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52화 (52/220)

52.

그냥 물은 것이었겠지만 그 말은 내 정신을 바짝 곤두서게 했다. 나는 두려움을 삼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계속 마물을 상대하는 건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기사들은 고전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마물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끝없이 마기를 공급받아 죽지 않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고갈시키는 그들의 싸움 방식은 길어지면 아군의 전멸을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나는 전투 지역 위쪽의 상공을 가리켰다.

“저걸 공격해야죠.”

그곳에는 여전히 괴괴한 빛깔을 내며 돌아가는 이상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까처럼 가녀린 손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꼭 차원의 문 같네요.”

소환사 하나가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마족이 만든 차원의 문이 아닌가 싶어요.”

“과연. 아까 그 수상한 팔이 마족의 팔이겠죠? 어쩐지 신성력으로 만든 문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에요! 좀 더 불쾌하고 불안정한 기운이 흘러나온다고 할까요? 그나저나 마족이 저기 있다는 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거겠죠? 마물이 약해지면 다시 기운을 보강해 주려고?”

“아니면 우리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죠.”

누군가 그렇게 말을 받아치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죽는다는 말. 그 단어가 왜 이리 묵직하게 파고들어 오는지. 이처럼 치열한 전투에선 더더욱 친숙하게 들려오는 단어였다. 암담해진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죽기를 바란다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나서 기사단을 공격하면 쉽게 끝날 전투니까요. 저 정도 마기를 공급할 정도면 강력한 마족이란 건데. 이곳에는 그런 마족을 상대할 대군이 없으니까.”

“그러게요. 확실히 이상하네요. 그럼 지금 우리를 공격하며 주시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건데, 무엇 때문일까요?”

누군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마물에게 당한 기사의 높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도와주려는 성기사들의 대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나무 사이로 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켰다.

“우선 저 문부터 닫아야 해요.”

나는 소환의 영역을 떠올려 보고는 검은 공간 위에 겹쳐서 생각해 보았다. 신성력으로 만든 문은 저 검은 공간과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서로 적대시하는 힘이니 분명 만든 순간 서로 싸우려 들어 파괴하고 말 것이다. 나는 신성력과 마기를 떠올려 보고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저 아래 소환 영역을 그리는 거예요. 검은 공간 위로 차원의 문이 열리도록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마물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신성력을 다 끌어모아 소환 영역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저런 마기를 뿜어내는 공간에서 차원의 문이 제대로 열릴 수 없을 테니까요.”

“차원의 문을 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강조했다.

“신성력과 마기가 상충하기를 바라면서 그리는 거죠. 저 공간을 없앨 수 있게.”

“아.”

그제야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이 소환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왔다.

“그럼 우리들은 뭘 하죠?”

나는 성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요구할 것은 더욱 막중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가 소환 영역을 그리는 동안 마물들을 상대해 줘요.”

“하지만, 저 정도 숫자에 강력한 마기를 지닌 마물이면…….”

성기사들은 우물쭈물하며 자신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우린 상대가 안 될 텐데요.”

“무리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힘이 비등하지 않고,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느낀다면, 죽음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며 고조되던 전투 의욕은 모두 상실되고 만다. 나는 그들의 싸울 의지를 꺾으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신중하게 대답했다.

“마물을 죽일 정도로 치열하게 싸울 필요는 없어요. 소환 영역을 그릴 정도의 시간만 확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신성력을 바닥에 뿌려놓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싸우는 방법을 사용하는 게 좋겠지요.”

내 말에 성기사들이 저번에 싸웠던 방식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여 왔다. 나는 다시 한번 안전을 강조했다.

“일단 저 공간이 파괴되고 나면 기사단 후미로 들어가서 마물을 상대하는 거예요. 마물이 설사 뒤쫓더라도 기사단과 함께라면 상대가 가능할 겁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한번 해 보죠!”

기사들은 다시 의욕을 얻은 듯이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들이 대검을 쳐드는 것을 보면서 소환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소환 영역을 그리는 것은 내가 주도할 것이고, 신성력을 보태는 건 소환사들이 할 것이다. 나는 까만 공간을 노려보며 가슴 속의 온기를 모조리 떠올렸다.

지팡이에 흰 빛과 함께 찬란한 신성력이 그려지자 나는 왠지 모르게 안도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신성력을 한 지점에 집중했다.

“모, 몰려옵니다!”

검은 공간 아래 소환 영역이 그려지기 시작하자 마물들이 멈칫하더니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마물의 생김새는 거대한 애벌레처럼 흉측했고 잔가시 같은 털은 독을 뿜어냈으며, 그것은 풀과 꽃을 썩게 만드는 기괴한 능력이 있었다. 마물들은 주름진 몸을 움츠렸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우리 쪽으로 기어왔다.

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는 수였다.

