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54화 (54/220)

54.

“……아론.”

그의 대검에서 차마 사라지지 못한 신성력의 조각이 은은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빛을 흩날리며 서 있는 사내는 고고해 보였다. 마치 그에게만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멈춰 선 사내를 보며 나는 애타는 심정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도 될까? 그와의 거리를 중시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고 해도 될까?

살았다는 안도감. 구원을 받았다는 행복감이 마음을 그득하게 채운다. 나는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어쩌면 마지막에 그를 떠올렸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고, 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크게 만들었다.

이런 생각과 번민에 사로잡혀 망설이고 있는 동안, 그가 어느새 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가 움직였다. 한걸음에 내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무릎을 꿇고 내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깊은 상처가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아론.”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져 있었다. 독으로 거뭇해진 내 살갗을 보자 분노가 치민 듯 눈빛은 격렬하게 일렁였다. 지독하게 무언가를 아끼고자 한 것이 상처 입었을 때 보일 수 있는 시선이었다. 나는 왠지 그의 짙은 소유욕이 느껴져 숨이 막혀 왔다.

“애초에 함께 이곳에 와야 했습니다.”

“……아론.”

“제 실수입니다.”

“이게 어째서 네 실수야? 시찰단으로 빠질 줄 어떻게 알고.”

내 다독이는 말에 아론이 크게 움찔했다. 그의 눈빛은 의미심장하게 진해져 있었다. 그때, 무언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설마…… 날 시찰단으로 추천한 게 너였어? 카란은 상관이 추천했다고 했는데…….”

“상관에게 직접 말을 넣은 게 접니다. 지원을 나가 있는 동안 말레드레드를 보호할 수 없으니까요. 좀 더 안전하기를 바라면서…….”

“……아론.”

내 표정이 차가워졌다. 아론은 입을 다물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나는 마음을 다시 고쳐 잡고 냉랭하게 말했다.

“내 임무를 네 맘대로 조정하면 안 돼.”

아론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반쯤 가려진 그의 눈빛에는 자책감보다 반항심이 있었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또다시 그러겠다는 의지가 느껴져서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고 황당했다. 그에게 확고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위험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내 임무를 결정하면 미래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나는 네 탓을 하게 될 거야.”

“……말레드레드.”

아론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 부분을 짚어서 조금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난 그런 거 싫어. 내 모든 미래에 네 탓을 하게 되는 거.”

인생을 주어진 경로로 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내 행동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중요했다.

설사 내가 나태하고 가식적인 삶을 살더라도, 그 또한 내가 결정한 삶이고, 내가 감당할 미래다. 남 탓을 한다든지, 다른 누군가를 원망한다든지 해서 변명처럼 내 삶의 행태나 경로를 방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남들에게 지나친 의존을 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영향받는,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따라서 나는 아론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론 그렇게 하지 마.”

아론의 표정이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나는 조용하지만 날이 선 목소리로 못 박았다.

“널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는 게 싫거든.”

“말레드레드, 전…….”

아론이 입을 열었을 때, 뒤에서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아론과 함께 지원을 나온 성기사들은 아론이 내 앞에만 서 있자 조금 당황한 듯싶었다. 그들은 아론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물 처리는 완료되었습니다. 부상자들은 옮겼고요. 이제 한 분만…….”

그 한 분이 나라는 것이 자명하자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기사 하나가 부축할 것처럼 손을 뻗어 왔으나 그 전에 아론이 내 무릎과 등에 손을 넣어서 나를 들어 올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색해진 나와 달리 아론은 태연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본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돌아갔다. 나는 아론이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론은 아직 평범한 성기사가 아닌가. 그가 지원을 나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 빠진 턱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림 같은 선을 지나 매끈한 입술, 청결한 살결을 지나자 그윽한 눈이 보인다. 속눈썹도 우아할 만큼 섬세하게 늘어져 있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는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애초에 그를 왜 바라본 것인지 그 목적을 잊고 말았다.

곧 황금빛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네 얼굴에 빠져 말을 잃었다고 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냉랭하게 있었던 내가 그의 얼굴에 무기력해졌다고 말하기엔 무언가 자존심 상하지 않은가. 나는 얼른 표정을 묵직하게 바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기사들이 네 명령을 듣네?”

