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뭐지.’
귓가에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날이 밝았는지 두터운 천막에는 둔한 형태로 아침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어제의 힘들었던 전투가 떠올랐고, 마족이 나를 죽이려던 순간이 기억났으며 결국 아론이 빛을 내뿜으며 나를 구했던 게 생각났다. 잠시 멍해졌다.
‘아론이 나를 지키겠다고 했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생각해 보면 아론은 어렸을 적부터 고집스러웠다. 몸이 약하다거나 잘 맞고 잘 울었다거나 하는 것과 달리 자신이 마음먹은 것에 있어서 끈질기게 추구하는 면모가 있었다.
남들에게 맞으면서도 꾸준히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나, 힘들어하면서도 나를 따라 산이든 강이든 쏘다녔다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별거 아닌듯하지만 이런 부분은 아론을 단순히 허약한 소년이 아니라 특정 부분에 있어서 매우 집념이 강한 소년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나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도 그러한데.’
이 감정이 단순히 성욕에서만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론의 깊은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어딘가가 불편해져 온다. 마치 억누르고 억제하려고 하는 감정들이 아론이란 존재를 맞닥뜨려 당황한 것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형상이라고 할까.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거나, 언제든지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거나 하는 내 평정심을 뒤흔드는 감정. 그 감정들은 애틋한 순정이라 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론 지난하고 고지식한 애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감정들은 내게 매력적이지 않아.’
나는 굳이 그런 결론을 끄집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내 손을 따라서 누군가의 팔이 딸려온다. 나는 그게 내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졸고 있는 아론의 팔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 왔지.’
스르륵 내려온 금발 머리 아래 단정히 감긴 두 눈이 보인다.
아론은 소리 없이 잠들어 있었다. 편한 복장으로 내 침대 옆에서 졸고 있는 아론은 어쩐지 피로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나를 밤새 간호한 걸까. 그 역시도 마족과 싸우느라 고단했던 하루였을 텐데. 왠지 그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낯설지 않자 나는 가슴이 북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론.”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그는 깨지 않았다. 깊은 잠이 든 것인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는데, 내가 손을 빼내려 하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아론은 내가 눈을 뜬 걸 보며 반갑게 물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내 상태를 확인하는 그를 보면서 네가 더 아픈 얼굴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론이 내 건강함을 확인하고 너무 안도한 얼굴을 하자 왠지 그의 그런 평온을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다.
아론은 다행이란 듯이 말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신 것 같습니다.”
잠깐 신성력을 발휘해 내 몸의 상태를 점검해 본 그였다. 치료하는 사제처럼 굴고 있는 그가 귀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나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고 물었다.
“오늘 새벽부터요. 마지막 말을 나눴던 게 신경 쓰여서 와 보았는데, 비명이 들려와서 허락 없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론은 가만히 사과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악몽을 꿨는데, 누가 나를 구해 줬어.”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순정이 비치는 눈동자와 그 안의 열정적인 일렁임을 들여다보며 조금 웃고 말았다.
“아론, 네가 말이야.”
“다행이네요.”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말투와는 달리 눈빛은 고집스럽고 끈질긴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욕망과 선망이 지독한 형태로 변화한 것처럼.
“제가 말레드레드를 꿈속에서도 지킬 수 있어서요. 뿌듯합니다.”
“내 꿈이잖아. 멋대로 만족하지 마.”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멈칫했던 아론은 곧 미소를 머금었다.
“제 꿈에서도 말레드레드가 나오는걸요. 늘 아름답게 등장해 절 구원해 주니 저처럼 만족해하셔도 좋습니다.”
아론의 말은 재밌었다. 나는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을 가볍게 받아 주자 왠지 반갑다고 할까. 동시에 그의 창백한 볼에 시선이 쏠렸다. 나를 새벽 내내 돌보았던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 왠지 가슴이 묵직해졌다.
“어제 말이야.”
아론은 어느새 옆에 놓인 물을 챙겨 주었다. 목이 말랐던 나는 건네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를 바라봤다.
“감사 인사를 못 한 거 같아. 어찌 됐든 네가 나를 구해 준 게 사실인데.”
아론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가 날 지키겠다고 말한 걸 알아. 어린 시절의 맹세지만 지금도 유효하게 그걸 이어 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내 앞길까지 정하지 마. 나는 널 원망하고 싶지 않아.”
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반복했다.
“정말이야. 너랑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으니까.”
아론은 멈칫했다. 그의 표정은 쓰리다는 듯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욕망이 전부인 관계로 말이죠?”
“……아론.”
