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시찰단의 행진은 아무 소란 없이 이어졌다. 엄격한 표정의 성기사들이 시찰단의 뒤를 따르고 있어서인지 베리스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조용하게 우리가 광장을 도는 것을 지켜보았다가 끝에서 이 도시의 특산물인 꽃과 덩굴을 던지며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보낸 게 다였다.
요란한 연회도 떠들썩한 술자리도 없다. 영주는 수고했다고 말하며 방을 안내했다. 아니, 방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임시 천막이었다. 그곳은 한 사람만이 간신히 들어갈 좁은 공간으로, 광장에 따라 쭉 설치된 숙소는 본대에 설치된 임시 천막보다 훨씬 작고 허름했다. 영주는 거듭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도시엔 여관이나 별채가 따로 없어서요. 다들 여유 공간이 없는 집에서 살다 보니, 머물 곳이 이런 공간뿐이네요.”
“노숙도 자주 합니다. 이 정도면 꽤 호화로운 편입니다.”
성기사단장은 의외로 수더분했다. 그는 수도의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 있는 특권층의 기사는 아니었다. 전장으로 많이 떠돌아다녔는지, 그는 기사들에게 숙소를 배분하고, 시찰단에게도 방을 나눠 주는 데 익숙했다.
나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와 머물 곳을 살폈다. 낮게 설치된 천막은 풀냄새가 진하게 올라왔고, 둘러친 천도 얇아서 옆 천막이 떠드는 소리며 움직이는 그림자 등이 그대로 전달됐다. 비키는 안쪽을 살펴보고는 내게 물었다.
“저랑 같이 방을 쓸래요? 전 관리라고 영주님 저택에 방을 하나 배정받았거든요.”
나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는 비키에게 고개를 저었다.
“혼자 쓰는 게 편해서요. 그리고 저만 그 방으로 들어가면 다들 부러워할 거예요.”
“아, 그러네요. 그래도 혹시나 불편하면 꼭 말해요.”
비키는 은근하게 강조하고는 공간을 빠져나갔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천막으로 들어와 새로 받은 사제복을 벗어 놓았다. 한구석에 잘 개어 놓고 지팡이와 갑옷을 벗어 놓은 나는 가만히 거친 천에 몸을 뉘었다.
풀벌레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막 밖에서 사제들이 소리를 죽여 대화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런 잔잔함이 귀를 간질이는 가운데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고, 이내 성기사단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취침하세요.”
그 말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사위가 조용해졌고, 나는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
‘마계에는 왜 이리 사람이 없는 걸까.’
분에 넘쳐서 돌아다니는 마족도, 파괴와 분열을 일삼는 마물도 없다. 마왕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마계는 평화롭고 잔잔해 보였다.
비록 눈에 보이는 광경들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으레 생각하던 마계는 없었다. 오히려 우리 세계처럼 물질문명을 이룩하지 않아서 동식물과 천연 지형이 어우러진 마계는 더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 어이없게도 말이다.
“뭐가 그리 그대의 얼굴에 심각함을 자아냈지?”
마왕은 검은 비단 자락을 끌며 다가왔다. 나는 그를 쳐다보고서 멈칫했다. 어릿거리는 현기증이 욕망과 함께 올라왔다.
검은 비단을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두른 사내는 믿을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검은 머리가 아름다운 강물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한 종족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눈이 영혼을 관통할 것처럼 빛났다. 나는 목까지 차오르는 아찔함에 주먹을 말아 쥐며 고개를 돌렸다.
“마계가 평화로워서요.”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군.”
마왕은 다가오며 대꾸했다. 그는 어느새 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착 달라붙는 초월자의 매력적인 육체와 그 육체가 주는 탄력감에 나는 절망했지만, 그럼에도 한 줄기의 이성으로 그를 밀어냈다.
“오늘은 안 돼요.”
“어째서. 설마 저번 일 때문인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말에 마족 하나를 떠올리고 만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떻게 됐죠?”
“멀쩡해. 신성한 사제의 입장에선 아쉽겠지만, 그를 소멸시킬 정도로 고통을 준 게 아니니까.”
마왕은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투에서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사제랑 그런 관계임을 들키면 전전긍긍하며 훗날을 두려워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마왕을 쳐다보자 마왕의 붉은 입술이 다가온다.
“무슨 생각을 하지?”
그는 내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모조리 파악하고 말겠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그의 입술이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을 느끼면서 침착하려 애썼다.
“그게…… 읏, 그러니까, 수하를 그렇게 괴롭히면 문제가 생기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아.”
마왕의 길고 큰 손이 내 옷 속으로 들어온 것을 느끼며 나는 어깨를 떨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작은 열기가 싹터서 몸을 어지럽히는 느낌이었다.
마왕이 말했다.
