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58화 (58/220)

58.

카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쓰린 미소를 베어 물었다.

“훨씬 중요한 지역, 즉 수도를 방위하는 곳으로 가면 아론나이드에게도 좋을 거야. 출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황제 폐하의 눈에도 들 수 있겠지.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나이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안 좋은 일이지. 강한 아군을 잃는 건 전력의 상당한 손실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아론이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아론을 친숙하게 지칭하고 말았다. 내가 멈칫한 것과 동시에 카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론? 매우 다정한 어감이군.”

묘하다는 듯이 눈이 가늘어지자 나는 멈칫해서 변명했다.

“매일 그분을 생각해서 그런가 봐요. 한데, 그분이 간다고 하면 애초에 막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다행히 카란은 내가 뻔뻔하게 나가자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고는 다시 말했다.

“그분이 떠난다고 결정했다면요.”

아론의 결정은 아론의 것이다. 내 결정에 아론이 영향을 주는 것이 싫었듯이 아론의 결정에 누군가 간섭하는 것도 옳다고 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가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이토록 심장이 불안하게 울리는 걸까. 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질까. 육체적 욕구가 내 삶의 기본 원칙을 뛰어넘은 걸까?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 불안한 심장 박동을 차가운 이성으로 억누르려 했다. 그와의 관계는 육체적인 게 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물론 그렇지.”

카란은 대답했다.

“사실 그게 가장 핵심이야. 본인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가. 그래서 지금 곤란해진 거지만.”

나는 멈칫해서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안 가겠다고 하는 건가요?”

“언제나처럼. 공식 승격을 정면으로 거부했지.”

카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본대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 놓은 것처럼 구는 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

나는 살짝 눈가가 떨려 왔다. 아론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다. 아니. 명확하게 확신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 기억의 강렬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 말레드레드가 이곳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아론은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내 삶에 자신의 삶을 겹쳐 두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끝까지 지켜보겠노라고.

설사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을지라도.

카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어봐도 말을 안 해 준다고 들었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야. 다른 지역에 지원을 나갔다가 소거 작전을 무리하게 끝내고 달려왔다고 하는데…….”

카란은 골몰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거 보면 동료애가 남다른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좀 애매하단 말이야. 모든 이에게 거리를 벌려 두니까. 예의는 바르다지만 철저히 동료 관계만을 유지하지.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마음은 결코 내어 주지 않아.”

카란은 이미 분석을 끝낸 얼굴이었다. 그는 확신하듯 덧붙였다.

“그가 밤을 새워 베리스에 도착한 걸 보면, 이 본대에 무언가 있는 것이지.”

“밤을 새워서요?”

나는 뜻밖의 부분을 짚어 냈다. 카란은 눈을 빛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 무려 이틀 날밤을 꼬박 새워서 달렸다고 해. 지원 나간 곳이 베리스와 꽤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쉬지 않고 달렸을 거야. 그 상태로 마물과 마족을 상대한 걸 보면 정말 대단하지. 그를 따라다녔던 기사들은 그나마 끌고 간 마차에서 잠을 번갈아 가며 숙면했다고 하는데, 아론나이드는 그런 것도 없었다고 했어.”

카란은 이제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두 혀를 내둘렀다고 하더군. 아마 어제 침소로 가자마자 곯아떨어졌을 거라 보는데. 지금까지 활동이 없는 걸 보면 말이야.”

카란은 대단한 성기사라고 거듭 그를 추켜세웠다. 나는 그가 잘못 추측하고 있다고 말해 주지 못했다. 아론은 어제 그 상태로도 하룻밤을 더 지새웠던 것이다.

대단한 성기사는 쉴 새 없이 마물, 마족과 싸우고, 이틀 동안의 여정에서도 잠들지 못했다. 한 여인의 악몽을 쫓아 주고 그녀의 몸에 신성력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거기다 내 쾌락까지 어루만져 주었으니.’

아론이 쓰러질 만하지 않았냐고 생각하며, 나는 쓰리게 웃고 말았다.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힐 정도였다.

카란은 마침내 허탈한 목소리로 정의를 내렸다.

“그는 괴물 같은 사람이야.”

내가 덤덤하게 있자 카란이 멈칫했다.

“괴물 같다는 표현은 너무했나? 모두가 숭상하는 성기사에게 말이야.”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카란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지 않을까요. 하는 눈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카란은 자신이 이런 부분까지 신경 썼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운지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솔직히 아론나이드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질 않아. 잘난 배경 말고도 완벽한 능력과 막대한 신성력이 있지. 외모는 또 어떻고. 정말 엘크리찬이 재림한 것 같다는 생각만 들어.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께서 직접 이 세계로 현신하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란은 허망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 웃음에서 그가 받은 충격을 적잖이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아론을 지켜보는 이라면 모두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대단하고 경이로운 사내는, 그게 경악인지, 동경인지만 다를 뿐 모두 그에게 경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나마 나는 그의 인간다운 모습을 알고 있어서인가.’

