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고리타분한 말은 그만두지. 그대도 요즘 인간계를 들락날락하느라 바쁜 것 같은데.”
-알고 계셨군요. 제게 관심이 도통 없으셔서 얼마나 속상했던지.
그녀는 괴로움을 토해 내는 어조조차 유혹적으로 말하고는 기쁘다는 듯이 응답했다.
-맞습니다. 인간계의 마물들에게 마기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번지는 속도가 인간들이 대처하는 속도보다 빠르기를 바라면서요.
“그대는 늘 마족보다 마물들로 인간계를 정복하려 드는군.”
-그거야 인간들은 마물에 걸맞은 종족이니까요.
그녀의 어조는 구석구석 음산했다.
-감히 마족들과 대등하게 취급할 수 없는 하찮고 저열한 족속입니다.
“그대가 어떤 마왕이 될지 보이는 듯하군.”
마왕의 짧은 읊조림 속에서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에레나라는 고위 마족은 뼛속까지 인간을 하등하게 보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나는 몸이 가늘게 떨려 오는 것을 느끼면서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빠져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때 에레나가 말했다.
-왕이시여. 세가의 말이 저돌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왕께서 약해지셨다는 말에는 깊이 동의합니다. 저는 단순히 약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갑자기 너무 빨리 약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흠칫했다. 그런 나와 달리 마왕은 태연했다.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마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약해지는 것이라면 그 양이 줄어들면 그만이겠지만 그 속도가 빠르게 감소되는 것이라면 마기는 불안하게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너무 속단하는 것 같은데.”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왕께 무슨 일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왕성 밖으로도 잘 나오지도 않으시고요. 근래에 얼굴 뵙기도 어려워져서 이 통신조차 너무 애타게 느껴집니다.
그 말투는 절절했다. 억지로 꾸며낸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마족이 인간보다 더 능숙하고 교활하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속일 수 있다는 부분에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에레나는 마왕을 진정으로 생각해 말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신하의 감정이 맞나?’
잠깐 의문스러워졌을 때 에레나가 물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신 건 아닙니까? 거슬리는 존재가 곁에 있는 것 같아서요.
“설사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대 도움을 받는 일은 없을 거야.”
마왕은 서늘하게 말했다. 에레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왕을 위해 아주 작은 일까지, 그리고 제 육체를 던져서 하는 거대한 거사까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비장한 각오에도 마왕은 시종일관 담백했다.
“과한 충정이군. 그 넘쳐나는 섣부름으로 괜한 짓을 벌이지 말도록.”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마왕의 대답이었다. 에레나는 침울해진 듯 말이 없었다.
그때 마왕이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렉토가 없군.”
렉토는 누구지? 라고 생각할 때 에레나라는 마족이 대답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연락에 답이 없어 오늘 아침 그의 영역을 방문해 보았더니, 의자에 앉아 괴로워하고 있더군요. 머릿속의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다고 하면서요.
나는 그 말에 렉토가 저번에 마왕과 정사할 때 보았던 마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흠칫한 나와 달리 마왕은 태연하게 답변했다.
“그거 이상한 일이군.”
-그러합니다. 고위 마족은 웬만해서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울 일이 없을 텐데 말이죠. 육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더 의아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싶어서요.
“조만간 한 번 방문해 봐야겠군.”
마왕은 시치미를 뗀 채로 말했다.
“마기도 나눠 줄 겸.”
에레나가 놀랐다는 듯이 대꾸했다.
-왕께서 직접 방문해 주신다니! 거기에 마기까지 주시면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닙니까? 그가 아프다는 사실이 부러울 지경인데요?
에레나는 아양 떠는 말투로 말했다.
-가시는 날 제게도 연락 주세요. 저도 함께 따라가고 싶습니다!
“알아서 오도록.”
마왕은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통신을 마치겠다고 했다. 에레나의 왕이시여. 하는 공손한 작별의 말이 빠져나오자 마왕은 손을 휘저어 거대한 거울을 사라지게 했다.
“표정이 굉장하군.”
내 곁으로 다가온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큰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닥쳐올 공포와 파멸에 주눅 든 얼굴을 하고 있을 터였다. 방금 전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 버거워 속을 게워내고 싶은 얼굴을.
마왕은 날 진정시키려는 듯, 고요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흘려 버리도록.”
“……그럴 수 없다면요?”
