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말레드레드, 일어났어요?”
비키였다. 그녀는 긴장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시 밖에 마물이 출몰했다는 보고가 있어서요. 잠이 안 깼다면 어서…….”
“일어났어요.”
나는 재빨리 말했다. 비키는 안도한 듯이 몸을 움칫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사단이 소탕하러 갔지만 혹시나 모르니까요. 무장을 하고 있는 게 좋겠어요.”
비키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나는 알겠다며 방어구까지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도시 전역에는 마물의 등장을 알리는 위기의 나팔 소리가 번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거대한 횃불이 피어올라 도시 전역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영주의 성에서는 무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기사가 아닌 일반인들이었고,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키가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들은 마물에 익숙지가 않아서요. 마물을 맞닥뜨리면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울 거예요.”
“사람들은 모두 피했나요?”
“아뇨. 일단 마물의 수가 많지 않아서요. 각자의 집에서 문만 걸어 잠그고 있어요.”
비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팔 소리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비키가 멈칫했다.
“어서 영주의 성으로 가 보죠.”
영주의 성으로 달려가자 시찰단을 비롯해 영주의 가신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영주는 그 가운데에서 기사단장이 보내온 성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투구도 벗지 않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을 처리할 때까지 모두 집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네, 네, 그래야죠.”
“수가 많지 않으니까 금세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라드였다.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지원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는 비키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비키는 자신의 숙부가 보내는 미소에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몸짓을 했다.
라드가 나를 지나쳐 가며 약간 눈을 휘었다. 나는 그 인사에 살짝 목례만 했고, 그 뒤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듬직하면서도 위험이 당도했구나, 느끼게 해 주는 뒤태였다. 뒤편에서 영주가 한탄스럽게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우리 도시에까지 마물이 오고 말다니.”
처음 맞이하는 공포가 힘겹다는 듯이 영주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기사단이 와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들은 강력하니 마물들을 확실하게 처리해 줄 거예요.”
그리고 강조했다.
“다들 안전하다고 할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새벽 꽃을 딴다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일이 없도록 영주민들에게 확실하게 알리세요.”
영주의 명에 가신들이 흩어졌다. 비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가 시찰단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죠?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을까요?”
“아까 성기사 분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기사단이 알아서 잘 해치울 테니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죠.”
시찰단의 태도는 분명했다. 비키는 움찔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을 크게 의지하고 있는 시찰단과 달리 그녀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는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기사단이 싸우는 걸 보러 가죠.”
“하, 하지만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는데요?”
“성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면 기사단이 마물과 싸우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에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비키가 재빨리 가신에게 바깥이 잘 내다보이는 높은 곳을 물었다.
우리는 그가 알려 준 대로 성안 쪽의 계단을 올라갔다. 회전 계단을 돌아 밖이 훤히 보이는 곳에 올라서자 확실히 도시 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평야의 도시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비키는 횃불이 크게 일렁이는 곳에서 번쩍거리는 갑옷의 기사단을 발견했고 그들이 전투 중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아, 금방 처리하겠어요!”
싸움을 지켜보던 비키가 기쁘다는 듯이 외쳤다. 마물은 다섯 정도였다. 그들은 작정하고 달려드는 기사단에게 금세 찢기듯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고 바닥에 쓰러졌다. 기사단은 대검에서 신성력을 뿜어내어 그것들을 완전히 처리하려고 했다.
“……!”
그때. 그들 위쪽에서 검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저, 저건 대체…….”
그 공간에서는 지난날 보았던 하얀 팔이 빠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 팔에서 휘몰아치는 마기를 느꼈다. 어둠의 강력한 기운이 그 손에서 빠져나와 쓰러져 있던 마물들에게로 들어갔다.
“맙소사!”
마물들은 다시 살아나 거대해졌을 뿐만이 아니라 분열하듯 몸이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깜짝 놀라서 검을 휘둘렀지만 강력해진 마기가 신성력을 같잖다는 듯이 튕겨내면서 어둠의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이윽고 마물의 숫자는 10마리까지 불어나 있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여전히 분열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당황한 기사단장이 대검을 들어 힘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검은 공간을 가리켰다. 잘 들리진 않았으나 그것을 공격하라는 외침 같았다.