순간 그가 나를 내리누르며 내 위로 올라왔다. 꽉 잡힌 팔이 조금 아파 왔다. 내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자 얼른 손에서 힘을 푼 그였지만 그렇다고 자세가 변하진 않았다.
“저라고 왜 말레드레드와 좋은 관계로 있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론의 손이 내 팔을 위로 들도록 만들었다. 나는 상체를 앞쪽으로 내민 채로 자세가 불편하다는 듯이 몸을 꿈틀거렸다. 아론은 그런 나를 어둡고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레드레드 안에 제 것을 깊게 삽입하고.”
“아, 아론…….”
“그 안을 제 정액을 가득 채워.”
“읏…….”
아론의 눈길이 뜨겁게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취향이면서, 나를 원한다고 말해 오는 남자. 그의 유혹 앞에서 평정심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서든 저만 생각나게 만들고 싶은데.”
그러나 욕망 뒤에 숨겨진 감정은 더욱 애절했고 더욱 짙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과 감정, 머릿속의 잡념들이 모두 그에게 빨려 들어가 공백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텅 비어 버린 나에겐 오로지 어렸을 적의 그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는 광경만이 존재했다.
그 시선 속, 서로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결론 내릴 수 있을까. 나란 존재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온전하게 생각하기 전에, 아론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저를 내치시겠습니까?”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처절한 물음은 황홀할 정도로 처연했다. 나는 마음이 부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냉철하게 그를 대하자고 다짐해도, 그라는 온풍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더운 바람에 흔들리고 마는 들꽃처럼 나는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정말 바람에 비유될 수 있을까.’
스쳤다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벼운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아름답고 애틋한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말레드레드만을 원하는 저를요.”
아론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팔을 쥐고 있는 손에도 기운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 버려진 듯한 눈빛을 한 사내를 보면서 요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강렬한 형태의 뭉클함과 애틋함, 그리고 느른한 형태의 욕망과 욕정이 뒤섞인다. 그것들은 타인으로부터 거리를 벌려 두려는 내 이성을 녹이면서 내 육체를 휘감아 나른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졌다는 듯이 묻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좋아?”
답은 다른 형태로 원한다. 나는 그를 보면서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몸으로 증명해 봐.”
아론이 멈칫했다. 그가 내 손을 꽉 쥔 채로, 짐승처럼 키스해 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아……!”
아침부터 뜨거운 정사에 휩싸이는 사제들이 있을까? 있더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천막이었고 곧 있으면 조회가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이 무척 조여 와요.”
아론이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달콤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허리가 내 하체에 바짝 밀착될 때면 머릿속에서 하얀 섬광이 지저분하게 튀어 올랐다.
“으읏, 아…….”
“말레드레드도 느껴지죠? 제 것을 꽉 물고 있으니까요.”
편안해진 말투는 관능적인 음탕함을 자연스레 머금었다.
“흥건하게 물을 만들어 내며 제 것을 빨아들이다니, 정말 기분 좋아요.”
나는 그가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자 요청하고 말았다.
“부탁이야, 너무 빨리 움직이지…… 흣!”
그러나 아론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허리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음을 뿐이다.
“아, 아, 아……!”
덕분에 내가 자지러지듯 탄성을 내지르자 아론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론은 내가 흥분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렸다는 듯이 허리를 내리눌러 찌르는 각도를 크게 했다. 그러자 격한 쾌락의 파도가 몰아쳐 온다. 나는 그에 떠밀려서 이곳이 숙소라는 것도 잊고 크게 신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읏……!”
아론의 움직임은 점점 거세어졌다. 나는 그에게 매달린 채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너무도 격렬하게 움직여서 이러다가 내 몸이 녹아 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의 성기가 내 다리 사이에 깊게 틀어박힌 채로 안을 쑤실 때마다 몸이 닳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를 때마다 이것의 한계가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생겼다.
“으흣, 읏……!”
나는 또 한 번의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아론은 내가 여러 번의 절정에 이르는 걸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또 젖게 해 드릴게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댔다.
나는 숨이 금세 가빠 왔다. 그때,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리자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으나 아론의 열정적인 움직임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를 완전히 참을 수는 없었다.
아론은 그런 나를 뜨거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말레드레드의 몸에 제 것이라는 표시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뭐? 으, 읏…….”
아론은 내가 바깥을 신경 쓰고 있자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안을 달콤하게 휘저어 오는 그의 성기에 입술을 꽉 물고 말았다. 아론은 그런 나를 음험하게 응시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말레드레드의 몸에 제 입술로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놓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