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렇듯 스스로가 외부의 평가에 민감했기 때문에 늘 몸가짐을 조심했는데, 비키에겐 그 모습이 어른스럽고 현명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겠지만 시찰단의 일을 하며 왠지 친숙함이 깃든 비키에겐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속이는 기분이 들어서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딱딱함이 감도는 객관적인 어조로 말했다.
“더 좋은 사람이 많거든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사람들이 말이죠.”
그러자 비키가 멈칫하더니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에겐 어떤 신념마저 느껴졌다.
“많이 만나더라도, 그들이 설사 더 굉장한 사람이라고 해도, 제게 말레드레드는 늘 특별할 거예요! 제가 처음으로 만난 그런 분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말.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던 면을 알려 주며 내 가슴 속의 허점을 찔러온 것이다. 그녀는 특별함이란 무엇인지, 다른 사람과 누군가를 다르게 보는 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순 명쾌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은 어떤 논리적인 판단이나 비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 느꼈던 그 강렬하고 충격적인 인지가 사람의 이성과 감정을 지배하며, 늘 그를 특별하게,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구분시킨다. 나는 그녀의 말에서 아론을 떠올렸고 마왕을 떠올렸다.
둘 다 어떤 식으로든 처음이라는 나를, 나라는 인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론은 어릴 적 추억의 상대로서, 마음에 품은 연심을 발전시켜 나를 탐했고, 마왕은 뜻밖의 만남에서 유희를 제안해, 그것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오는 나를 반겼다.
두 남자 모두 이런 내가 처음이기 때문에 더 나를 원했고, 관계를 이어 가길 바랐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거리감을 원하든 간에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나를 탐하게 되는 지점까지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끄럽지만 말레드레드와 시찰단 일이 끝나도 인연을 이어 가고 싶어요. 말레드레드 생각은 어때요?”
멈칫.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 비키에게 굳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비키가 움찔해서 나를 보았다가 곧 우울해진 얼굴로 말했다.
“무, 물론 말레드레드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고요! 무척 슬프지만, 아, 아니, 아쉽지만 성숙한 어른으로서 떠나보내도록 노력을…….”
금세라도 눈물이 고일 듯 촉촉해지는 눈가를 보면서 나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저도 좋아요, 비키.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였어요.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해서.”
정확한 이유는 그녀의 말이 마치 두 남자의 태도를 떠올리게 했다는 데 있다. 적당히 즐기고 빠져나오고 싶은 나와는 달리, 더 깊고 오래 이어질 관계를 원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를 말이다. 나는 자꾸만 두 남자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로 논점이 흐려지자 그들을 마음 저 멀리 밀어내려고 애썼다.
“저도 비키와 계속 만날 수 있기 바라요.”
“정말요? 아, 좋아라! 우리 수도에도 놀러 가고, 축제도 구경 가고, 별장에도 쉬러 가요! 제가 알고 있는 재미난 일은 모두 소개해 줄게요!”
비키의 들뜨고 흥분한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이런 기분도 한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로 돌아가 익숙한 귀족 생활에 젖게 되면, 나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서서히 이곳의 생활을 잊게 될 테니까. 이런 모험도, 이런 감정도 있었다는 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모조리.
나는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아니,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는 방관한다고 말할 만큼.
“순조롭네요.”
베리스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마물들이 쏟아져서 몸과 마음을 어지럽혔던 오전 나절과는 달리, 점심을 먹고서도 우리는 평화로운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비키는 가끔 덧창으로 기사단장과 기사단을 살폈다. 그들은 말을 탄 채로 무거운 갑주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우리를 따라왔고, 오후가 되어서 마을에 도착하자 그제야 한숨들을 쉬며 긴장했다는 심정을 드러냈다.
베리스의 도시 영주는 번쩍이는 기사단이 시찰단과 함께 오자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작은 소도시의 영주로서 그녀는 이번 일에 대해서 미리 전해 듣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민망한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머물 곳을 지정해 주겠다고 말한 뒤, 가신들 쪽으로 몸을 돌려 허둥지둥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성기사단장은 측근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찰단이 도시를 행진하는 동안 부대는 둘로 갈라져 하나는 시찰단을 호위하고, 다른 하나는 마을 주변을 경계한다.”
그는 엄한 어조로 딱딱하게 명령했다.
“밤이라고 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마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니까.”
그는 그렇게 경고한 뒤 비키를 보며 말했다.
“시찰단이 도시를 함부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열매 같은 걸 딴다고 무모한 행동을 하는 건 당연히 안 될 일이고요.”