“으악!”

마물이 다가와 몸을 비비려고 하자 성기사들이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미리 신성력을 바닥에 쏟은 덕분에 애벌레는 기사들에게 닿지 못하고 몸에서 움청, 움청 하는 괴상한 소리만 내며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기사들은 안도하면서 신성력을 입힌 검을 휘둘렀다. 검이 주름에 박힐 때마다 애벌레는 고통스러운 괴성을 질렀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기사들은 애벌레가 몸을 떨 때마다 털에서 독이 뚝뚝 떨어지자 더욱 조심해 가며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 된 거예요?”

기사 하나가 검을 휘두르며 우리를 향해 물었다. 애벌레가 더 몰려오기 전에 기사단에 합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반영된 듯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나는 그려지는 소환 영역을 한 번 보며 외쳤다.

“조금 더요!”

아직은 부족하다. 반 정도 그린 소환 영역으로는 검은 공간은 조금 흔들렸을 뿐 크게 변한 게 없었다. 나는 소환사들의 지팡이에서 쏟아지는 신성력을 받으며, 소환 영역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그린다. 그 의도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세상을,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나는 그것만을 생각했다.

“됐어요!”

소환 영역이 그려졌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흐릿했던 눈을 번쩍 떴다. 검은 공간을 바라보자 그 위로 우리가 만든 차원의 문이 일렁거리는 게 보인다. 겹쳐진 두 이색적인 공간은 이내 서로의 힘을 감지하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흰 빛과 검은 빛. 얽힌 채 으르렁거리던 두 빛은 검은 공간에서 하얀 팔이 불쑥 튀어나오자 잠깐 멈추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안 돼.”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하얀 팔이 우리가 만든 공간을 뭉개려는 듯이 마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두면 자신의 검은 공간이 파훼될 것이라 느꼈는지 하얀 팔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기는 굉장했다.

나는 서둘러 신성력을 뭉쳤다. 저번에 펠이 알려 준 대로 작은 신성력 공을 만들어 그 하얀 팔을 가격하자, 그것이 움찔하고 만다. 나는 성기사들에게 외쳤다.

“저 팔을 공격해요!”

마기와 신성력이 충돌하는 것을 보건대 조금만 견뎌내면 검은 공간이 없어질 터였다. 내 외침에 마물을 상대하던 성기사들이 재빨리 신성력이 배인 검을 높이 들었다. 그들의 검에선 내가 만든 신성력 공보다 훨씬 강하고 날카로운 신성력이 만들어져 있었다.

검을 내려친 순간 신성력이 팔로 향했고, 제대로 강타했다. 하얀 팔은 마기를 보충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맞은 공격에 당황했다는 듯이 마기를 뿜어내는 것을 멈췄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내 장점, 소환 영역을 그리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능력을 살려서 소환 영역에 다시 한번 집중한 순간,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차원의 문이 하얗게 빛나며 다시 강화된 것이다.

하얀 팔이 거기서 뿜어지는 빛에 놀란 듯이 흠칫거렸다. 마기들이 역류해서 그녀의 팔에 달라붙자 그녀의 팔에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핏줄들이 생겼고 이내 팔이 쑥, 공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성력에 고통스러워하는 마족. 흰빛과 어울릴 수 없는 검은 빛. 그 명확한 이분법을 보면서 나는 왜인지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어떤 빛깔일까. 신성력을 품었지만 욕망을 갈구하는 나는 그 어느 쪽의 색깔에도 어울릴 수 없는 느낌이었다.

“되, 된 건가?”

잡념을 떨치듯, 소환사 하나가 섣부름 기쁨을 토해 내며 외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팔이 다시 나오는 순간, 아니, 이번엔 팔이 아니라 마족의 전신이 다 나오는 순간 사제들은 모두 놀라서 신음을 삼키고 말았다.

“마, 마족이다!”

“고위급 마족이야……!”

그녀는 고고한 마기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허리까지 떨어지는 치렁치렁한 흑발은 매혹적이었고, 어둠을 그대로 담아낸 검은 눈동자는 유혹적으로 끝이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여신처럼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마기가 마치 빛의 가루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왜인지 마왕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그녀는, 마왕보다는 훨씬 잔인하고도 잔학한 미소를 띤 채로 한 곳을 주시했다.

‘우리를 노려보는 건가?’

그녀의 시선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꽂혀 있었다. 아니, 분명히 나에게 꽂혀 있었다. 내가 검은 공간을 파훼시키려는 주동자임을 확실하게 파악한 듯한 눈빛이었다.

‘윽, 살기가…….’

나는 그녀에게서 지독할 정도의 악의가 느껴지자 흠칫하고 말았다.

곧 그녀는 손을 들었고,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수십 갈래의 마기가 우리를 공격하는 애벌레에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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