나는 겨우겨우 빠져나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왕은 조금 웃었다. 그의 한 손이 내 뺨에 닿자, 나는 놀라는 반응을 했다. 마왕은 내 작은 떨림, 내 안색의 변화까지 모두 관찰하겠다는 듯이 샅샅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대만 괴로워지지. 어차피 나는 마왕이고 우리의 목적은 인간계의 정복이라는 것이 자명하니까. 설사 그대가 이걸 꿈속의 관계라고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꿈이 아니야. 명백한 현실이지.”
“읏…….”
나는 그의 문장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오는 것을 느꼈다. 안일하게 유희만 즐기자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불쾌감, 내 세계를 정복하려는 자와 유희를 즐긴다는 이 불편감이 나를 괴롭게 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그와의 관계를 끊고 도망가야 하는 건 아닐까. 도망가서, 내 세계에 그의 존재를 밝히고 어쩌면 내 죄까지 고해서, 하루라도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 할지도…….
내가 몰려오는 감정에 고개를 수그리자 마왕의 손이 볼에 와 닿았다. 그는 억지로 자신과 눈을 맞추도록 했다. 초월자다운 붉은 눈은 음험하면서도 깊고 섬세한 파고듦이 있었다.
마왕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방금 들은 걸 가지고 그대가 하고픈 대로 해도 좋아.”
“뭐…….”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마왕은 태평했다.
“인간들에게 보고해도 좋고, 그걸 이용해 대책을 마련해도 돼. 하지만 그대가 그런다고 내가 이 유희를 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마왕은 그대로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쪽으로 기울어지며 그의 가슴팍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마왕의 단단하고 뜨거운 육체가 느껴졌다. 더불어 그의 어둡고 불길 같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달라붙었다.
“명심하도록, 말레드레드.”
나는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내 심장이 내가 떨고 있다는 걸 알려 주듯 뛰고 있었다.
“그대가 내 세계를 배척하더라도, 나와의 관계는 배척할 수 없다는 것을.”
마왕은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볍지 않았다. 마치 휘어 감아 나를 옥죄는 덫처럼 치명적인 무게가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게, 내 몸과 마음을 누르면서.
“그러니까 어설프게 나를 벗어날 생각 마.”
마왕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두려움에 차서 그를 올려다보았고, 마왕은 그런 나에게 키스할 것처럼 가까워져 왔다. 그의 존재를,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홀린 듯이 보고 있던 나는 그의 입술이 닿기 전에 무언가 흔들림을 느꼈다.
얼른 주변을 돌아보며 살폈지만, 지진이 일어난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진동을 느꼈고 그게 내 머릿속과 몸을 흔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마왕은 나를 바라봤다.
“그대의 세계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그,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마왕은 짧게 나를 살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불안정하니까. 내 소환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거지.”
“절 돌려보내 줘요!”
내 외침에 마왕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다급한 거지? 위험한 일이 생겼다면 이곳에 있는 게 오히려 안전할 수 있어.”
“전 사제예요.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곳에 사제로서 있어야 해요.”
나는 천막 안에 내가 없다는 것을 누가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졌다. 내 말에 마왕은 피식 웃었다.
“그대는 소명의식이 지나치게 투철해. 단순히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닌 거 같은데.”
“…….”
“사제가 아니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느껴서 그런가?”
그 말은 가슴을 후벼 파듯 사나웠다. 나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함이 가득했다. 마왕은 거부감과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나를 보면서 비웃거나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눈을 빛냈다.
“처음엔 그대가 사제라는 사실이 재밌었는데 말이야.”
마왕은 손을 올렸다. 검은 마기가 그곳에서 험악하게 일렁거렸다.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군.”
나는 눈앞이 흐려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들었다.
“그대가 사제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내 주변에 마기가 쏘아지는 것을 보았다. 마기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 공간을 벌려 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을 뿐.
“아!”
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왠지 몸에는 떨림이 남아 있었다. 마기가 나를 덮친다고 생각해서일까. 어쩌면 마왕의 마지막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제인 게 뭐가 어떻다고…….’
나는 마왕이 한 말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 괜히 속이 뒤숭숭했다. 사제는 내가 수녀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기였으며 내가 나라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었다.
‘혹시나 나를 사제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게 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나는 불길하게 쿵쿵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얇은 천 바깥으로 횃불을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옷을 챙겨 입는데, 누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