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53화 (53/220)

53.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기사단장이 다급하게 외쳐 왔다.

“힘을 보충한다! 마족부터 공격해!”

그 급박한 외침은 급변한 사태에 몹시 당황한 듯 보였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마물을 상대했다고 하더라도 마족이 나타나 본격적으로 싸움에 끼어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물이 아닌 마족과의 전투. 그것은 전투가 아닌 전술을 요하며, 마기의 광범위한 공격도 막아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기사의 대검에서 더욱 신성력이 밝게 빛났다. 그들은 모든 힘을 끌어모으듯 대검에 신성력을 집중시켰고, 그것을 원반 형태로 날려 마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여인은 아주 쉽게 그것을 쳐내버렸다. 안력을 집중하고 보자 손에 마기가 덧씌워져서 그것을 하나의 검처럼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내 그녀는 차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기가 음산하게 뻗쳐 나오는 눈빛에서 반항하는 인간들이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쥔 순간, 그녀의 몸에서 한층 더 거센 마기들이 일어나 마물들에게 투하됐다.

“아, 안 돼……!”

마물들은 마기를 받자 더 몸집이 커졌고 더 흉포하게 변했다.

“도, 도망……!”

시찰단 성기사가 말을 더듬었다. 상대하고 있던 마물이 두 배로 커져서 신성한 땅을 부수듯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검을 놓칠 것처럼 팔을 떨었다.

“조심해!”

다른 기사가 외쳤지만 그는 순식간에 마물의 몸통에 깔리고 말았다. 비명은 새어 나오지조차 않았다. 거대한 몸체에 끼인 성기사의 육체에서는 마치 나무 장난감처럼 부드득, 부드득하며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이내 마물은 그를 처리했다고 생각했는지 축 늘어진 육체를 튕겨 냈다.

털썩.

그것은 시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그 끔찍한 거죽에 성기사 둘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포에 완전히 말을 잃어버린 듯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로 달려갔다.

“가, 같이 가요!”

소환사들도 겁에 질려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으나 마기가 강화된 마물은 보통이 아니었다. 털을 마치 창처럼 날려서 우리에게 던졌고, 성기사와 소환사 그리고 나는 그 독이 든 털에 맞아서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악-!”

비명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나 역시 신음을 흘리며 고통에 입술을 베어 물고 말았다. 타는 듯한 고통이 종아리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뒤흔들고 있다. 정신을 수십 개로 난도질하는 듯한 아픔에 눈앞이 혼미해졌다.

그 어른거리는 시야 속에서 애벌레 마물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쥐었다. 쉬고 싶고, 잠들고 싶고. 그 강요된 감각 속에서 오로지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나는 신성국의 사제. 신성력을 발휘하는 소환사다. 그 단순한 명제를 떠올린 순간 내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온기가 꽃을 피우듯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번쩍.

신성력은 공격을 위한 힘이 아니었다. 나를 지키고자 방어하는 힘. 그래서 나는 내 손에서 번쩍거리는 빛으로 사제들이 쓰러진 앞쪽에 소환 영역을 그렸고, 부족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어설프게나마 마물들의 몸을 잡아서 우리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어, 어서…….”

나는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횃불에 비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와 고통, 절망을 읽자 나도 모르게 목에서 울컥하고 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좀 도와줘……!”

도움을 요청하려는 찰나, 나는 누군가 우리 쪽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마족 여인이었다. 그녀는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바닥으로 끌며 정확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말 끈질기군.”

그녀는 마물들을 얽매고 있는 소환 영역을 보면서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었다. 최후의 발악이 고깝다는 비소.

그녀는 검은 눈을 매혹적으로 빛내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어조는 이상하게 익숙했고 지나치게 달콤했다. 마치 억지스러운 사람을 달래듯이, 상냥한 어조였다.

“놔버리면 편해지는데.”

마족은 노래하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눈은 노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검은 눈은 살기를 품었고 적의를 비췄다. 반감과 혐오감, 부정적인 감정들로 얼룩진 눈빛은 내 살갗을 쑤시며 가슴까지 찔러 왔다.

“이 지치고 힘든 저항을 그만두는 거야. 인간의 삶은 그렇게 의미 있지 않으니까.”

그녀는 머릿속에 글자를 박아 넣을 것처럼 강하게 읊조렸다.

“헛된 저항을 멈추라고.”

그녀는 팔을 들었다. 그러자 마물들이 흥분해서 몸을 떨었다. 나는 그녀가 공격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 떠오르는 것은 허망함이나 슬픔이 아닌, 이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뿐이었다.

