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운이 좋았어요. 제가 상대할 땐 마물이 한 마리여서요. 모두 서둘러 달려와 준 덕분에 무사히 처리할 수 있었죠.”
협동 전투는 이토록 중요하다. 혼자서는 내 목숨 하나 챙기기도 어렵다는 것을 다시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자 잔잔한 음성이 따라온다.
“그런가요? 하긴, 좋은 동료들을 갖는 것은 무척 중요하죠.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대한 요소니까.”
그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대꾸를 하고선 자세를 바로 하며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전 라드 일레그레라고 합니다. 편하게 라드라고 부르세요.”
“전 말레드레드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독특한 이름이네요. 아주 예쁜 이름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호감 있게 일부러 말을 붙여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를 향해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자 그가 곧 본심을 꺼내 놓았다.
“비키가 저래 봬도 쉽게 정을 주는 아이가 아닌데.”
라드는 조카의 행동의 무척 뜻밖이었다는 듯이 말했다.
“말레드레드가 무척 맘에 들었나 봅니다. 치료를 받게 도와달라고 제게 눈을 부라리다니. 누군가를 위해 그런 행동한 것을 처음 봤어요.”
“절 좋게 봐주어서 고마울 따름이죠.”
내 겸허한 대답에 라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동작 속에는 나를 살피려는 찬찬함이 있었다.
“그런가요. 좋게 본 것도 있겠지만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있는 친구여서요. 실제로도 좋으신 분일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부드럽게 다가오는 미소, 눈으로 전해 오는 느낌이 무척 긍정적이다. 나는 비키가 나에 대해 미리 말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내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을 때 사내는 가슴에 한 손을 갖다 대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모쪼록 일레그레의 일원인 저도,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비키를 잘 보살펴달라고 가문 사람들에게 부탁을 받았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보다도 잘 보살펴 준 이가 있었다니.”
사내는 격식 있는 자세로 미소를 머금었다.
“마음이 무척 편안해지는군요.”
라드가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우아했다. 수도의 명문 가문 출신답게 교양이 넘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무례하게 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더욱 스스로를 다잡았다.
오히려 예의 바르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적당한 웃음을 뿌렸다.
“과분하고도 달콤한 칭찬이세요. 씩씩하고 의욕 가득한 그녀와 일할 수 있어 제가 더 영광이었어요.”
이 대화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계속 이어 가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불편했던 나는 먼저 이 대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재빨리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냈다.
“시찰단 동료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아, 그래요. 가 보셔야죠.”
왠지 아쉽다는 얼굴로 말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혹시라도 아픈 곳이 생기면 말해 주세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같은 신의 종으로서, 마물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조금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싱긋 웃는 그는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제의 표본이었다. 아론도 성기사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남자를 보니 왜인지 거부감이 들었다. 아마도 나 스스로가 일반적인 사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호감이 없어서……?’
이질적인 남자. 라드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훌륭한 가문, 올곧은 태도, 온화한 성품. 모든 게 좋은 남자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는데도, 그와 관계를 맺는다거나, 그와 잘해 보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이 일체 들지 않는다. 그냥 그가 낯설고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아론도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한 완벽한 조건의 사람인데.’
고귀한 핏줄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반듯한 인품의 성기사. 그런데 아론에게는 라드에게선 느낄 수 없는 설렘과 흥분, 욕정과 두근거림을 느끼고 만다. 마치 그럴 운명이었던 것처럼.
‘과거의 추억 때문이겠지.’
나는 쓰리게 웃었다. 울보 아론을 기억하는 내겐, 아론나이드가 완벽하지 않았다.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이 아니라, 빛바랜 일기장의 한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친구이자 동지였다. 아픔과 흠, 차별을 안고 사는 불완전한 존재들…….