아론이 아주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어렸을 적에는 나만 따라다니던 울보 소년. 커서는 내게 매달리는 달콤한 미남자. 이 두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친숙한 아론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감탄하고 우상화하는 아론은, 아주 멀리 있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침대에 마주 보고 숨결을 나눌 상대로 느껴진다. 매우 가깝고도 은밀한 남자로 말이다.

‘너무 가까워져서 불안할 정도로.’

나는 아침의 아론을 떠올렸다. 나만을 원한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해 오는 자. 그 외모로 수없이 많은 여자와 즐길 수 있을 텐데, 그의 시선은 지독스럽게 내게 꽂혀 있었다. 나는 그 고지식할 정도로 순정적인 얼굴을 떠올려 보고는 카란을 보았다.

카란은 이내 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졌군. 상부에서 시킨 일이 어지간히 싫었나 봐.”

“아론나이드를 설득하는 거요?”

“그것도 있고. 이번에 따라온 중앙 기사단 때문에 할 일이 늘어났지.”

카란은 서류를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분간 여기에 머물 거라서 바꿔야 할 게 많거든. 머물 곳부터 먹을 것, 생활하는 것, 훈련하는 것까지. 중앙 기사단과 함께해야 하니 한동안 혼란스러울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란은 그런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의 털털한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점이 걱정된다는 듯이 불안한 눈빛이었다.

은밀한 경고가 이어졌다.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강력한 마족이 나타났다는 건 우리의 싸움이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거란 의미니까. 아군이 늘어났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야. 적이 그만큼, 그보다 더 늘어난다는 말이니까.”

카란은 소환사 선배로서 충고하고 있었다.

“선두에 서는 자네라면 특히나 명심하게. 마족들은 소환사들을 먼저 공격하곤 하니까. 자네는 늘 죽음 앞에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목 뒤가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카란의 천막을 나와, 그대로 비키를 찾아 나섰다. 어제 서둘러 이야기를 끝낸 것도 신경 쓰였고, 비키가 중앙으로 다시 돌아갈 거란 말도 카란에게 들었기 때문에, 미리 작별 인사를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란은 내일부터 내가 다시 소탕 작전에 투입될 거라 말했다. 볼일이 있다면 오늘 봐두라고 강조하는 그를 보니, 만만찮은 일정이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쳐 온다.

“중앙에서 온 관리요? 치료소에서 본 것 같은데요?”

나는 물어물어 비키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아픈 사제들을 돌보는 치료소에 있었다. 그녀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시찰단 중에 가장 크게 다친 이들이었다. 그동안 정이 든 것인지 비키는 특유의 발랄함으로 보호소 내의 침울함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나중에 수도에 오게 되면 우리 가문에서 나비들이 춤추는 광경도 보게 될 거예요. 수천 마리의 나비가 우리 일레그레 가의 정원에 주기적으로 찾아오거든요! 그 환상적인 광경을 보고 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싹 날아가요!”

발랄한 목소리에 내 기분까지 가벼워지는 것 같다. 웃고 있던 비키는 머지않아 나를 발견했고 곧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레드레드! 절 만나러 온 거예요?”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기쁘단 듯이 깡충깡충 뛰었다. 어린아이 같은 반응에 내가 당황할 무렵, 근처에 있던 치료 사제가 ‘소란스러운 행동은 심신 회복에 안 좋습니다.’하고 차갑게 말을 날리자 굳어지고 말았다. 비키는 입술을 삐죽이고는 내 팔을 잡았다.

“나가서 이야기해요.”

팔짱을 자연스럽게 껴오는 그녀를 따라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는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요. 말레드레드를 저녁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다니 너무 기쁘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시찰단으로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았고요.”

“제가 할 말이죠. 많이 배웠고 안전하게 살아남았어요. 말레드레드를 보면서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최선이 뭘까, 생각하게 되었고요.”

비키는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희생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게 되었어요.”

“너무 좋은 해석인데요.”

나는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비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쥐기까지 했다.

“그냥 예의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전 말레드레드에게 감동했는걸요? 제 일이 이런 것이구나, 사람을 구하는 중한 일이구나, 자부심까지 느꼈어요! 많은 사제가 있고, 또 그런 사제를 보고 자랐지만, 말레드레드만큼 제 마음속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어요!”

열정적인 동작으로 최고의 칭찬을 늘어놓는 그녀였다. 나는 결국 진하게 미소 짓고 말았다.

“고마워요. 굉장히 뿌듯해지네요.”

이번만큼은 멋쩍은 미소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 웃었다. 그러자 비키의 얼굴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어우, 말레드레드는 정말 능란하게 제 마음을 가져간다니까요? 정말 나중에 우리 가문으로 꼭 놀러 와요! 제가 사람을 보낼 테니 말레드레드는 그냥 오기만 해요. 같이 목욕도 하고 마시지도 해 주면서 즐겁게 노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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