더 좋은 무언가를 추구해야 했는데. 다정한 감정을 나누고, 솔직한 내면을 표현하고, 그래서 스스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다운 사람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야 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기억들을 헤집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내 암담한 기억 속에서 빛나는 편린 하나가 떠오른다. 나를 평생 따라다니겠다고 말한 소년에 대한 기억이.

소년은 황금빛 눈을 빛내며 평생 나를 따라다니겠노라고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렇게 헤어지게 되면 그는 어떻게 될지.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마물이 기어오는 것을 보며 그렇게 눈을 감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환한 빛의 기둥이 날아와 마족을 강타했다.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귓가를 가득 메웠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앞을 바라보았다. 마족은 빛의 기둥을 정면으로 맞은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듯이 허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방금까지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던 게 모두 거짓인 것처럼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거리듯이 신음을 뱉어낸 그녀는 이내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무엇이 자신을 공격한 것인가 노려보았다.

“아군이다! 본대에서 지원이 왔어!”

다 죽어 가던 시찰단 하나가 감격해서 외쳤다. 그의 말처럼 마족이 보고 있는 곳엔 번듯한 갑옷으로 무장한 성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중앙의 기사단과 달리 투구 없이 검을 든 채였는데, 나는 선두에서 검을 들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깨달았다.

아론이었다. 그는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 건방진 인간 따위…… 크악!”

다시 한번 대검에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그녀는 그것을 정통으로 맞고 뒤로 물러났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한번 그 빛의 기둥을 맞아 완전히 뒤로 나가떨어졌다.

도착한 성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그들은 마물에게 검을 들어 달려들었고, 이어서 마물들의 괴성이 귀가 먹먹하도록 공간을 흔들었다.

“이, 인간 주제에…….”

나는 그 소란 속에서도 마족의 비릿한 음성을 구분해 듣고 말았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탐스러운 검은 머리는 흙과 엉켜서 지저분해져 있었고, 신성력에 당한 피부도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감히……!”

그녀는 무척이나 격해져 있었다. 흔들거리며 잦아들었던 마기가 다시 잔혹하게 피어오르는 순간, 내 앞에는 아론이 당도해 있었다. 아론은 잠깐 나를 보았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 그 진득한 황금빛에는 여러 감정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반가움과 미안함, 걱정과 안도감, 분노와 후회로 일렁이는 깊은 눈빛을 본 순간 왜인지 가슴이 아려 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론의 고개가 곧 돌아갔다.

“이런, 하찮은 인간 따위…….”

아론은 가차 없이 마족을 공격했다. 신성력이 빛의 폭발처럼 요란하게 번쩍였다. 내 동체 시력으로는 아론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다만 마족이 손도 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았고, 격통에 가득 찬 비명만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아아악! 죽여 버리겠어!”

마족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손에서 길쭉한 검을 만들었다. 마기로 구성된 검은 혁혁한 살기를 잔인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마족은 생각보다 매우 노련하게 검을 휘둘렀고, 아론과 비등하게 실력을 겨뤘다.

마기를 뿜어내는 마족과 신성력을 빛내는 성기사. 두 상반되는 힘을 가진 존재가 격렬하게 부딪치자 그 주변으로 거센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시찰단은 모두 얼이 빠져서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봤고, 마침내 마족이 마기로 만든 검을 잃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건방진 성기사여! 네게 절망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겠다!”

여인은 아직도 건재했다. 고위 마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몸에서는 마기가 폭사되어 나왔고 인근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며 암담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물들은 산재한 마기에 기쁜 듯이 몸을 떨었고 독을 뿌려댔다. 여인은 잔혹하게 입을 끌어 웃었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큭!”

그때, 그녀의 아래쪽에 거대한 차원의 문이 생성되었다. 신성력으로 만든 문은 곧 여인을 향해 달라붙었고, 그녀의 몸을 억지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어, 어느새……!”

여인은 그제야 아론이 시간을 끌고 있었음을 안 모양이었다. 뒤쪽에선 소환사들이 소환 영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규모로 그려진 소환 영역은 그만큼 강한 차원의 문을 만들었고 돌아다니는 마물들을 모두 잡아끌 만큼 강력했다.

“읏!”

여인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네가 이 일의 원흉이라는 듯이.

“끄아악―!”

그러나 내 목을 움켜쥘 것 같던 그녀는 곧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차원의 문으로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마지막까지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