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자네와 일할 수 있어 기쁘군. 앞으로도 협동하는 걸 고대하지.”
“감사합니다.”
아론은 깍듯하게 답했다. 지위상 기사단장이 위였기 때문에 성실한 아론은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는 듯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기사단장은 그의 태도가 좋은 듯이 내내 흐뭇한 눈빛이었다. 아마도 황족이라는 배경을 가진 아론이, 성기사의 임무에 매진하고 겸허하게 언행을 한다는 것은 엄격한 기사의 입장에선 좋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기사단장은 호의 가득한 말로 대화를 끝냈다.
“그럼 자네 지원 부대가 앞장서게. 우리는 뒤를 따르겠어.”
아론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 치료가 끝나자 나를 마차에 데려다준 이도 물론 아론이었다. 아론은 부상자들이 가득한 마차에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감사하다고 했다.
“아론나이드랑 친분이 있는 거예요?”
신음 가득한 부상자 마차에서, 느닷없이 성기사 하나가 물어왔다. 그녀는 그 유명한 아론이 나를 안아 데려왔다는 것에 강한 호기심이 인 듯한 눈이었다. 붕대를 감은 팔 말고는 상태가 멀쩡한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 말고도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내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유연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근처에서 아파하고 있어서 데려다주신 거예요.”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든지, 현재 그와 몸을 섞고 있다든지. 이런 건 모두 밝힐 수 없는 정보다. 대중의 무관심은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이었으므로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워낙 친절하신 분이니까요.”
그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예의 바르고 정중하신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분은 아니어서요. 가까이 다가갈라치면 거리를 두셔서 벽이 있게 느껴진다고 할까요?”
여인은 뭉근하게 웃었다. 어딘가 묘한 느낌이 나는 미소였다.
“친해지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우리 본대에 지원을 나오셔서 몇 번이나 말을 걸었는데도 답변만 짤막하게 해 주시고 몸을 돌리셨어요. 임무 외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여인은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좀 놀랐어요. 방금 전에 보니, 당신을 무척이나 걱정하는 눈빛이라.”
나는 멈칫했다. 웃는 듯한 낯이 묘하다고 느껴졌는데, 그건 나를 파악하려고 꾸미며 웃었기 때문일까?
나는 여인의 노련한 질문에 오히려 모른 척 순진하게 대꾸했다.
“그래요? 전 딱히 못 느꼈는데. 정말 제가 특별하게 느껴졌을까요? 아파하는 게 가여워서가 아니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자 여인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음, 모르죠. 확실히 친절하신 분이니까.”
“그런가요.”
아쉬운 듯 한숨을 흘려 보자 여인은 도리어 위로해 왔다.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특별한 의미는 아닐 테니까.”
그녀는 배려해 주는 척 말했지만 눈빛은 냉랭했다. 결과적으로 내 대답에 안도한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아론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깐 그녀를 살폈다. 격한 전투로 흙먼지를 갑옷 위로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체형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꾸미면 상당한 미인일 터. 아론은 어디서나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탁 트인 짐 마차의 풍경이 들어온다. 늦은 밤.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시체의 산은 처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붉다. 불길에 사로잡혀 이지러지고 사그라지는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니 한없이 마음이 숙연해진다. 함께 전투를 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미안했고 동시에 나는 살아남아 정말 다행이지 않냐는 안도감이 들었다.
치솟는 불길을 따라서 이 두 모순적인 마음이 너울너울 섞여 갔다. 마냥 선하지도 마냥 악하지도 않게. 나는 왠지 그 불길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본대에 도착하자 상관들이 나와 있었다. 카란은 시찰단을 보자마자 ‘고생 많았군.’ 하며 귀환의 기쁨을 표시했다. 무뚝뚝한 빛이 담긴 눈가에는 약간 물기가 맺혀 있었다.
“자네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어.”
카란은 변명하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의 섬세한 성품을 알고 있던 나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찰단은 놀란 얼굴을 하며 카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민망했던지 카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사무적인 목소리로 숙소에 돌아가라고 명했다.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모두 숙소로 간다.”
카란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오늘은 살아남은 거로 족하니까.”
그의 말은 가슴에서 맴돌았다.
나는 다쳤던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멀찍이서 아론이 보였으나, 그는 성기사와 소환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원 부대를 이끈 지휘관으로서 상부에 보고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밤이 여전히 길 것만 같았다.
