 품에 안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른 그의 팔이 내 허리에 달라붙었다. 기다려 왔다는 듯이.
나는 그 빠름과 확고함에 웃으면서 물었다.
“이제야 아침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어?”
“……네. 꿈인가 싶었는데. 아니었군요. 제가 정말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아론은 띄엄띄엄 느린 목소리로 속죄하듯이 말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또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 피곤했던 거니까.”
몸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도 나를 안아 주느라 몸의 모든 기력을 끌어다 썼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아론은 피곤하면 야해지는 편이구나. 신기해라.”
“…….”
아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리는 것에 더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한없이 진지함과 정숙함만이 가득했다.
“격하게 나온 건 맞지만, 어제 했던 말 중에 거짓인 건 없었습니다.”
아론은 나를 더욱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체온과 체향에 몰락하는 문명처럼 허물어졌다. 온몸을 그에게 의지한 채로 귀를 기울이자 정중한 듯 달콤한 목소리가 빠져나온다.
“전 정말 말레드레드에게 내 것이라는 낙인을 찍고 싶어요.”
“아론.”
“아주 지독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