“지원 나갔던 지역에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저를 따라 이곳에 왔는데, 그래서인지 본대의 사제들도 제게 존대를 하고 제 명령을 들으려고 하더군요.”

그 점이 조금 난감하다는 아론과 달리, 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강한 신성력. 그 힘과 속도, 검에 실린 무게까지. 아론의 실력을 목격한 자라면 아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족과 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무위와 침착한 태도. 사제들은 그런 그에게 깊은 신뢰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절로 충성심이 우러나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은 그런 나를 보았다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사람들이 따르고 말고는 상관없으나 잘 지휘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싶었습니다. 말레드레드가 있었으니까요.”

“……아론.”

“말레드레드를 지키는 것. 그것만이 머릿속을 지배합니다. 말레드레드를 지키기 위해선 아까와 같은 결정을 수십 번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상관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도 말레드레드를 안전한 곳으로 배치해 달라고 말하겠습니다. 반드시 요구하겠습니다. 제 독단의 결정으로요.”

나는 기가 막혀서 아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를 쳐다본 아론의 표정이 몇 배로 격렬해서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아론은 사무쳐 맹렬하게 일렁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이런 저를 저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말레드레드가 저를 안 보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전 다시 말레드레드를 찾겠습니다. 지겹고 끈질기게 곁에 있겠습니다. 못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아론은 마침내 고백했다.

“전 절대 말레드레드에게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아…….”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떤 감정이 속에서 짓무르고 부풀어서 터져 나온다면 이렇게 표현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게 보여 주는 애타는, 집념 가득한 시선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한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 그를 욕망하고 탐하고 싶은 마음. 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얽히고설켜서 내 혼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다리의 고통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내 시야를 지배하고 있는 사내를 보면서, 나는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난 그 마음에 응할 수가…….”

진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어느새 우리의 곁에는 성기사 하나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마물에 닿아 부식된 투구를 벗으면서 나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말레드레드? 저런, 다리를 다쳤군요. 어서 우리 쪽 치료사에게 가 봐야겠어요.”

라드였다. 그는 아론을 보면서 팔을 내밀었다. 그의 입가에는 그 특유의 온화하고 어른스러운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옮길게요. 아론나이드는 마무리할 게 있으실 테니…….”

“됐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내가 봐도 무안할 정도로 차갑게 거절하고선 그를 지나쳐 걸었다. 나는 라드에게 나를 옮겨도 좋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의 표정을 보자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론은 절대 나를 놓지 않을 듯이 고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말해 봐야 괜히 의견 다툼만 일어날 거라 본 것이다.

아론은 그렇게 나를 치료 사제들이 있는 곳에 내려 두었다. 사제들은 아론이 가지 않고 내가 치료받는 모습을 보려 하자 조금 당혹스러웠는지 허둥지둥 움직였다.

이내 하얗고 선한 빛이 마물의 가시가 박힌 곳에 모여들자, 나는 온몸의 긴장된 근육들이 이완되며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론은 그런 변화하는 내 모습을 천천히, 끈질긴 시선으로 훑었다. 깊고 짙은 눈빛으로. 어쩐지 조금 얄궂은 욕망이 솟았을 때, 누군가 아론에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 황성에서 봤을 때보다 신성력이 더 늘었군.”

방금까지 처절하게 싸움을 주도했던 성기사단장이었다. 그는 투구를 벗은 채로 아론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내내 딱딱하게 굴었던 단장이라서 그의 살가운 태도가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아론을 칭찬했다.

“오늘 활약해 주어서 고맙네. 제 때에 지원해 줘서 살았어.”

“별말씀을.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론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단장은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참으로 겸손하군. 고위 마족을 물리친 자가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

“물리친 건 아닙니다. 단순히 마계로 돌려보낸 정도입니다.”

“그것도 쉽지 않지. 우린 국경에서 오늘 마주쳤던 마족보다 약한 존재를 돌려보내는 것조차 애를 먹었으니까.”

기사단장은 왠지 내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듯이 나를 슬쩍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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