“무사했군요! 이야긴 들었는데, 실제로 보기까진 안심이 안 되더라고요!”
비키는 날 발견하자마자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그녀는 다른 마차에서 우리가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쳤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에 정말 기뻐했다고 한다. 나는 비키에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수고는 제가 아니라 말레드레드랑 사제들이 한걸요! 전 사람들을 대피시키면서도 이러다가 전멸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영주님하고 가신들도 모두 두려워했고요. 그런데 말레드레드와 시찰단이 잘 버텨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비키는 그러면서 슬쩍 아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분, 지원 오신 성기사님 덕분에 진짜 깜짝 놀랐어요! 커다란 검에서 흰 빛이 펑 하고 쏟아지니까 마물과 마족이 맥을 못 추고 스러지는데! 와! 정말 멋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어요!”
“비키도 봤군요.”
나는 살짝 웃었다. 아론을 향한 칭찬이라니, 왠지 내 일처럼 기쁘고 기분이 온화해진다. 비키는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영주님하고 가신들하고, 그리고 영주민까지! 모두 감탄했어요! 신성력이 그토록 강대하고 압도적일 줄이야! 다들 엘크리찬의 전신이 왔다고 떠들었어요!”
엘크리찬의 전신. 그 과감한 칭찬은, 젊은 나이에도 신성력을 무한대로 뿜어내는 아론에게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아마도 이 일로 다시 중앙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까.
그가 떠난다. 하고 생각하자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방금까지 온화했던 기분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인데 이 기분은 무엇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쉽기 때문일까? 그와의 육체관계를 종료해야 해서?
“아론나이드 드올릭 펠더. 정말 근사한 이름이에요. 저런 분이 어디 계셨는지. 계속 함께 싸워 준다면 정말 든든할 거 같아요!”
그와 헤어진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그를 다시 못 본다는 사실이.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거 같은데.’
기분이 좋았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워지는 극심한 감정 변화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이상한 건 그러한 느낌을 예전에도 아론이 떠난다고 생각할 때 받아 봤다는 것이다.
‘아론이 떠나는 게 그토록 싫어서 그런가?’
가슴이 쿵쿵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끼면서 비키를 바라보았다.
“말레드레드도 그렇죠? 저런 분하고 본대에서 함께 일한다는 건 정말 영광일 거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비키.”
지친 몸, 마모된 정신. 마물과 고되게 싸운 뒤라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대화의 주제가 계속 아론인 것도 어딘가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 이만 숙소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래요, 말레드레드! 가서 쉬어야죠! 우리 잘 쉬고 내일 이야기해요.”
비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허름하지만 익숙한 침대를 보자 피로가 몰려온다. 나는 씻고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마물들에게 시달렸다. 마계로 소환된 것이 아니다. 다행히 마왕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나는 일반적인 ‘악몽’이라고 부르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어둠의 공간에서 마물들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내 다리를 빼앗았고 팔을 뜯어갔으며 배에 촉수를 관통시켰다. 죽음을 목도했을 때, 나는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치고 헛된 저항을 그만둬. 삶은 그렇게 의미 있지 않으니까’
마족 여자는 위로하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눈빛에는 기만과 조소가 가득했다.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마족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가 존재했다.
어둠 그 자체, 마계의 상징인 남자가.
그는 건조한 붉은 눈을 한 채 나태함이 깔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유희일 뿐이야.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그대는 재밌는 인간이니까 이 상황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겠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내 상처를 곪게 만들었다. 죽음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그를 멍하게 바라보는 이는 물론 나였다. 나는 그가 주는 쾌락에 넋이 빠졌고, 그가 뿌리는 마기에 다른 인간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내 마기의 불편한 힘이 나를 괴롭혔다.
“으, 읏……!”
얼마나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했을까.
“……드레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온기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꿈속이었지만 나는 내 몸을 감싸는 환한 빛을 느꼈다. 내가 수녀원에서 발견하고 그토록 안도했던 빛. 나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 온기다.
“……괜찮을 겁니다.”
뭉클하게 와 닿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따라서 신성력이 내 전신, 내 혈관 깊숙이까지 파고들었고, 경직된 근육과 아픈 상처들을 어루만졌다. 나는 나른해졌으며 마음이 온순해졌다. 내 손에 와 닿는 뜨거운 체온을 느꼈을 때,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