신성력이 쏟아져 나왔다. 기사들의 검에서 빠져나온 신성력이 검은 공간을 향해 날아갔으나 빠져나와 있는 가녀린 팔이 그것들을 마치 공처럼 튕겨내며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기사단장은 선두에 서서 몇몇 기사들과 합심하여 신성력을 뭉쳐 공격했으나 그때에도 가녀린 팔은 조금 힘겹다는 듯이 움찔했을 뿐, 공격들을 덤덤하게 쳐냈다.
“저게 모두 몇 마리야…….”
기사들의 공격을 보고 있던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리는 비키의 목소리에 앞쪽에 선 마물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100마리는 넘을 듯한 마물을 보면서 나와 비키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 지원해야 해요!”
비키가 먼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영주님에게 알려야 해요. 저 정도 숫자라면.”
나는 참담한 눈으로 마물들이 기사들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바라봤다. 수십 마리의 까만 점들이 빛을 덮어 가는 절망. 멀리서도 전신이 오싹해질 만큼 두려운 광경이었다.
“집 안에 숨는 것만으론 안 돼요. 절대로요.”
나의 목소리는 위기를 느낀 만큼 더욱 경직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서 위기감을 느낀 비키는, 그 길로 영주에게 달려갔다. 나는 시찰단과 함께 지원 나갈 준비를 했다. 따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무장을 한 상태였고, 가서 어떻게 도울지 정도만 간략하게 정하면 됐다.
기사단장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휘를 하진 않을 것이었으나, 위기 시에는 모두 나를 따르겠다고 해서 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가장 노련하니까요.”
시찰단은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괜히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금세 돌아온 비키는 영주가 주민들을 대피시키겠다고 말한 것을 전했다. 비키는 전투에 따라오겠다고 했으나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적은 수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눈앞의 적을 쳐다보기도 버거워요. 다른 동료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으니, 비키는 영주님과 함께 영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게 좋겠어요.”
그때, 바닥이 흔들렸다. 마물들이 무슨 능력을 쓰는지 몰라도 돌로 지어진 웅장한 저택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우수수 돌 먼지가 떨어져 내리자 모두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본, 본대에 연락해야겠죠?”
“한시라도 빨리요!”
비키는 그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비키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던 걸까. 울먹일 듯 흐릿해진 눈동자가 이내 의욕을 담아 우리에게 쏟아졌다.
“몸조심해요! 저도 열심히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을게요!”
“잠시 후에 봐요, 비키!”
성기사와 소환사들은 그녀에게 인사했다. 비키는 우리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본 뒤 빠르게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우리는 마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시를 밝히는 횃불이 마기로 만들어진 험악한 바람에 이리저리 찢기듯이 흔들렸다. 그 불안한 불꽃을 따라서 성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나아 가는 우리의 그림자도 사납게 일렁거렸다.
다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나아 가는데, 앞쪽에서 그악한 비명이 들려오자 크게 흠칫거렸다.
“시, 신성력을…….”
기사와 소환사가 당황해서 무기들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무기와 지팡이에 신성력이 맺히는 걸 지켜보면서 조용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빼곡한 나무 너머로 꽃향기가 진하게 올라왔다. 꽃을 팔아 생활하는 도시답게 이 나무의 벽 너머론 꽃의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듯했다.
나는 긴장했다. 마물들이 신성력에 맞서며 마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뒤따라오는 시찰단에게 잠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상황을 확인하려 고개를 나무 사이로 내밀었다.
……참혹. 그뿐이었다.
죽은 기사들은 평야에 널려 있었고 성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피가 군데군데 웅덩이를 이루며 꽃과 꽃잎으로 범벅이 된 모습은 슬프다기보다 처참했고, 우아하다기보다 비참했다. 그들의 갑옷은 찢기거나 사라졌으며 투구 역시 깨져서 머리에 박혀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죽은 걸까.
나는 말과 성기사가 엉켜서 죽어 있는 것을 보면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몸이 얼어붙었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마저 뻣뻣해지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말레드레드, 어때요? 우리가 뭘 하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