나는 문득 비키가 왜 라드를 내게 소개해 주려고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소환사의 이상적인 모습이라 생각하는 비키에겐, 성기사의 모범으로 대변되는 라드가 나와 잘 어울릴 거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비키의 그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사고방식이 보이는 듯해 소리 없이 웃고는 몸을 돌렸다. 라드의 시선이 등 뒤로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다시 볼 일 없다는 생각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대로 시찰단의 임무를 종료하고 본대로 돌아가나 했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본대와 연락해 봤는데요! 베리스로 가래요! 시찰단의 임무를 완수하라고 했어요!”
비키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제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데, 마물이 나타나서 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나 봐요. 그래서 더욱 시찰단의 일이 중요해졌다고 강조했어요.”
비키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면서 지원 온 성기사의 호위를 받아 베리스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이번 경우를 보니, 그들의 보호를 필수로 받아야 한다면서…….”
“그가, 아니, 그의 기사단이 우리를 보호하려고 할까요?”
시찰단 중 하나가 믿기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이들도 그럴 것 같지 않다며 고개를 저어 왔다. 그러나 몇 분 되지 않아 그 예상이 틀렸음을 알았다.
비키처럼 상부와 연락을 주고받은 성기사단장이, 투구 속에서 불만스러운 눈빛을 쏘아내면서 우리와 동행하겠다고 말해 온 것이다.
그는 감정이 억제되어 있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읊어냈다.
“위대한 엘크리찬의 은총 아래 제국의 모든 곳이 보호받기를 높은 곳에서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찰단의 모든 일정에 우리가 함께할 것이니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세요.”
그는 위엄이 서린 눈동자로 우리를 쏘아보았다.
“우리 기사단이 보호를 맡은 이상, 나태나 방만, 일탈 등의 부도덕한 행위가 일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
“알아들었습니까?”
“네에.”
비키가 독촉하는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잡아 돌렸다.
“떠날 채비를 하세요. 10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그러곤 그는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제 할 말만 하고 냉큼 떠나 버린 그를 보면서 비키는 허탈감에 휩싸였다. 약간의 분노와 어이없음, 그리고 황당함에 굳어져 있던 그녀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우리를 쳐다보는 눈엔 기운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겠어요.”
침울하게 변한 그녀를 보면서 시찰단은 서둘러 비키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릴 지켜 준다니까, 베리스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거예요!”
“맞아요. 그런 뒤 헤어지면 다시 얼굴 볼 필요 없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그래요, 비키. 말은 저렇게 해도 일은 잘하겠죠. 저런 자신감이라면 마물 처리는 확실하게 할 거예요.”
성기사와 소환사들은 내심 호위를 받게 되어 무척이나 안도한다는 얼굴이었다. 편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보면서 비키는 그럼 다행이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비키의 눈길은 잠자코 있는 내게 꽂혔다. 그녀는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사단과 함께하면, 오늘처럼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내가 다쳤던 것을 아직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처가 나았지만 목 뒤의 상처는 깊었던 터라 얇은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럼요. 훨씬 줄어들겠죠.”
“후우, 그렇다면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여야겠어요. 사이가 좋아야지 협동하는 데도 문제가 없을 테니까!”
비키는 우울함을 걷어 버리며 다시 활기찬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유연함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특정 생각이나 기분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고 상황의 경중을 따져서 융통성 있게 변화한다. 저 스스로를 조절할 줄 안다. 그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세상을 좀 더 현명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처신이자 재주였다.
나는 배울 점이 많은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뭐, 뭐예요? 말레드레드?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주는 거예요?”
갑자기 비키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참 지혜롭고 노련한 태도여서요.”
“그, 그런 말을 하다니요! 누, 누구도 아닌 말레드레드가!”
그녀는 흥분해서 올라간 목소리에 주위 사제들이 돌아보자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여전히 빨개진 볼이 귀엽게 느껴지는 그녀는,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기준에선 말레드레드만큼 어른스럽고 현명한 여자는 없었어요.”
“앞으로 그런 사람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거예요.”
나 같은 여자는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자가 생각처럼 그다지 성숙하다거나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냉소적일 만큼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나 자신을 싫어한다는 게 아니다. 나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고, 이해했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강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을 은폐시키고 싶어 했다.