“어차피 그들은 내게 복종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내가 사제랑 놀아나든, 생명을 품게 하든. 상관없이 말이야.”
“뭐?”
나는 너무나 놀라서 그를 큰 동작으로 밀쳤다. 하지만 마왕이란 그렇게 쉽게 밀려나는 존재가 아니다. 밀친 팔을 도리어 붙잡아 올린 그는, 나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둬 두고 찌를 듯이 응시했다.
그 눈길은 잔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했고 의아하다 싶을 정도로 열망에 차 있었다.
“뭐가 그리 놀랍지? 내가 한 말이 맘에 들지 않았나?”
“유, 유희란 건…….”
나는 그에게 설명하려 했다. 유희란 그런 게 아니라고.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 전에 그가 먼저 의견을 피력했다.
“유희는 내가 즐기면 되는 거야. 그 행위에 한계란 없지.”
“전……!”
“저번처럼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셈인가?”
마왕은 비웃듯이 말하고는 굳어진 내 얼굴을 보았다. 어둡게 노려보고 있는 나를 말 없이 쏘아본 마왕은 이내 잡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나는 열기 가득했던 손이 사라지자 재빨리 손목으로 눈을 돌렸다. 피부에는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했던 불길한 말이 그곳에 머무르는 느낌에 나는 손으로 손목을 주물렀다.
마왕의 눈길이 내게 들러붙어 왔다.
“오늘 왜 날 거부했지?”
“……동료들이 바로 근처에서 자고 있어서요.”
나는 작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왕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좋아.’라고 말했다.
“오늘 그대를 부른 게 의미 없어지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
“내 말을 지켜야 하니까.”
마왕은 자신이 했던 약속을 말하고 있었다. 내 세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나를 존중해 주겠다고 말한 것을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순순하게 물러나자 약간의 의구심마저 들고 말았다. 혹시 그는 다른 음심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마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뒤로는 나를 기만하고 나쁜 짓을 꾸미는 게 아닐까.
“뭐하는 거지? 계속 서 있을 셈인가.”
“네?”
그가 손짓하자 머릿속의 안 좋은 생각이 희미해졌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이 즐겨 앉는 아늑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
명령과도 같은 말에 순순히 응하면서도 나는 의아함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먼저 물어왔다.
“왜?”
“아, 아뇨. 절 돌려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대를 부르는 데 들어간 내 힘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순 없어.”
마왕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출출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네?”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잔인하고 사악하다고 일컬어지는 마왕이 이 무저갱 같은 지하 세계에서 나에게 배가 고프냐, 뭘 먹고 싶냐는 주점 종업원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를 쳐다보고 있자 마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나를 무척이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눈인데.”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어조에 나는 표정을 싹 바꾸며 말했다.
“밤이니까 과일이나 쿠키 정도가 좋겠어요.”
“그러지.”
“아. 먹을 음료도 주시는 거죠?”
내 대담하면서도 뻔뻔한 대꾸에 마왕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나의 말레드레드.”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왠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보여 주는 호의가, 띠고 있는 미소가, 부르는 호칭이 의미심장하다. 이걸 과연 평범한 반응이라고 흘려 넘겨도 될까?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든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 감정은 가슴을 안쪽에서부터 눌러오며 내 태연함과 방만함을 건드리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내가 슬며시 두 주먹을 다시 쥐었을 때, 마왕이 위로 손을 휘저었다.
파박.
천장에서 검은 불꽃이 튀었다. 곧 그곳에서 나타난 무언가는 살아 있었다. 나는 움찔해서 바라봤다. 귀는 토끼만큼 길었고, 눈은 저번에 보았던 눈알 마물처럼 커다랬다. 그러나 훨씬 순종적인 눈빛이었고, 부드러운 눈의 깜박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왕을 충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마왕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내 손님이 먹을 만한 과일과 간식, 음료를 가져오도록.”
그러자 그것은 나를 바라봤다. 귀가 쭈뼛거리며 눈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나를 파악하려는 듯 짧은 응시가 이어지고, 그것은 곧 고개를 돌려 마왕에게 말했다.
“인간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추려오겠습니다.”
순식간에 그것이 사라지자 나는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마물이라면 절로 몸이 굳어지고 만다. 가시지 않은 두려움으로 소파의 등받이를 꽉 잡은 채 마왕에게 물었다.
“마물이 말도 하네요?”
“저건 마족이야.”
마왕의 대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마왕이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생김새도 인간 형상이 아니고, 마기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서…….”
“마족은 생김새부터 마기까지 다양해. 마물 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채로운 형상으로 각자 나름의 마기를 품고 있지. 저것은 마왕성에 사는 마족이라서 덜 위협적으로 보일 뿐, 전투에서는 꽤나 쓸 만한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