나는 그의 눈빛이 잠깐이지만 나를 향했다. 그는 이미 자초지종을 들었을 텐데도 아침의 일로 내가 부주의했다고 분명하게 생각하는 눈이었다. 비정한 비난이 담겨 있는 눈을 보면서 나는 조금 불쾌해졌지만 티 내진 않았다.
그때, 가만히 있던 비키가 나섰다.
“따로 행동한 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열매를 구하러 간 거였어요. 말레드레드의 행동 덕분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심지어 시찰단까지 목숨을 구했고요.”
“우연히 잘 막았다고 경솔한 행동을 칭찬받아서는 안 됩니다.”
“겨, 경솔하다니요! 말레드레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키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려 들자 뒤쪽에 있던 라드가 불쑥 나타나서 끼어들었다.
“단장님. 주위 경계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정찰 부대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느닷없이 끼어든 사람답지 않게 유창하게 말을 이어 갔다.
“도시가 성벽이 전혀 없는 곳이어서요. 계속 이어지는 평야에 꽃을 키워서 생활하는 주민들이 많다 보니, 어디까지 경계선을 구축해야 할지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 보도록 하지.”
짧게 말한 그는 몸을 돌리면서도 라드를 한 번 노려보았다. 제 조카를 보호하려는 행동이 못나 보였다는 걸 아는지, 라드는 고개를 숙이면서 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윽고 그가 나가고 나자, 비키는 큰 소리로 ‘열 받아요!’ 하고 외쳤다.
“너무해요! 진짜!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니까요!”
“비키, 비키.”
라드는 진정하라는 듯이 손을 저었으나 비키는 흥, 소리를 내면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을 확 잡으면서 그에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가요, 말레드레드! 꽉 막힌 기사단하곤 무얼 말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우린 우리의 임무에나 집중해요!”
나는 얼떨결에 따라가면서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라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그가 잘못한 건 없었는데 마음이 상한 비키에겐 그런 걸 섬세하게 따질 여유가 없었나 보다. 나는 임시 천막으로 들어와 비키에게 새 사제복을 지급받으면서 말했다.
“비키의 숙부는 이 일을 오래 해 왔죠?”
“제가 알기론 어렸을 적부터 신성력을 발휘해 성기사 눈에 띄었어요. 바로 훈련소에서 들어갔고, 나오자마자 쭉 이 일을 해 왔어요. 훈련소에서의 경력까지 합하면 거의 10년쯤 기사로서 일해 오지 않았나 싶어요.”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가며 설명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마물과의 싸움을 진정 오래 해 온 셈이네요. 그게 참 쉽지 않은데.”
“그렇죠. 워낙 신에 대한 믿음이 남다르기도 하고, 이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보니까……. 저도 그래서 숙부라면 무조건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마물들과 끝까지 싸워 남을 사람인데다 사람들의 안전을 늘 중요시하는 성격이라서…….”
말을 늘어놓던 비키는 갑자기 멈칫했다. 어떤 생각이 스쳤나 보다. 아까 그를 못 본 척 빠져나와 버린 게 걸렸던지, 그녀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까 숙부에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했죠? 생각해 보면 숙부는 절 배려해서 끼어들어 준 건데.”
“아마 비키가 다시 말을 걸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해 주지 않으실까요? 비키가 저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 말에 비키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사제복을 옷 위에 걸치는 모습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레드레드. 실제로 숙부를 뵈니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성기사의 교과서 같은 멋진 분이세요.”
나는 빙긋 웃었다. 웃음에 무게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적어도 그녀가 오해하거나 미련이 남는 일이 없도록.
“하지만 딱히 호감은 들지 않네요.”
“아, 아. 아쉽네요. 말레드레드가 숙부랑 결혼하면 매일 같이 놀러 가고, 집도 같이 꾸며 가면서, 제가 머물 손님방도 하나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
상당히 구체적이면서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불편해지는 계획이었다. 그녀는 독립된 가정생활과 부부의 사생활 같은 건 크게 고려하지 않는 걸까. 가정적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에게만 허물없이 굴어서인지 애매해졌을 때 그녀가 이렇게 기운차게 외쳤다.
“상관없어요! 숙부가 아니더라도 우린 계속 친하게 지낼 테니까! 말레드레드가 우리 본가에 오면 보여 주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우리 밤새워 놀고, 목욕도 하러 가요! 야외 온천이 근사한 곳이 많거든요! 처음엔 다들 부끄러워하지만 금세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그녀는 수줍게 웃으면서 내 곁에 달라붙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후자 쪽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내어 본다. 나는 그녀가 야외 온천 중 옷을 입는 게 좋냐 벗는 게 좋냐 물어오기 시작하자 모르겠다며 재빨리 천막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