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트 앤 다크-49화 (49/220)

49.

나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마왕은 슬쩍 웃었다.

“그대는 우리 마계 존재들에게 어떤 편견이 있는 것 같은데.”

비웃는 것 같은 그 미소 속에서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마계는 틀에 박혀 있는 세계였고, 잘 변하지 않는 어둠의 형상이었다. 그 안이 우리 인간 세계처럼 다채로운 빛을 뽐내고 있다는 건 어쩐지 인정하기 어려웠다.

‘싸우고 처단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나는 그런 생각으로 마왕은 암담하게 올려다보았다. 마왕은 이런 내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노련하게 말했다.

“우리가 그대의 세계를 노리지만, 이곳도 여전히 생명체가 살아가는 세계야. 그대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알아. 그대는 우리와 싸우는 사제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고 감정이 존재해. 인간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느끼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생각하지.”

마왕은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고고한 눈빛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짙은 일렁거림이 있었다. 그것은 마주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과 섬뜩함이 일게 하면서 동시에 초초함과 불안함을 들게 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초월적인 존재로서 나를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려 주듯이.

“그리고 인간이 욕망하는 것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원하고 갈구하게 돼.”

마왕의 눈빛이 변화했다. 그것은 방금 전처럼 존재 자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눈빛이 아니었다. 더 어두웠고 더 뜨거웠다. 마치 보고 있노라면 몰아치는 열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처럼, 그는 혼란스러우면서도 흥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당장 나를 덮쳐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긴장하며 쳐다보고 있을 때 토끼 마족이 나타났다.

“맛있게 드십시오.”

토끼는 커다란 눈을 가늘게 휘며 내게 말했다. 내가 인간이든, 혹은 신성력을 품은 사제든, 마왕의 명이라면 어떤 존재여도 상관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귀를 좌우로 삐죽거리던 토끼는 내가 학습된 두려움에 굳어 있자 더욱 생글거리며 웃어 보이고는 이윽고 마왕에게 몸을 돌렸다. 토끼는 정중하게 고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깍듯이 대답한 토끼는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검은 불꽃을 틔우며 사라졌다. 나는 토끼 마족이 놓고 간 것을 바라보았다. 흔히 귀족 연회에서 먹을 법한 고급스러운 과일과 초콜릿 박힌 쿠키, 그리고 과일의 즙을 짜낸 음료가 아름다운 유리그릇과 컵에 담겨 있었다.

마왕성에서 이런 것들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마왕은 놀라서 굳어 있는 나를 한 번 보고는 테라스 쪽으로 다가섰다.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잔을 들었다. 독이 들어 있나, 마기가 들어 있나. 불안함이 치솟았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들었다. 한입 먹자 달콤한 과육의 맛이 느껴진다. 이상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더 마셨고, 손을 뻗어 쿠키까지 잡았다.

그러면서 마왕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 슬쩍 살폈다. 그는 지난날처럼 커다란 거울을 생성한 상태였다.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잠깐 나를 바라봤다.

“정무를 봐야 하니 그대는 여유를 즐기고 있도록.”

그 말은 어쩐지 낯설었다. 마왕이 인간들의 왕처럼 정무를 본다는 것도, 심지어 마왕이 정무를 보는데 사제가 그 방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도, 맞지 않는 퍼즐의 조각처럼 기이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시선은 다시 달콤한 것들로 향했지만 귀는 그가 있는 쪽으로 활짝 열어 놓은 상태였다.

-왕이시여.

공손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거울에는 수십의 인영이 물결처럼 맺혀 있었고 그들은 마계의 각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마계 북부의 소란이 진정되었습니다. 트라가족은 당분간 거처에서 나오지 못할 겁니다.

-킹족과 놀족의 싸움은 현재 소강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서로 영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기로 벽을 구축해 놓은 상태라서 한동안은 조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트라의 협약으로 마계 서북부의 마물 이동 중단이 해제되었습니다. 협약에 참여했던 마족들은 모두 마왕께 경고를 받고서 충성하겠다고 말한 자들입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들, 정황들에 나는 얼이 빠졌다. 마계란 그저 치고받는 마계의 주민들과 그들을 관망하는 마왕으로 대변되는 곳이 아니었단 말인가? 언뜻 들었지만 마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오했고 인간계의 일처럼 복잡 다난해 보였다.

이윽고 한차례 보고들이 끝나고, 그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원형 거울에는 어느새 북적거렸던 그림자들이 사라져 있었다. 잠시 후 새 그림자 둘이 떠오르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훨씬 무거웠다.

-왕이시여.

그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언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거대한 문 뒤에서 마왕에게 보고하던 세 명의 목소리 중 하나.

‘분명 이름이 세가였던 것 같은데.’

날카롭다고 느낀 그 목소리는 오늘따라 왠지 불안할 정도로 뾰쪽하게 날이 서 있었다.

-마계가 약해져 가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제 보고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이유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계의 대지가 자꾸만 침식되는 이유, 마물들이 자꾸만 인간계로 떠나는 이유, 마기가 불안하게 증폭했다가 잦아들고를 반복하는 이유를 찾아서 말입니다.

“하고픈 말이 뭐지?”

마왕은 딱 잘라 건조하게 반응했다. 세가는 떨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건 마기의 총량, 즉, 마기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본질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본질이라? 나를 말하는 건가?”

마왕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세가는 매우 조심스럽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말하기 송구하게도, 왕께서 가지고 계신 힘이 쇠약해져서 마계 또한 영향을 받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추측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침식된 대지가 마기를 받고도 다시 침식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물들이 앞다투어 인간계로 몰려가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겠습니까. 마기가 불안정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왕께서 비록 건재하시다고 하더라도 제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실 필요가 있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계의 존립은 왕의 건재와 그 운명을 같이 합니다. 마왕께서 약해지시면, 마계 또한 위험해진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이 말했다.

-따라서 왕의 자리를 굳건히 하시려면, 인간계에서 거대한 힘을 앗아 오는 게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파괴와 소멸로써 인간의 생명력을 가득 섭취하시면 다시 지난날의 힘을 소유하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 방법은 지금도 하고 있지.”

마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마물과 마족이 인간계로 올라가서 무얼 한다고 생각하나? 그들은 한가롭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야. 인간들의 감정을, 인간들의 기운을 앗으려고 싸우고 있으니까.”

-압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최근에 제 측근을 보내 인간들의 제국을 공격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날로 인간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만큼, 강한 마족 한 둘을 보낼 게 아니라 마왕께서 진두지휘하셔서 인간계를 정복하셔야 합니다!

파삭.

나는 쿠키를 깨물던 것을 멈추었다. 지금 내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가볍게 흘려듣기엔 너무나 막중했다. 나는 먹던 쿠키가 얹힌 기분에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내려놓았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침착함으로 바꾸려고 애썼다.

마왕은 어찌 나올까. 당장이라도 인간계의 모든 목숨을 처단하자며 마기를 뿜어내는 건 아닐까. 불안과 공포로 전신이 얼어붙었을 때,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뜻밖에도 무미건조하게 반응했다.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는군.”

-왕이시여!

“지금 내가 인간계로 나서면 잘못하다간 마계에 더 심각한 일을 초래할 수 있어. 내 힘이 약해지고 있는 건 인간이나 신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그러한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세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마왕은 무미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왕에게도 세대교체의 시기가 있다는 것이지.”

-오, 왕이시여…….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마. 난 아직도 그대들의 군주고, 이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니까. 자리를 넘겨줄 시기는 그렇게 빨리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더 이상 마계가 약해진다는 말로 내 행동의 방향을 정하려고 하지 말도록. 한시라도 나를 이 자리에서 빨리 몰아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위대하신 존재시여! 저는 감히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왕께서 저의 모든 것이며 저의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제가 영원히 모셔야 할…….

“그래.”

마왕이 그만하라는 듯이 말을 잘랐다. 왠지 딱딱하고 정이 없는 반응이었다. 세가는 자진해서 말했다.

-그, 그럼 저는 마족들을 독려해서 신성력을 더욱 궁지로 몰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인간계가 완전히 저희 세상에 복속되는 그날까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사라진 듯 보였다. 마왕은 잠깐 침묵했다. 돌아보자 그가 남아 있는 그림자를 향해서 입을 열고 있는 게 보였다.

“유독 말이 없군, 에레나.”

마왕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음 대 마왕 후보자로서 내 마기를 강화하자는 세가의 언행이 불편하게 다가왔나 보지?”

-설마요.

목소리는 요염함을 한껏 품고 있었다. 달콤함이 눅진눅진 붙어 나오는 목소리로 그녀는 애교스럽게 말했다.

-제가 마왕의 후보라는 것도 마왕께서 직접 말해 주지 않으셨다면 믿지 않았을 겁니다. 대대로 마왕은 특별하게 태어나는 존재라 생각했거든요. 기존의 마족이 마왕이 되는 거라고, 왕께서 근사한 목소리로 알려 주지 않으셨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한껏 애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겐 당신만이 가장 빛나는 존재니까요. 당신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저를 무릎 꿇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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